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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완선의 살다보니 SF] 오후 5시 30분의 술
‘나처럼’ 마시는 일은 하고 싶다
일단 며칠 마셔보면 분명해지지 않을까? 이 정도면 스카치를 몇 병 구입할 핑계는 충분히 마련한 듯하다.
심완선 SF 칼럼니스트가 일상에서 벗어난 딴생각을 풀어내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격주 화요일 연재. |
커트 보니것은 매일 오후 5시 30분마다 스카치와 물을 마셨다고 한다. 황급히 시계를 보니 5시 48분이었고, 요즘은 위스키보다 전통주를 사고 있는 탓에 집에 스카치가 하나도 없었다. 보니것 같은 작가가 되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도 와인도 버번도 럼도 아니고 스카치와 물이라니, 그건 잘 숙성된 증류주의 향을 느끼며 천천히 잔을 비우는 취향이다. 더욱이 보니것은 스카치 몇 잔으로 “윙윙거리는 정신을 마비” 시킨 후 저녁 식사를 요리하고 재즈를 듣다가 10시에 잠든다고 썼다. 이토록 규칙적인 사람이라면 밥 먹고 바로 설거지하는 습관, 물건은 한 번에 필요한 만큼만 구매하는 습관도 몸에 배었을 것만 같다. 반대로 매일 시간에 상관없이 마셨을 듯한 찰스 부코스키 같은 작가도 있다. 부코스키의 칼럼 모음집인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에는 이런 대화가 등장한다.
“아직까지 아무도 안 죽었어.” / “아무도 나처럼 술을 마시지 않으니까요. 자, 이제 말해요. 어떻게 이 빌어먹을 곳에서 나가죠?”
‘아무도 나처럼’의 의미는 이중으로 읽힌다. 그는 돈이 떨어져 일거리를 찾다가 뉴욕 지하철 철로를 정비하는 자리에 들어가는데, 그곳은 발을 삐끗하면 지옥으로 직행할 것처럼 위험하게 생겼다. 그런 곳에서 술을 마시고 일하는 사람은 없을 법하다. 마시더라도 부코스키처럼 마셔대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바로 일을 그만두고 뉴욕을 떠난다. 술은 계속 마신다. 뉴욕 지하철이 아니라도 빌어먹을 곳과 젠장할 일은 세상에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진창에 처넣는 버릇이 있는 성격 더러운 빌어먹을 음탕한 늙은이다. 그를 좋아하진 않지만(여자 엉덩이와 섹스 이야기를 지나치게 많이 한다) 술이 필요한 기분은 나도 알고 있다. 술병이 앞을 가려주고 뒤로는 아무도 없는 상황에 들어서면, 내가 입고 있던 위선이 알코올에 용해되며 비로소 제대로 벌거벗은 느낌이 든다. 명징한 상태보다 명정상태일 때 모든 게 조금씩은 더 웃기고 사랑스럽다. 부코스키의 표현을 빌리면 “술에 취하고 굶주리노라면 어떤 편안함이 감돌았다.”
다만 나는 편안함을 말할 만한 술꾼은 아니다. 우리 관계는 동경과 탐욕과 실망과 거부감으로 얼룩져 있다. 내 탓이긴 한데 솔직히 술도 잘못했다. 사람 마음을 흔들어 괜히 기대하게 만든 잘못이다. 나는 글로 먼저 술을 배웠는데, 영미권 미스터리와 스릴러에는 어딘지 멋있고 익숙지 않은 이름들이 나왔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등장인물은 셰리를 홀짝이고 미국의 사립 탐정은 라이나 럼을 싼값에 들이킨다. 저택의 도련님은 어른이 되어서도 유모가 만들어 주는 에그노그를 마시고 잠을 청한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아몬티야도 술통』의 아몬티야도(번역에 따라 아몬틸라도)는 뭔지 몰라도 고급 포도주의 이름이었다. 술을 열심히 마시러 다닌 지금은 옛날만큼 문학 속 이름을 환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몬티야도는 뒤에서 진하게 올라오는 견과류 향이 매력적이지만 신맛이 강해서 내 취향은 아니었다. 압생트를 처음 마셨을 때만큼 허망한 기분이었다. 요크셔푸딩이 기름을 잔뜩 먹인 짭짤한 빵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술 먹은 짬으로 단언컨대 레이먼드 챈들러의 김렛도 맛있진 않을 것이다.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에는 주인공 ‘필립 말로’에게 영국군 출신인 ‘테리 레녹스’가 김렛을 마시며 불평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에게 “진짜 김렛은 진 반, 로즈 사의 라임주스 반을 섞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섞지 않는” 것이다. 로즈 사의 라임주스가 아무리 달아봤자, 보통은 진을 라임주스의 두세 배로 넣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진짜 김렛’은 생각만 해도 머리를 찌를 듯이 시큼하다. 비터를 넣지 않으니 향도 단순하지 않을까. ‘남자다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고집할 법한 레시피다. 이를 두고 친구와 수군거린 적이 있다. 친구는 테리가 말로와 함께 있어서 김렛을 마시는 거라고 해석했다. 부잣집 사위가 되었는데도 말로와 만나는 동안 싸고 거친 술을 찾는 이유가 있다는 거였다. 생각해 보면 챈들러의 소설에는 덩치 좋은 남자들이 호감 섞인 끈끈한 시선을 주고받는 장면이 중간중간 나온다. 하드보일드는 남자들이 ‘자네, 복싱할 생각 없나?’ 같은 말로 플러팅을 던지는 세계다. 챈들러의 첨언에 따르면 “진정한 탐정은 절대 결혼하지 않”으며 여자에게 초연한 법이다.
내친김에 말하자면 ‘본드 마티니’도 탐탁잖다. 이언 플레밍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는 “젓지 말고 흔들어서” 만든 보드카 마티니를 주문한다. 마티니는 깔끔한 맛이 장점이다. 대체로 기포가 섞이지 않도록 저어서 만든다. 흔들어서 거품을 내고 얼음을 녹인 술이 좋다면 마티니를 고를 이유가 별로 없다. 무엇을 마실지는 자기 마음이라 해도, 나는 본드 마티니를 두 번 주문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제임스 본드마저 영화 <007 카지노 로얄>부터는 본드 마티니가 아니라 베스퍼를 주문한다. 진과 보드카를 기본으로 가볍게 젓는 레시피다. 나는 원작 소설을 못 본 터라 영화에서 베스퍼를 처음 알았다. 본드가 레시피를 읊는 순간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바로 고전의 재탄생이요, 시대정신이다. 저것은 두 번 넘게 먹을 만하다. 나도 먹어봐야지.
하지만 내게 진짜 마티니 영화는 아이다 루피노의 <거칠게, 빠르게, 아름답게>다. 엄마 ‘밀리’는 교외의 평범한 주부다. 반면 딸은 어린 나이부터 테니스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다. 밀리 자신은 보잘것없어도 딸은 스포츠 스타가 될 가능성이 있다. 딸의 경기에서 상업적 성공의 냄새를 맡은 어느 기자가 밀리에게 접근한다. 밀리는 딸을 스타로 프로모션하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때 마시는 술이 드라이 마티니다. 남자 기자는 도회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익숙하다는 듯 바로 드라이 마티니를 주문한다. 드라이 마티니는 진에 베르무트를 살짝 더하고 올리브를 올려 만든다. 거의 달지 않고 도수가 높다. 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부담스러울 수 있다. 나는 밀리가 마티니를 몰랐으리라고 확신한다. 술집에서 자기 몫으로 술을 주문하는 일 자체가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밀리는 주저 없이 자신도 드라이 마티니를 달라고 말한다. 그녀도 남자와 동일한 술을 마시겠다는, 경쟁과 성공의 세계에 뛰어들겠다는 신호다. 다음 차례는 자기 잔을 책임지고 마시는 일이다.
이후 밀리는 성공에 눈이 멀어 타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욕망을 실현하려다 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여자처럼 보인다. 욕망을 드러내는 여자는 쉽게 나쁜 여자로 낙인찍힌다. 시절을 고려하면 더욱 그랬을 터다. <거칠게, 빠르게, 아름답게>는 1951년 영화다. 아이다 루피노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매우 드물었던 여성 감독이었다. 그녀는 배우로 카메라 앞에 서다가 그만두고 제작자가 되어 다른 여성의 이야기를 찍었다. 아이다 루피노 회고전을 소개하는 조혜영 프로그래머의 글에 의하면 루피노의 <아웃레이지>(1950)는 할리우드에서 두 번째로 강간을 소재로 삼은 영화다. 여기서도 술은 남자가 마시는 것이지, 착한 여자에게 권장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여자주인공은 단순히 가련한 여자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시대가 바뀐 덕인지 운이 좋은지, 나는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고 그냥 술 좋아하는 여자로 잘 살아있다. 드라이 마티니를 주문해도 아무도 ‘여자분이 드라이 마티니요? 특이하시네요’라고 하지 않는다. 혼자 바에 마시러 다녀도 큰일 나지 않는다. 마음껏 맛있는 술을 찾아다닐 수 있다. ‘진짜 김렛’을 마다하고 ‘여성분들이 좋아하는 달달한 술’을 좋아하는 것도, ‘남자의 품격을 상징하는 싱글몰트’를 연달아 마시는 것도 내 취향이다.
그래도 취할 때면 가끔 내게 없는 ‘남자다움’을 생각한다. 내가 밖에서 고주망태가 되지 않는 이유는 성별과 무관하지 않다. 주량으로 허세 부리지 않고, 취해도 싸움박질하지 않고, 술과 완전히 편안한 사이가 되지 못한 이유도 모종의 관련이 있을 듯하다. 그러고 보면 옛날에 어느 작가가 문인들의 술자리를 두고 농담처럼 한탄한 적이 있다. 꼭 누가 누구를 때리고 끝난다는 말이었다. 올리비아 랭의 논픽션 『작가와 술』은 알코올 섭취로 유명했던 미국 현대 작가들의 삶을 추적하는데, 정말 우연히도 6명 중 5명이 아내를 둔 백인 남자다. 나머지 1명은 동성 파트너가 있던 백인 남자다. 앤소니 버제스의 고전 SF 『시계태엽 오렌지』는 남자 청소년이 주인공이기에 성립하는 이야기다. 주인공 ‘알렉스’는 패거리와 함께 밀크 바에서 마약을 섞은 우유를 마시며 취하곤 한다. 그러면 “초특급 폭력”을 휘두르는 “깡패 짓거리”를 벌일 기분이 난다. 그들이 “내내 하는 일이라곤 계집애들을 임신시키거나, 노인들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도둑질에 싸움질”이다. 남자답게 취하고 남자다움에 취하는 일이다. 그들처럼 취하고 싶진 않지만, 마음 편히 취해도 된다는 듯 겁 없이 마시는 모습에는 질투가 난다.
나는 술꾼이 되진 못했으니 부코스키처럼 “아무도 나처럼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말할 일은 없다. 하지만 ‘나처럼’ 마시는 일은 하고 싶다. 그렇다면 무슨 술을 어떻게 마시면 좋을까? 사례를 종합해볼 때 역시 오후 5시 30분에 혼자 스카치 몇 잔을 마시는 방법이 지극히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레이엄 그린에 따르면 “스카치를 위한 시간은 언제나 있”는 법이니까 시각은 바꿔도 좋겠다. 직접 읽진 못했지만 그린의 『하바나의 남자(Our Man in Havana)』는 위스키 수집이 상당히 중요한 장치로 사용된다. 주인공은 미니어처 스카치와 버번을 모아둔 덕분에 스파이 활동에 성공한다. 앞서 언급한 『시계태엽 오렌지』를 봐도 스카치를 마시는 어른들은 십 대들과 달리 폭주하지 않는다. 물론 참고자료가 편중되었다는 생각은 든다. 나는 20세기의 남성중심적 문학판 술꾼들의 망령에 붙잡혀 있다. 김혼비의 『아무튼, 술』이나 미깡의 『술꾼도시처녀들』을 봐도 소주에 혹하질 않는다. 이건 소주 잘못인가? 아니면 내 취향 탓인가? 내가 정말로 스카치를 좋아하는지 그저 환상에 빠져 있을 뿐인지, 일단 며칠 마셔보면 분명해지지 않을까? 이 정도면 스카치를 몇 병 구입할 핑계는 충분히 마련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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