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7』
에드워드 애슈턴 저/배지혜 역 | 황금가지
『미키7』을 읽었을 때, 마샬은 그냥 재수 없는 사령관이었다. 예로니모 마샬은 군인, 지휘관으로서 명령하는 일이 몸에 밴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독보적인 최고 결정권자라고 생각한다. 식민지 거점에서는 그게 사실이다. 소설 주인공인 미키7에겐 썩 달갑지 않을 사실이다. 마샬은 독실한 종교인으로서 인간 복제를 혐오한다.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하나뿐이므로 육체가 죽으면 영혼도 사라진다. 그다음 아무리 신체를 재생하고 기억을 업데이트하더라도 ‘진짜’ 사람은 될 수 없다. 미키처럼 거듭 재생된 사람은 기껏해야 도구에 불과하다. 마샬에게 있어 모든 미키들은 인간이 아니라 소모품이다. 소모품 주제에 명령을 거스르고 인간인 척할 때는, 제거해야 할 괴물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은 『미키7』을 영화로 각색하면서 마샬 사령관을 케네스 마샬로 바꾸었다. 케네스 마샬은 군인보다 정치인 성격이 훨씬 강하다. 그는 명령보다 연설에 익숙하며, 자기 모습을 연출하고 지지자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데 신경을 쓴다. 소설과 똑같이 독실한 신자인데,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 그의 종교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마샬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에 대한 믿음을 비슷한 선상에 놓는다. 종교는 그가 자기편을 결집하는 데 요긴하게 쓰인다. 마샬이 ‘할렐루야’를 외치며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은 신자들에게 친근하고 신실한 느낌을 줄 것이다. 그리고 미지의 행성을 개척한다는 위대한 사명을 운운하며 자신의 비전을 열정적으로 펼칠 때는 믿음직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줄 것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하는 차별과 혐오는 사람들을 배타적이고 끈끈한 집단으로 묶어준다. 우주선 승무원의 다수가 마샬에게 열광한다. 케네스 마샬은 무능하고 자아도취적인 독재자다. 안타깝게도 단순한 농담거리는 아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서 그렇다. <미키17>은 비현실을 현실의 영역으로 확 끌어당긴다. 여기서는 사회적 함의를 강렬하고 노골적으로 눌러 담은 맛이 난다.
반면 소설은 ‘보트피플’과 같은 난민의 취약함에 중점을 둔다. 인류는 천 년 전쯤 지구에서 벗어났다. 다시 말해 천 년 전부터 ‘디아스포라’를 시작했다. 일반 명사로서 디아스포라는 자의든 타의든 본래 살던 지역을 떠나 다른 곳으로 흩어진 사람들을 뜻한다. 이들은 이주민, 이방인, 혼종의 위치에서 복잡한 갈등을 겪는다. 소설에서 말하는 디아스포라는 인류가 지구를 떠나 우주 곳곳으로 흩어지는 것을 지칭한다. 옛 지구는 쓰레기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인류 멸종을 피하려면 지구는 아니어도 거주 가능한 행성으로 떠나야 했다. 어떤 재난에도 끄떡없도록 널리 외계로 씨를 뿌려야 했다. 모든 사람이 난민이 되고 디아스포라로 살아남았다.
학교에서는 디아스포라를 의지, 용기, 성취와 같은 지극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가르친다. 인류는 식민지를 정복하는 제국과 같은 태도를 취한다. 실제로 정착지로 찾아낸 행성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인류에 복속시켰다. 토착 식물이 방해가 되자 지표면을 전부 태워버린 경우가 있었다. 테라포밍은 인간이 기존 생태계와 벌이는 전쟁이다. 행성의 환경을 지구와 유사하게 인간이 살 만한 형태로 바꾸는 것이 테라포밍이다. 유해한 생물을 소거하는 작업도 물론 테라포밍에 수반된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니플하임은 대륙 전체가 멸균 세례를 받았다.
미키는 성공보다 실패 사례에 주목한다. 기록을 들춰보면 무수한 죽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정보 검색이 간편해진 시대에 굳이 기록을 찾아 읽는 사람은 드물지만, 미키는 매우 드물게도 역사학을 전공으로 택했던 사람이다. 기록에 따르면 ‘에덴’ 행성을 향한 첫 번째 이주 시도는 전멸로 끝났다. 행성 간 이동은 빛의 속도로도 몇 년, 몇십 년이 걸리기 때문에 우주선은 반드시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인류가 쏘아 올린 첫 우주선이자 이주선인 ‘칭시’도 식물을 재배하는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식물을 우주의 방사능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식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선내의 자급자족 시스템은 빠르게 망가졌다. 섭취 칼로리가 부족해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타인의 칼로리가 되길 청했다. 죽어서 편해지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은 결국 맨몸인 채로 우주선 밖으로 몸을 던졌다.
에너지와 기술적 문제로 인해 한번 발사된 우주선은 출발지로 돌아갈 수 없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선택을 취소할 수가 없다. 목적지에 도착하더라도 그다음에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거주 가능한 행성이라는 관측 결과가 틀렸다고 판명될 수도 있다. 혹은 토착 미생물에게 감염되어 몰살당할 수도 있다. 다른 행성에서 인간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고, 극히 취약한 상태로 도움을 청하는 이방인이다. 정착에 실패하면 갈 곳이 없으므로 다음 선택지는 죽음뿐이다. 그래도 배에 올라탄 사람들은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난민의 이야기는 소설 곳곳에 등장한다.
우주선은 난민 보트보다 튼튼하긴 하다. 반물질 덕분에 에너지는 넉넉하다. 사이클러를 사용하면 선내 자원을 효율적으로 재활용할 수 있다. 사이클러는 쓰레기를 이리저리 분해하고 재조합해 필요한 물건으로 재생한다. 우주선에서 생활하는 이백여 명이 사이클러를 경유하여 먹고 싼다. 그 결과물이 다시 사이클러로 들어가고, 사람들은 사이클러에서 나온 것을 또다시 먹고 싼다. 칼로리 섭취는 엄격히 통제된다. 모든 사람이 오로지 배 안에 존재하는 자원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니플하임에 도착해 돔을 세운 다음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자원은 소중하다. 그리고 미키는 선내의, 돔 내의 자산이다. 쓰고 버려도 되는 ‘익스펜더블’이다. 미키가 죽을 때마다 그의 몸은 알뜰히 사용된다.
익스펜더블 직역 종사자는 죽는 게 일이다. 미키의 신체는 우주선이 출발하기 전에 낱낱이 스캔되었다. 재료만 있으면 사이클러로 몇 번이고 미키의 몸을 찍어낼 수 있다. 기억은 업데이트했던 대로 이어진다. 그러니 미키의 죽음은 ‘진짜 죽음’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죽을 정도로 위험한 문제, 혹은 죽을 게 뻔한 문제에는 미키가 사용된다. 그럼 ‘진짜 사람’이 죽지 않아도 된다. 더군다나 미키는 성인인 채로 재생되므로, 인력을 보충하려고 사람을 배아부터 키울 필요도 없다. 미키의 죽음은 경제적으로 옳다. 적어도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다른 사람들도 미키의 죽음을 경시한다. 넌 죽어도 되잖아. 어차피 다시 살아나잖아. 죽으면 기분이 어때?
다시 살아나는 게 맞을까? 미키6이 죽고 나서 재생된 미키7은 이전 미키들과 같은 사람일까? 소설이 전개되는 내내 미키7은 자신이 과거의 미키들과 다른 사람 같다는 혼란을 겪는다. 테세우스의 배가 어쩌니, 재생이네 뭐네 해봤자 자꾸 위화감이 남는다. 중복해서 재생된 미키8을 마주한 다음에는 미키들이 별개의 개인이라는 생각이 뚜렷해진다. 미키의 연인인 나샤에게도 그간의 미키들은 조금씩 다른 사람이다. 나샤는 미키들의 죽음을 쉼표보다는 마침표로 느낀다. 다음 미키가 곧바로 이어지더라도 이전 미키는 끝난 것이다. 그녀는 반가움과 애도 사이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표현한다. 익스펜더블 미키는 불멸이 아니다. 미키들은 하루살이다. 미키7은 유일하다. ‘진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죽음은 한 번뿐이다. 아프고 무섭고,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사건이다.
그렇다면 미키7을 니플하임에 당도한 무리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떠돌이/난민/보트피플/디아스포라로 읽어도 좋지 않을까. 익스펜더블인 미키에게는 안정적인 자리가 없다. 고정된 업무도 없다. 누가 죽을지도 모르는 문제가 생기면 그가 차출된다. 미키는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영역을 전전한다. 심지어 신체를 보존할 수조차 없다. 다른 사람들이 제자리에 남아있는 동안 그의 몸은 위험천만한 항해를 시작한다. 파도가 크게 철썩이면 미키는 파괴된다. 미키7은 니플하임의 토착 종족인 크리퍼와 인간의 중재자라는 자리에 상륙해서 겨우 살길을 찾는다.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임시 거처다. 영화와 달리 소설에서 마샬은 사령관 자리를 굳건하게 지킨다. 그리고 미키를 뿌리 뽑고 싶어 한다. 그는 아직 정착에 성공하지 못했다.
작중에 등장하는 행성 이름을 덧붙이고 싶다. 인간이 정착한 수백 개의 행성 중에서 기존에 살고 있던 토착 지성체와 공존을 이룬 행성은 단 하나, 롱샷이다. 그곳에서는 정착민과 난민이 섞여 살아간다. 지나가듯 잠깐 언급될 뿐이라 잘은 몰라도 롱샷에서는 자리 뺐기 싸움이 평화롭게 끝난 모양이다. 그런데 영어로 롱샷은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의미가 있다. 길게 쏘거나 던질수록, 다시 말해 대상과 거리가 멀수록 적중하기 힘든 탓이다. 하지만 영화 등에서 말하는 롱샷은 원거리 촬영을 뜻한다. 대상에 근접할 때와 반대로 원거리 촬영은 전체적인 상을 찍는다. 배경을 포함해 여러 요소가 화면에 함께 담긴다. 뒤로 물러나는 만큼 다른 것들이 들어갈 자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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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7
출판사 | 황금가지

심완선(SF 평론가)
책과 글쓰기와 장르문학에 관한 글을 쓴다. SF의 재미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 및 사회적 평등과 문학의 연결 고리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SF와 함께라면 어디든: 키워드로 여행하는 SF 세계』 『우리는 SF를 좋아해: 오늘을 쓰는 한국의 SF 작가 인터뷰집』 『SF는 정말 끝내주는데』가 있고, 『취미가』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를 함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