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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완선의 살다보니 SF] 아이돌을 사랑하는 마음
‘데못죽’은 아이돌 SF다
나는 멍하니 감탄했다. ‘이렇게 좋은 걸 몰랐다니? 이거 공짜로 봐도 되는 거 맞나? 이렇게 좋은데?’
격주 화요일 연재. |
가끔 아이돌 무대 영상을 찾아본다. 원래 걸그룹에 두루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작년부터 어느 보이그룹에 관심이 생겼다. 13명이 만드는 단체 퍼포먼스가 나를 홀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인원수가 많아서 그런지 박자에 딱 맞춰 대형을 바꿀 때 역동성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어쩌다 예능을 보았을 뿐이었는데… 유튜브가 추천하는 영상은 끝이 없었다. 지금은 그들의 말끔한 얼굴과 표정에서 나오는 매력도 좋다. 일상적인 콘텐츠도 재미있게 봤지만 본업을 잘하는 점이 무엇보다 좋다. 오늘은 우연히 예전 뮤직비디오를 보았는데 너무 좋아서 울 뻔했다. 잘 짜인 영상을 보고 있자니 정말 압도적으로 쾌적했다. 4분 동안, 그리고 뒤이어 한동안 모든 시름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감탄했다. ‘이렇게 좋은 걸 몰랐다니? 이거 공짜로 봐도 되는 거 맞나? 이렇게 좋은데?’
현실의 시름을 날리는 압도적인 쾌적함. 그런 말을 하면 『멋진 신세계』가 떠오른다. 고전 SF에 속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속에선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마약인 ‘소마’를 급료의 일부로 지급한다. 소마를 먹으면 불쾌한 감정이 모조리 사라지고 행복감이 차오른다. 사람들은 약에 취해 사회를 향한 불만을 잊는다. 헉슬리는 이러한 ‘신세계’를 분명 디스토피아로 설정했다. 그러나 현대 한국인에겐 작중 세상이 그리 끔찍하게 다가오진 않는다고 항변하고 싶다. ‘신세계’에서는 노동 계급에 사회가 숙식을 보장한다. 사람들은 표준 노동시간에 맞춰서 일하고, 일이 끝나면 충분히 휴식한다. 일자리가 정해져 있으므로 취업 걱정도 없다. 반면 지금 한국은 주 60시간 노동을 논하고, 최저임금이 중위소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지표체계를 참고하면 올해 최저임금은 월 209시간 노동 기준으로 약 201만 원, 1인 가구 중위소득은 약 207만 원이다. 한국의 1인 가구는 2022년 기준 전체의 34.5%로 제일 많은데, 그중 절반가량이 최저임금 수준의 소득도 얻지 못한다. 고용 불안정이나 청년 실업률도 생각하면 우울하다. 그럼 어디서 소마라도 줘야 균형이 맞는 거 아닌가?
사회비판을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당장 닥쳐오는 하루하루를 버티려면 긴장을 풀고 푹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세상이 팍팍할수록 우리는 멘탈을 지키기 위해 좀 적극적으로 행복한 환상의 세계에 다녀올 필요가 있다. 누가 도피라고 비난해도 괜찮다. 어느 만화 및 드라마의 제목을 빌려 말하면,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더군다나 소마는 과용하면 사망할 위험이 있긴 하지만 보통은 부작용이 없다. 현실에선 소마는 없어도 ‘최애’(자신이 최고로 애정을 주고 있는 대상을 이르는 말로, 본래 오타쿠 용어였으나 사회 일반에 통용되는 단어로 자리 잡은 듯하다)는 찾을 수 있다. 최애 하나를 가슴에 품는 일은 풍진세상을 살아가는 데 든든한 힘이 된다.
내가 물정을 몰라서 쉽게 확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케이팝 시장의 뒷이야기나 ‘팬질’에 따르는 고난을 들어보면 아이돌을 사랑하는 일은 상당히 쉽지 않은 듯하다. 팬심을 안다고 말하기엔 내가 많이 부족하다. 앞서 관심 가는 아이돌이 있다곤 했지만, 그들의 앨범을 따로 사지도 않고(스포티파이로 듣는다) 공연에 가본 적도 없다. 그냥 멤버 얼굴을 모두 알아보고, 이름을 읊고, 목소리를 좀 구별하는 정도다. 매일 소식을 확인하진 않지만 신보가 나오면 바로 들어본다. 누가 욕하면 발끈하고 누가 좋아하면 반갑다. 차마 사랑에 이르진 못하는 수준의 따뜻한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혹시 내가 입덕부정기(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부인하는 기간을 말한다)를 겪는 걸까? 경험이 부족해서 판단하기가 힘들다. ‘오빠부대’라는 말과 함께 자란 세대 치고 나는 케이팝 아이돌 세계를 정말 몰랐다. 지금은 아이돌과 팬덤의 생리를 조금 배웠는데 그나마 다 웹소설 덕분이다. 카카오페이지에서 구독자 수 5억 명을 기록한, ‘아이돌 물’에 대들보를 놓은 웹소설, 바로 백덕수의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을 열심히 읽었기 때문이다.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속칭 ‘데못죽’)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은 다른 사람의 몸에서 눈을 뜬다. 날짜를 확인하니 자신이 기억하는 때보다 몇 년 전의 날짜가 표시된다.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에게 마치 게임처럼 시스템 창이 나타난다. 시스템 창에는 그가 ‘상태 이상’에 걸렸다고 표시되어 있다. 1년 안에 데뷔하지 못하면 사망한다는 상태 이상이다. 그는 어쨌든 돌연사를 피하고자 아이돌을 선발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뛰어든다.
주인공은 열심히 위기를 헤치며 멤버들과 함께 끝내주는 아이돌로 성장한다. 이 성장 서사에는 아이돌 판을 꿰고 있는 듯한 묘사가 틈틈이 등장한다. 아이돌 활동에는 상업성과 진심 어린 열정이 공존한다. 팬덤은 흘러넘치는 사랑을 아이돌에게 쏟아붓는다. 음험하게 얼룩져 있더라도 팬심의 핵심은 사랑이다. 내가 느낀 것도 분명히 사랑이었다. 나는 소설 속 가상 아이돌로 인해 팬심이라 할 만한 감정을 처음으로 느꼈다. 현실에 없는 아이돌을 사랑하느라 애타고 불타고 오락가락했다. 어쩌다 아이돌 이야기를 하면 말이 툭 나왔다. “우리 애들도 공연 잘하는데.” 무대를 직접 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지만, 마음만으론 이미 수백 번 보았다. 소설이 연재되는 동안 나는 북받치는 심정으로 주문을 거듭 읊조렸다. 테스타는 실존한다.
소설이 비현실을 이용하는 방법도 흥미롭다. 데못죽은 서사적으로 특정한 구조를 반복한다. 먼저 등장인물 하나에게 문제가 생긴다. 혼자서는 대처하기 어려운 중대한 트러블이라, 주인공을 비롯해 여럿이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한다. 그 와중에 문제를 겪은 인물의 내면이 드러나고 인물들 사이에 유대감이 쌓인다. 결국 멤버 전원이 번갈아 문제를 경험하는데, 그들은 다 함께 아이돌로는 물론 인간적으로 크게 성장한다. 문제-해결-성장의 반복이다. 그러나 데못죽은 매번 자연스러우면서도 새롭게 상황을 연출해 독자를 끈다. 데못죽의 이야기 규모는 뒤로 갈수록 초현실적으로 커진다. 여기에는 시스템 창에 이어 시간여행, 평행세계, 초월적인 정신 생명체, 마인드 커넥트 등 SF적 장치가 연이어 등장한다. 덕분에 이 소설은 SF가 현실 밖으로 미끄러지는 이야기를 통해 제공하는 여러 쾌감을 공통적으로 선사한다. 다시 말해, 데못죽은 아이돌 SF다.
현실의 시름을 날리는 압도적인 쾌적함.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또 적어본다. 쾌감의 측면에서 소마와 아이돌 세계와 SF는 닮은 점이 있다. 그러고 보면 전에 SF의 하위 장르에 해당하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찬양하는 글을 보았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무엇보다 오페라의 특성을 공유한다는 내용이었다(참고로 어원으로는 관련이 적다). 오페라는 춤, 노래, 음악, 퍼포먼스, 무대 연출이 결합한 종합예술이다. 화려한 자극으로 공연을 가득 채워서 보는 사람이 넋을 잃도록 만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아이돌/SF를 보면 우리는 한동안 말을 잃는다. 기껏해야 말이 되지 않는 감탄사만 흘리는 마비 상태에 빠진다. 강렬한 행복의 세상이다.
이 글을 보고 누가 ‘아이돌/SF가 그렇게 좋냐’고 물어봐 주면 좋겠다. 어느 쪽에든 그렇다고, 진심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그들은 이런 사랑을 받을 만큼 충분히 훌륭하다. 황정은 작가의 말도 인용하고 싶다. "춤을 그렇게 추려면 근육 하나하나가 다 단련되어 있어야 하거든요. 얼마나 노력했겠어요. 세상 가장 하찮은 짓이 아이돌 욕하는 일이에요." SF에 관해서는 내 책의 제목이 된 말을 인용하고 싶다. “왜 사람들이 SF를 더 많이 보지 않을까? SF는 정말 끝내주는데.” 그리고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이런 사랑을 형상화하기 위해, 수많은 팬이 공통적으로 반복하는 말을 인용하고 싶다. “너를 만나서 내가 행복해. 네 덕분에 살아갈 힘이 나. 고마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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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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