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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완선의 살다보니 SF] 이번엔 자다가 보험에 들었더라고

오히려 멈춤이 나를 건강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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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아예 안 자도 되면 좋지 않을까? 가끔 미식을 즐기듯, 원할 때 취미로 잠들면 어떨까?


심완선 SF 칼럼니스트가 일상에서 벗어난 딴생각을 풀어내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격주 화요일 연재.


언스플래쉬

원칙적으로 프리랜서는 원할 때 잘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방종하게 자다간 낭패를 보곤 한다. 잠을 삐끗하면 건강 유지, 연락 주고받기, 일정 관리, 업무시간 확보에 문제가 생긴다. 배명훈 작가가 『SF 작가입니다』 에서 말했듯, 프리랜서는 일정을 조정하기 쉬운 직업이지만 그건 한가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시간에 안 한 일은 결국 다른 시간에 해야 한다. 일은 미뤄봤자 커지기만 한다. 내가 보기엔 잠도 마찬가지다. 자느라 일을 미루든, 일하느라 잠을 미루든, 그 대가는 이자를 쳐서 돌아온다. 더군다나 나처럼 체력이 간당간당한 사람은 수면은행 신용등급이 낮다. 잠빚을 졌다간 리볼빙보다 높은 이자율로 잠을 갚아야 한다. 하루 밤을 새우면 이틀 쉬도록 강제집행을 당한다.

얼마 전에는 대낮에 잠들었다가 이상한 낭패를 보았다. 자다가 암 보험에 가입한 일이다. 정확히는 내가 보험계약을 청약한 것으로 처리된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났다. 워낙 비몽사몽이라 영문을 몰랐다. 나중에 1회 보험료로 73,610원이 결제되었다는 문자를 받고서야 그게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변명부터 시작해보자. 잠을 못 자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저전력 모드가 된다. 4~5시간 이하로 자면 자극에 반응하는 속도가 느려진다. 아는 것도 기억이 안 난다. 복잡한 판단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시험 전날에 밤새워 공부하는 일은 장점도 단점도 크다. 암기할 내용을 직전에 복습하는 일은 기억을 살리는 데 중요하지만, 충분히 자지 않으면 일시적으로 기억력 자체가 떨어진다. 충동구매, 도박, 폭식도 수면시간과 조금씩 상관관계가 있다. 잠이 부족하면 자기를 통제하는 힘이 약해지는 탓에(‘머리에 힘주기’는 매우 어려운 인지적 활동이다)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장기적인 인지기능 저하, 치매, 고혈압, 당뇨도 수면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자의든 타의든 제대로 자지 않으면 힘겹게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문제는, 문제점을 다 알아도 ‘급전’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그날은 30분씩 4번 정도 잤던 상태였다. 정말 급했다. 편집자님으로부터 내가 아침까지 원고를 보내야 때맞춰 종이를 발주한다고, 진짜 꼭 보내줘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지? 그래도 카페인을 비롯한 여러 화학물질 덕분에 치명적으로 죄송해지진 않을 수 있었다. 대신 피로와 각성 상태가 뒤섞여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다. 마침 병원에서 처방받은 수면제가 있었다. 먹으면 바로 잠들어서 개운하게 깨는 약이다. 다만 잠결에 이상한 행동을 하고도 기억하지 못할 수가 있다. 의사 선생님은 그러니까 약을 먹을 때는 핸드폰을 멀리 두라고 했다.

여러분은 의사의 조언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는 어느 순간 ‘네, 네’ 하면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앞은 기억이 안 난다. 상대방은 말이 엄청 빠르고 많았고… 밝고 큰 목소리에… 중간중간 잘 듣고 있는지 확인도 하시고… 나는 정신이 깜빡거리는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멀쩡한 척했다. 잠시 말이 끊기거나(상대방이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순간) 재촉을 받으면 ‘네’ 했다. 자다가 전화를 받으면 멀쩡한 척하는 게 평소 버릇이라 그랬다. 많이들 그런 경험 있지 않을까? 갑자기 업무 전화를 받아서 마치 안 자고 있었던 척, 빠릿빠릿한 척 대답하다가 잠에서 깨는 경험. 차이가 있다면 나는 끝까지 제대로 깨지 못했다는 점이다. 차라리 ‘졸려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끊었어야 했는데… 너무나 유창한 설명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계속 이어졌다….

정신적으로 허우적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던 나는 마침내 적당한 질문을 찾았다. “이거 뭐 가입하는 거 아니죠?” 상대방은 재빨리 다른 설명을 해주셨다. 그런 거 아니라고, 어차피 심사 과정이 있어서 바로 가입되진 않는다고, 그저 자료를 보내주기 위한 절차니까 동의하시면 된다고 했다. 좀 틀린 설명이다. 하지만 나는 어쨌거나 아니라는 말만 알아듣고 다른 모든 걸 잊었다. 빨리 통화를 끝내고 다시 자고 싶었다. 이미 거듭해서 쌓인 ‘네’를 ‘아니오’로 바꾸기가 번거로웠다. 그랬다간 다시 유창한 설명을… 무한히… 들어야 할 테니까.

이 이야기에 교훈이 있다면, 의사의 조언을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잠은 제때 자야 한다는 점이다. 애초에 밤을 새우지 않았다면 무리해서 잠들 일도 없었다. 보험료는 7만원이었지만(결국 철회하고 환급받았다) 병원비는 얼마가 될지 모른다(이건 철회될 리가 없다). 낮은 수면등급과 체력등급이 합쳐지면 만성피로가 찾아온다. 자도 자도 피곤하고 오히려 많이 자서 더욱 피곤하다. 많은 수면시간도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규칙적인 생활과 적정한 수면시간을 지켜야 몸과 머리가 멀쩡하게 유지된다고 한다. 하염없이 누워 있고 싶은 나로서는 믿기 어려운 말이다. 차라리 아예 안 자도 되면 좋지 않을까? 가끔 미식을 즐기듯, 원할 때 취미로 잠들면 어떨까?

잠이 필요 없다면 가용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여유롭게 지낼 수 있다. 그만큼 천천히 일하고, 남들에게 죄송해지지도 않고, 미뤄둔 책도 읽고, 사놨던 게임도 하고…. 물론 모든 사람이 잠을 안 자면 이 미친 한국 사회는 사람을 더욱 힘들게 몰아붙일 테니 그건 안 된다. 가뜩이나 저녁이 없는 세상인데 밤까지 잃을 수는 없다. 가능하면 특정한 사람만 불면인이 되면 좋겠다. 누구? 일단 나. 그리고 나보다 힘든 사람. 회복이 필요한데 충분히 수면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 잠들지 않는 만큼 나아질 수 있는 사람. 생각해보면 제한 조건도 필요하다. 불면을 악용하지 않을 사람이어야 한다. 그 시간을 나쁜 짓에 쓰지 않는 사람. 자기가 안 잔다고 해서 남을 괴롭히지 않을 사람.

나는 이미 그런 불면인을 안다. 낸시 크레스가 쓴 『허공에서 춤추다』에 실린, '스페인의 거지들'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나는 이 소설을 알기 때문에 불면인을 자꾸 특정한 방향으로 상상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그만큼 사려 깊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작중 불면인들은 이타적 행동과 사회적 책임을 자신의 몫으로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들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잠들지 않는 몸으로 태어난다. 안 자도 되는 만큼 어린 시절부터 평범한 ‘수면인’보다 뛰어난 성취를 보인다. 더군다나 유전적으로 건강하고 똑똑하며, 사실은 늙지도 않는다. 대다수 사람은 불면인에게 위화감과 질투와 혐오를 느낀다. 불면인을 괴물이라 부르며 죽이려 들기도 한다. 제목인 ‘스페인의 거지들’은 이런 질문으로 나온다.

“스페인의 골목에서 1달러씩 달라고 하는 거지를 100명 만난다면 어떻게 할래? 네가 싫다고 하면, 너와 거래할 생산물도 없는 주제에 네가 가진 것에 격노하며, 질투와 절망감에 사로잡혀 널 쓰러뜨리고 두들겨 팰 거지들에게 둘러싸인다면? (…) 어째서 법을 준수하는 생산적인 인간이 별로 생산적이지도 않고 준법정신도 없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해야 할까?”

능력을 발휘하는 일은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일과 겹쳐 있다. 여러 불면인이 ‘내가 왜?’라고 물으면서도 공동체를 위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여러 수면인이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가 없이 불면인을 돕는다. 소설은 탐욕보다는 책임을 비춘다. 거대한 연결망의 일부로 존재하는 개인 간의 보이지 않는 순환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는 소설을 읽은 후로 잠과 시간, 특별함과 책임을 묶어서 생각한다. 불면인이 되어보진 않았지만 거기서 파생되는 가능성을 본다. 만약 불면으로 남들보다 시간이 많아진다면, 나는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타인을 생각하며 사용할 수 있을까? 나 혼자만의 성취 이상을 생각하게 될까?

자신 있게 답하진 못하겠지만 질문은 품고 있다. 당장 먹고사는 데는 필요 없는 질문이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일이나 열심히 하는 쪽이 경제적으로 유리하다. 그런데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좋아해서 SF를 말하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딴생각이 본업을 집어삼킨 셈이다. 나는 일어나지 않을 일을 질문하는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나의 일에는 SF에 나오는 질문을 찾아서 독자에게 전달하는 작업이 포함된다. 몽상을 현실로 침투시키는 일이다. 배명훈의 『미래과거시제』 에 수록된 '알람이 울리면'에 나오는 것처럼.

작중에는 동면 중인 사람의 의식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기계가 등장한다. 자는 동안 현실 같은 이야기를 체험하게 해주는 ‘스토리 생성기’다. 여기에는 ‘스토리 생성자’가 두 가지 들어있다. 사실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장치와 비현실적인 전개, 곧 SF를 형성하는 장치다. SF 스토리 생성자는 비현실을 통해 잠든 사람이 질문을 품도록 만든다. 그렇게 의식을 살짝 ‘깨어 있게’ 한다. SF가 없으면 의식이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생생한 세계에 잠겨 “안전한 일상에 장기간 안주”하려 드는 문제가 생긴다. 동면을 끝낼 때가 와도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SF는 바깥 세계에서 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도 한다. 잠든 사람은 완전히 깨어나지 않고도 SF적 전개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현실 바깥의 모습을 감지한다. SF와 리얼함의 ‘듀얼 플롯’이 의식을 가장 안전하고 건강하게 유지시킨다. 수면과 각성을 적절히 반복해야 건강해지는 것과도 유사하다. 이 소설은 ‘만약 우리 현실이 가상이라면?’에 대한 아주 세련된 대답이다. 딴생각을 거듭하는 나에게 위안을 주는 글이기도 하다. 비록 하루하루 급급하더라도 잠깐 멈춰서 비현실을 생각하고 있어도 괜찮다고, 오히려 멈춤이 나를 건강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고, 그런 안도가 생긴다.

고백하자면 나는 오늘도 체력을 당겨쓰는 중이다. 밤을 새워서 망했다는 이야기를 쓰느라 밤을 새웠다. 이러쿵저러쿵해도 역시 가능하면 불면인이 되고 싶다. 불가능하다면 불면인이 되는 꿈이라도 꾸려고 한다. 좋은 꿈은 도피가 아니라 회복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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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심완선

SF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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