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책 > 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시인의 사려 깊은 시선을 통해, 환한 사랑의 세계를 만나 보세요. |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아모스 오즈, 『나의 미카엘』, 민음사)
어떤 소설은 첫 문단이 모든 걸 말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사랑하는 힘”의 죽음을 견딜 수 없을 때. 사랑의 죽음이 삶의 죽음임을 느낄 때, “이 글을 쓰는” 절박함을 느낄 수 있다. 자꾸만 싸늘해져 가는 가슴을 보며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마음.
학교에서 강사로 일하다 보니 가끔 상담을 청하는 학생들이 있다. 마치 아모스 오즈의 저 문장처럼 지쳐버린 얼굴. 그런 학생들을 마주할 때마다 엄청난 양의 우박을 함께 맞는 기분이 든다. 비탈길을 기어가는 마음. 글을 쓰고 싶은 마음. 글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마음. 죽고 싶은 마음. 그러다 행주처럼 가슴을 짜내 살고 싶다고 나직하게 말하는 입술. 내가 가진 것은 고작해야 시에 대한 사랑뿐인데, 그 우산으로는 우박을 막을 수 없는데. 학생들이 선생님-하고 불러주니까. 나의 선생님도 그렇게 나를 지켰으니까. 나는 종이우산을 머리 위로 힘껏 펼친다. 오늘은 너를 위해 마음을 다해 두 편의 시를 읽을게.
우리가 절망의 아교로 밤하늘에 붙인 별
그래, 죽은 아이들 얼굴
우수수 떨어졌다
어머니의 심장에, 단 하나의 검은 섬에
그러니까 시는
제법 볼륨이 있는 분노, 그게 나다! 수백 겹의 종이 호랑이가
레몬 한 조각에 젖는다
성냥개비들, 불꽃 한 점에 날뛴다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시는
여기 있다
유리 빌딩 그림자와
노란 타워크레인에서 추락하는 그림자 사이에
도서관에 놓인 시들어가는 스킨답서스 잎들
읽다가 덮은 책들 사이에
빛나는 기요틴처럼 닫힌 면접장 문틈에
잘려 나간 그림자에 뒤덮여서
돋아나는 버섯의 부드러운 얼굴
그러니까 시는
돌들의 동그란 무릎,
죽어가는 사람 옆에 고요히 모여 앉은
- 진은영, 「그러니까 시는」,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중에서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겸허해진다. 등불 켜듯 진실된 마음 하나만 쥐고 한 행 한 행 최선을 다해 읽고 싶다. “그래, 죽은 아이들 얼굴”. 여기를 읽을 때, 자세부터 고쳐 앉게 된다. 이 시는 우리의 파국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화자의 말처럼 시는 “절망의 아교로 밤하늘에 붙인 별”. 실제로 우리는 그런 현실을 마주했었고, 그때 우리는 ‘가만히 있었다.’ 그때 우리는 (마치 1연처럼) 어떤 말도 끝맺지 못한 채, 절망 속에서 발을 구르며 기다리고만 있었다. 우리는 말과 시가 얼마나 빈약한지 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계속해서 어떤 답들을 시도하는 것. 이를테면 시는 “제법 볼륨이 있는 분노”로, “수백 겹의 종이 호랑이”처럼 소리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포효는 지면(紙面) 밖으로 들리지 않는다. 시는 고작해야 “레몬 한 조각”에 젖어버리고 “성냥개비” 하나에 전소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시를 읽다 보면 배 속이 따듯해진다. 이 시를 읽으면 용기가 생긴다. 특히 화자가 “시여 네가 좋다”라고 고백할 때, 그러니까 시는, 이 모든 처참을 겪고도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구석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어서 화자는 시가 있는 장소를 보여준다. “유리 빌딩 그림자”와 노동자가 거꾸러지는 현실, “시들어가는” 식물의 잎과 닫힌 지식(“덮은 책”), 그리고 사람을 재단하듯 잘라내는 면접장의 문틈. 이 모든 슬픔과 죽음의 장소에 시가 있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음지에서 “돋아나는 버섯”처럼 시가 있다고. 그러니까 시는 “죽어가는 사람 옆에 고요히 모여 앉은” 무릎. 이 모든 최선들. 사랑의 언어들. 어떻게든 곁을 지키려는 안간힘. 실제로 시인이 한 강의에서 이렇게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시가 왜 이렇게 슬프냐고, 시인들은 왜 이런 거만 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시가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시가 슬픔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무엇이 그것을 하나요.”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중략)
신문의 제 1면보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을 더 좋아한다.
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좋아한다.
내 눈이 짙은 색이므로 밝은 색 눈동자를 더 좋아한다.
책상서랍들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마찬가지로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보다 더 좋아한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선택의 가능성」, 『끝과 시작』 중에서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이 시를 꼭 읽어주고 싶다. 통상적으로 ‘비교’는 우열을 만들고 대상 사이의 위계를 빚는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집, 재산, 외모, 환경, 능력과 성격. 하지만 이런 비교와 경쟁으로 인해 우리는 점점 심하게 망가져 가는 것 같다. 마치 경마장을 달리는 말들이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투계장에서 싸우는 닭들이 아픈 것처럼. 우리는 비교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참으로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비교를 시도한다.
그러니까 ‘사랑의 비교’라고 해볼까. 좋음만을 더해가는 증식의 비교. 이 시에서 쓰이고 있는 비교문은 차등을 생산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애호를 드러내는 데에 쓰이고 있다. “영화를”, “고양이를”,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그러니까 “더 좋아”함을 발산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비교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혹은 비교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열등한 쪽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버리고 있다(“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그래서 이 시를 읽다 보면 행복감이 움튼다. “예외적인 것들”이 쏟아지는 기쁨.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하는 일은 그 어떤 차등도 없이 그 자체로 아름답다. 우리는 이렇게 시를 통해 우리를 구속해 왔던 온갖 개념의 목줄을 풀어버린다.
우리 그냥, 하루는 이렇게 살면 안 될까. 지친 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사랑이 식은 너의 손을 꼭 잡은 채로 기도하듯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시를 쓰다 마음이 꺾일 땐 이런 구절을 들여다보며 가슴을 쥔다. 그래 까짓것 못나면 어때. 망가지면 어때.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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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과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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