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먼저 오고 늦게 알고 피게 되는 것

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1편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읽지 않고 보기만 해도 의미가 되는 것' 그런 것들은 대체로 '사랑의 대상'인 경우가 많다. 연인의 얼굴이나 친한 길고양이의 엉덩이 같은 것. 그런 것은 읽지 않아도 의미를 준다. 시도 그렇다. (2023.06.12)


고명재 시인이 매달 마음 깊이 사랑하는 시를 전합니다.
시인의 사려 깊은 시선을 통해, 환한 사랑의 세계를 만나 보세요.


언스플래쉬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_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중에서


참 이상한 말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그런 날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니. 이 푸름은 신록의 푸름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을 뜻하는 걸까. 게다가 "그리워 하자"라니. 청유형이라니. 왜 맑고 푸른 날, 그리움의 최대치를 말하는 걸까. 그 어떤 인과도 과감히 뛰어넘는다. 그 어떤 이유도 바탕도 설명하지 않는다. 모른 채로 우리는 납득부터 한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럴 수밖에.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수밖에.

때때로 마음이 텅 비어버려서 가슴팍에 구멍이 뚫릴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아주 멀쩡히, 성실하게 잘 살아가는 자신을 보거나. 타인을 위해 온갖 위로의 말을 건네고 집에 와서 훌쩍이며 코를 닦거나. 그런 날엔 괜히 시집을 펼쳐서 본다. 읽지 않아도 우선, 눈으로 본다. 보고 있으면 가슴에 오는 게 있다. 그 '먼저 오는 것'에 시의 심장이 있다.

'읽지 않고 보기만 해도 의미가 되는 것' 그런 것들은 대체로 '사랑의 대상'인 경우가 많다. 연인의 얼굴이나 친한 길고양이의 엉덩이 같은 것. 그런 것은 읽지 않아도 의미를 준다. 시도 그렇다. 이를테면 바람처럼 부는 것. 시는 어쩌면 밥이고 봄이고 적설량이다.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보르헤스의 이 말을 들려주고는 한다.


"'주장은 아무도 납득시키지 못한다.' 

월트 휘트먼도 주장은 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주장이 아니라 밤공기에 의해서, 바람에 의해서, 

별을 바라보는 것에 의해서 납득하게 되는 것이겠죠."

_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윌리스 반스톤, 서창렬 옮김

『보르헤스의 말』마음산책, 2015, 304~305쪽


그러니까 시는, '이해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어떤 힘으로 우리에게 작용부터 한다. 불어오는 바람에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씻겨준다는 행복감을 우리는 충분히 느낀다.


저 파란 하늘 속 물결 소리 들리는 곳에

뭔가 엄청난 물건을

내가 빠뜨리고 온 것 같다


투명한 과거의 전철역

유실물센터 앞에서

나는 더욱 슬펐다

_다니카와 슌타로, 요시카와 나기 옮김, 『사과에 대한 고집』, 「슬픔」 전문, 비채, 2015


단 한 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채, 이것이 내 안에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시는 그런 이상한 작용이 아닐까. 도착부터 하고 이제 시작되는 것. 슌타로의 시는 바로 그렇게 곧장 '어떤 슬픔'부터 우리에게 준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속수무책이었다. 멍하니 책에서 눈을 떼고 하늘을 봤다. 하늘이니 물결 소리니 엄청난 물건이니... 무엇 하나 제대로 이해 못한 채, 이 시 속에 귀하고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파란 하늘'을 보면 정말 그런 게 온다. 숙명이랄까. 텅 빈 슬픔이라고 할까. 정돈될 수 없는 어떤 슬픔이 있어서, 거기에는 잃은 것과 앞으로 잃을 것, 그리고 그걸 견뎌야만 하는 '내가' 함께 있다. '투명한 과거의 전철역', 그것도 '유실물센터 앞'에서 황망하게 서 있는 사람의 마음. 우리는 시를 보고 뒤늦게 깨닫는다. 이런 마음이 내게도 이미 있었구나. 그렇게 '뭔가 엄청난' 걸 잃어버리고도, 그런 줄도 모른 채 나는 살아왔구나. 하지만 이렇게 시를 읽고도 나는 여전히 이 시의 각 행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이해하지 않고 그저 사랑할 뿐)


"아빠, 나 왔어!" 

봉안당에 들어설 때면 최대한 명랑하게 인사한다. 그날 밤 꿈에 아빠가 나왔다. 

"은아, 오늘은 아빠가 왔다." 

최대한이 터질 때 비어져 나오는 것이 있었다. 가마득한 그날을 향해 전속력으로 범람하는 명랑.

_오은, 『없음의 대명사』, 「그곳」 전문, 문학과 지성사, 2023


그러니까 시는 우선 주어지는 것. 목숨처럼, 가족처럼, 영혼과 신체처럼, 주어지고 함께 길을 찾아가는 것. 함께 사는 것. 함께 잃는 것. 함께 겪는 것. 언어를 통해 마음의 물길에 합류하는 것. 그제 오후엔 오은의 시집 『없음의 대명사』를 펼치다가 이 시를 읽고 바로 덮어버렸다. 시집의 첫 시인데 목소리가 너무 또렷하게 살아있어서 그걸 읽는 순간 대충 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시를 서른 번쯤 거듭 읽었다. 이 시 속엔 아주 묘한 구절들이 있다. 이를테면 "최대한이 터질 때 비어져 나오는 것"이라는 말은,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어떤 진실을 느낀다. 그러니까 이 말들이, 어떤 사람이 전부를 걸고 말하는 최선이란 것. "가마득한 그날"이 언제인지. "전속력으로 범람하는 명랑"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알아차린다. 사랑과 시는 모른 채로 해내는 일이다.

'파악(把握)'이란 말은 손으로 꽉 쥔다는 뜻이다. 내 손에 대상을 꽉 움켜쥐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시의 이해'는 그런 게 아니다. 손을 풀고 펼쳐야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세수를 하려면 주먹을 풀어야 한다. 연인에 대해 이론적으로 잘 알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음악과 마음은 쥘 수 없는 것. 파악하지 않은 채로 마주하는 것. 그러니까 시는 우선 도착하는 것. 도착한 후 늦게 절로 펼쳐지는 꽃. 

시차를 가지고 피어나는 꽃들을 본다. '제주에는 벌써 꽃이 시작했습니다.' 이런 말을 뉴스에서 들을 때가 있다. 이미 왔네. 이미 펼쳐지고 있구나. 그리고 그 말이 향기로 색채로 몸을 물들여, 머리까지 닿을 거라는 예감 속에서 우리는 시집을 펼치고 자리에 앉는다. 그러면 꼭 다시 피는 말들이 있다. 오늘은 "오늘은 아빠가 왔다"라는 말이 다시 보였다. 결코 우리만 남겨지거나 버려진 채로 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전속력으로 범람하는" 그런 마음은 "은"과 "아빠" 둘 다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는 '최상급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대한'과 '전속력'이라는 어떤 안간힘. 이 시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최선을 다한다.



보르헤스의 말
보르헤스의 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윌리스 반스톤 공저 | 서창렬 역
마음산책
없음의 대명사
없음의 대명사
오은 저
문학과지성사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고명재(시인)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과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출간했다.

ebook
보르헤스의 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윌리스 반스톤> 공저/<서창렬> 역11,700원(0% + 5%)

눈먼 보르헤스에게 말은 유일한 소통 방식 말하기는 글쓰기 못지않게 내밀한 언어 형식 1980년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여든의 나이로 대담을 위해 뉴욕, 시카고, 보스턴을 여행했다.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군중이라는 것은 환상이에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여러분에게 개인..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수학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는 엄마표 유아수학 공부

국내 최대 유아수학 커뮤니티 '달콤수학 프로젝트'를 이끄는 꿀쌤의 첫 책! '보고 만지는 경험'과 '엄마의 발문'을 통해 체계적인 유아수학 로드맵을 제시한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수학 활동을 따라하다보면 어느새 우리 아이도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랄 것이다.

나를 바꾸는 사소함의 힘

멈추면 뒤처질 것 같고 열심히 살아도 제자리인 시대. 불안과 번아웃이 일상인 이들에게 사소한 습관으로 회복하는 21가지 방법을 담았다. 100미터 구간을 2-3분 이내로 걷는 마이크로 산책부터 하루 한 장 필사, 독서 등 간단한 습관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내 모습을 느끼시길.

지금이 바로, 경제 교육 골든타임

80만 독자들이 선택한 『돈의 속성』이 어린이들을 위한 경제 금융 동화로 돌아왔다. 돈의 기본적인 ‘쓰임’과 ‘역할’부터 책상 서랍 정리하기, 용돈 기입장 쓰기까지, 어린이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로 자연스럽게 올바른 경제관념을 키울 수 있다.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야

저마다 삶의 궤적이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은 비슷한 생애 주기를 거친다. 미숙한 유아동기와 질풍노동의 청년기를 거쳐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하고 늙어간다. 이를 관장하는 건 호르몬. 이 책은 시기별 중요한 호르몬을 설명하고 비만과 우울, 노화에 맞서는 법도 함께 공개한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