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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사랑, 나선형으로 말하기
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3편
‘사랑한다’라는 말이 가진 힘을 자주 느낀다. 물끄러미 어떤 이를 바라보다가 ‘그나저나 저요. 많이 사랑하는 거 아시죠.’라고 말만 해도 그 사람의 존재가 뒤척이는 걸 볼 수가 있다.
고명재 시인이 매달 마음 깊이 사랑하는 시를 전합니다. 시인의 사려 깊은 시선을 통해, 환한 사랑의 세계를 만나 보세요. |
‘사랑한다’라는 말이 가진 힘을 자주 느낀다. 물끄러미 어떤 이를 바라보다가 ‘그나저나 저요. 많이 사랑하는 거 아시죠.’라고 말만 해도 그 사람의 존재가 뒤척이는 걸 볼 수가 있다. (물론 대다수는 오글거려서 그런 거지만…) 그때 그 사람은 참기름 같다. 그때 그는 물결이고 박하잎이다. 그렇게 이 말은 존재를 변화시킨다. 이 말을 하는 입속에도 꽃이 핀다.
동시에 ‘사랑한다’는 말의 얄팍함을 자주 느낀다. 이 말은 흔하고 텅 빈 말이다. 더 특별하게 당신을 말하고 싶은데, 더 정확하게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주어진 언어는 얕고 진실은 복잡하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내 사랑의 개별성과 특수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라는 말은 ‘가장 능동적인 언표 행위’인 동시에 ‘가장 수동적인 표현의 반복’이다. 아주 생생하게 마음을 드러내는 생성인 동시에, 아주 허망하게 미끄러지는 표현의 죽음. 어쩌면 이 양태 자체가 우리의 숙명인 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는(생성) 동시에 죽어가고(사멸) 있다. 이것은 마치 모래성 쌓기와 같다. 우리의 말은 언제나 ‘모자란 발화’이며 따라서 우리는 ‘반복’을 통해 간신히 표현적 결핍을 뛰어넘는다.
너를 사랑한다. 어느 할아버지가 딸에게 말했다. 딸은 수십 년에 걸쳐 그 말을 소년에게 해준다. 사랑해 사랑해. 소년은 흠뻑 늙어서 아주 작은 손녀에게 이 말을 한다. 땀 때문에 머리칼이 젖은 소녀가 어른을 올려다보며 활짝 웃는다. 유한한 우리의 ‘겁 없는 반복’. 이것은 마치, 사찰 앞에 쌓아둔 돌탑과 같다. 무너져 내릴 줄 알고도 말해내는 것. 이것은 기도문이고 계절이며 파도고 푸가다. 이것은 불경이고 별자리고 낮과 밤이다. 언어는 그렇게 반복 속에서 꽃을 피운다. 문학은 그 윤회 속의 조그마한 무궁화. 꽃 하나를 간신히 피우기 위해서 시인들은 저마다의 ‘나선형 곡선’을 오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 것이나 생각한 것을 말할 수 없어서 괴로워한다. 이 말은 곧, 나선형 곡선을 말로 정의 내리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학이 없다면 손짓으로, 빙빙 돌며 끝없이 위로 올라가는 어떤 형태를 허공에 그려 보임으로써 용수철의 회전을 하나하나 형태로 나타내야 한다. 하지만 말한다는 것이 새롭게 한다는 의미임을 우리가 안다면, 나선형 곡선을 정의하기는 훨씬 쉬워진다. 그것은 위를 향해 올라가는 모양의, 영원히 닫히지 않는 하나의 원이다. (...) 나는 언젠가 한 아이가, 울고 싶다고 말하려는 것을 들었다. 그 아이는 어른들의 화법처럼 ‘울고 싶어요.’하지 않았다. 그건 바보들이나 하는 말이란다. 대신 아이는 ‘눈물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 페르난두 페소아, 배수아 옮김,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220쪽
마치 꽃나무가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저마다 다른 형태로 (나선형의) 꽃봉오리를 키우듯 시인은 언어의 무수한 반복 속에서 다른 언어를 피우려고 안간힘 쓴다. 그래서 페소아는 ‘말한다는 것이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저마다의 언어’를 피워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발화發話를 발화發花로 읽으면 어떨까.) 어느 아이가 나는 ‘눈물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할 때 그 아이는 새로운 형태의 슬픔을 피운 것이다. 문학의 언어가 일상어보다 조금 더 까다롭거나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인들은 나선형으로 사랑을 말한다. ‘좋아해요’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는 ‘당신 걸을 때마다 뒤꿈치에서 호박꽃이 펴요’라고, 조금은 둘러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선형 곡선’이라는 이 난감한 ‘우회로’는 비록 더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일이지만, 나의 삶과 사랑의 특수성을 껴안아 보려는 눈부신 노력의 길인 것이다.
큰물 지고
내천에 젖이 불면
간질간질 이빨 가는
어린 조약돌 몇 개 씻어
주머니에 넣고 가지요
상냥하게 종알거리고 싶어
나는 자꾸만 물새 알처럼 동그래지고
그 어깨의 곡선을
이기지 못하겠어요, 라고
쓰고 싶은
- 신미나, 「첫사랑」 전문, 『싱고, 라고 불렀다』, 창비, 2014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강렬한 것이지만, 그 특수성을 제대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떤 시인은 기나긴 우회로(나선형의 곡선)를 거쳐서 기어코 이 일을 해내고 만다. 내 안에 큰 변화가 일어났구나. 무언가가 분명 무너졌구나. 첫사랑을 자각할 땐 그런 식이다. 그러니 “큰물 지고” “내천”의 수위도 높아졌겠지. 이 가득 찬 상태의 배경은 나를 둘러싼 환경이기도 하면서 첫사랑을 자각한 이후의 내면적 풍경이기도 하다. 그런데 화자는 이 커다란 물을 보면서 “간질간질 이빨 가는” “어린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기만 한다. 물론 말하고 싶지. 좋아하는 것 같다고 꺼내고 싶지. 그러나 스스로도 확신 못한 채, 그저 “상냥하게 종알거리고 싶”은 때가 있지. 이런 들끓는 침묵이 바로 첫사랑이지. 그래서 이 시는 자세히 보면 (갓 태어날 것만 같은) “물새 알처럼” 동그란 형상을 그리고 있다. 즉 모든 것이 알처럼 둥글게 중심을 지키는, 그런 형태로 끝없이 그려진 것이다. 물론 박력 있는 사람이라면 이 알을 깨고서 겁 없이 사랑을 고백하겠지만, 이건 “첫사랑”이다. “몇 개 씻어” 고작 “주머니에 넣”기만 해도 “간질간질”거리는 난감한 마음. 이 사랑을 나라면 어떻게 고백해낼까. 놀랍게도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어깨의 곡선을
이기지 못하겠어요
나는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좋아해요’라는 말이나 ‘사랑하게 되었어요’라는 표현을, 한 뼘 더 정확하게 드러내는 말. 이 표현을 읽는 순간, 나는 나의 첫사랑까지 이 표현으로 이해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맞아. 사랑한다는 건 그런 일이지. 누군가의 어깨와 그 어깨로부터 떨어지는 곡선을 견딜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훔쳐보며 혼자 무너지는 조용한 일이지. 매번 어깨에서 ‘물새 알’을 보는 일이지. 이 시가 더 아름답게 필화筆花를 맺는 부분은 바로 시의 끝부분이다. 이 화자는 이 말조차 입으로 내뱉지 못하고 그저 “쓰고 싶”다고 소망만을 비추고 있다. 결국 모든 발화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소망(싶은)’에 그치고만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는 종결어미(-다/-ㄴ다)로 끝맺지 않는다. 문장은 그저 ‘-싶은’이라는 말로 끝난다. 그렇게 몸살 앓듯 우리는 아플 것이다. 끝맺지 못한 채로 흐를 것이다. 그렇게 매번 매해 다시 새로이 피면서 그 순정한 한때만큼은 잃지 않을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유대인이었다. 그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오틀라, 유대인이었다. 오틀라는 법학자와 결혼했는데, 이름은 요제프 다비드, 유대인이 아니었다. 1942년에 보헤미아-모라비아에 뉘른베르크법*이 도입됐을 때, 말수 적은 오틀라는 요제프 다비드에게 이혼을 제안했다. 그는 처음에는 거부했다. 그녀는 잠의 형상들과 재산과 두 딸과 합리적 접근 방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1943년 10월에 그녀가 죽게 될 곳인 아우슈비츠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아직 그 단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정돈한 후 그녀는 배낭을 쌌고, 요제프 다비드는 그녀의 구두를 잘 닦아주었다. 그는 기름을 한 겹 발랐다. 이제 이 구두는 방수 구두야, 그가 말했다.
- 앤 카슨, 「방수처리에 대한 짧은 이야기 」 전문, 황유원 옮김, 『짧은 이야기들』, 난다, 2021
카프카가 유대인인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여동생, 오틀라가 유대인인 것도 자명하다. 그러나 시인은 이 사실을 기어코 시에다 쓴다. 누군가가 카프카나 오틀라 혹은 다비드와 같이 그 자신의 ‘이름(특수성을 지닌 생명)’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혹은 ‘비유대인’으로 분류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폭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인은 이 사실(“유대인이었다”)을 기어코 명시하면서 그들의 이름 역시 기록한다. 그렇게라도 파괴 속에서 사랑을 해냈던 개개인의 몸짓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서사 자체가 사랑을 증명해낸다. 이 시는 기나긴 나선형의 우회로를 통해 ‘사랑의 순간’을 보여준다. 사랑의 핵심적인 특성 중 하나는 ‘나의 안위’에 앞서 ‘당신의 평온’이 언제나 더 귀하게 느껴진다는 점인데, 이 시 속의 두 사람은 모두 그러한 선택을 기어코 하고자 한다. 한 사람은 이혼이라는 결별을 통해, 한 사람은 구두를 닦는 행위를 통해.
뉘른베르크법이 시작되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을 때, 오틀라는 남편 “다비드에게 이혼을 제안했다”. 거부하는 남편에게 아주 합리적인 이유(아이들의 미래)를 강조하며 자신의 안위 보다 당신의 평온을 이루어내려 한다. 그리고 시인은 아우슈비츠로 가게 되는 그녀의 미래를 먼저 보여준다. 그렇다. 그녀는 조만간 사라질 것이며 그 사실은 결단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이 반드시 드러내고자 하는 건 허무가 아니라 그 허무와 파괴 속에서도 생생하게 존재했던 ‘사랑의 행위’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은 아주 담담하게 “그녀의 구두를 잘 닦아주”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바로 여기에 두 사람의 ‘현재’가 있다.
마지막 배웅을 마치고 이제 떠나려는 사랑. 여기서 “기름을 한 겹” 더 바르는 마음은 뭘까. 조만간 폭우처럼 엄청난 폭력이 쏟아질 텐데. 고작해야 구두에 기름을 칠해주다니. 그러나 우리는 이 여린 보호막이 무력함에도 진실된 방패임을 느낄 수 있다. “이제 이 구두는 방수 구두야”라고 말하는 입술. 그렇게라도 (눈)물로부터 당신을 지키고 싶었다. 사랑은 혹여 당신의 엄지발가락이 젖을까 미리 앞서 쓸데없이 염려하는 것. 물론 그는 미래를 바로 보지 못했다. 그가 염려해야 할 것은 비나 웅덩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시는 그토록 자잘한 세부에의 사랑이, 진실로 한 인간을 밝혔다는 것을 증명해낸다. “방수처리”된 구두에 비친 얼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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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과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