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호 특집] 이유리 “야만적인 세상에서, 앨리시어에게”
상상의 우주를 열어준 작가의 책: 『야만적인 앨리스씨』
앨리시어, 나는 너를 대학생 때 처음 만났다. 세상은 그때도 미쳐 있었고 지금은 더 미쳐 있다.
채널예스 100호를 맞이해, 커버를 장식했던 17인의 작가에게 상상의 우주를 열어준 책을 물었습니다. |
앨리시어, 너는 아직도 부푼 개 시체가 있는 논둑에 서 있나.
여름내 울던 매미가 가벼워져 떨어지는 소리를 듣나.
비둘기색 스타킹을 신고 버스정류장에 서서 타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나.
복숭아술이 유명한 마을의 축제에서 밧줄을 잡아당기고 있나.
유리창에 던질 돌을 손아귀에 모으고 있나.
씨발됨이 씨발되는 것을 보나.
나는 본다.
너의 눈으로.
너는 어디까지 왔나.
이 세상의 씨발 됨에 대해 말해보려고 했는데 여간해서 이야기가 끝이 나지 않는다.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사람이 죽었다. 백주 대낮에 출근하다 공원에서 죽었고 애인이었던 것에게 맞아 죽었고 웬 놈이 이유 없이 휘두르는 칼에 죽었다. 세상은 점점 빼도 박도 못하게 씨발 되어 가는데 누구에게도 이것을 구할 힘이 없다. 그럴 때마다 너는 내게 떠오른다. 오렌지색 탄산에 휩싸여 네가 보았던 폭력의, 자력구제의 맛이. 네가 구하지 못했던 너의 어린 동생이 죽은 방식과 발견된 방식이. 여름이면 약속된 듯 죽임당하던 너의 아버지의 개들이. 이곳은 바닥없는 토끼 굴이고 우리는 오랫동안 그저 떨어지고만 있다, 앨리시어.
앨리시어, 나는 너를 대학생 때 처음 만났다. 세상은 그때도 미쳐 있었고 지금은 더 미쳐 있다. 이 미친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미쳤는지 알게 될 때마다 나는 네가 고미의 아버지를 때리던 모습을 생각한다. 네가 때렸던 최초의 사람은 너의 씨발 된 어머니가 아니라 고미를 때리던 고미의 아버지였지, 그 사실은 내게 많은 것을 그냥 알게 만든다. 이 사실을 알면 너는 머리를 긁적이겠지. 좆 같다고 생각하겠지.
그렇다. 좆 같다.
네가 어둠 속에서 묻는다.
자냐.
너는 어디까지 왔나.
뭔가가 좆 같다고 느껴질 때, 내 안의 어딘가가 씨발 되고 있다고 느껴질 때. 그럴 때 나는 내 등 뒤에 서 있는 너의 냄새를 맡는다. 불쾌한 땀 냄새. 먼지 냄새. 아무렇게나 뭉쳐 내다 버릴 수 있는 것의 냄새. 배꼽을 꾹 누르면 죽어버릴 것 같은 상태가 되어 펼쳐 든 가장 최근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앨리시어. 누군가가 나를 위해 도넛을 한 상자 사 왔다. 초콜릿이 묻은 것, 설탕이 코팅된 것, 땅콩이 뿌려진 것, 모두 내가 좋아하는 맛이었고 성실하고 세심하게 고른 것들이었다. 나는 그것의 맛을 잘 안다. 아주 많이 먹어보았고 나 역시 누군가를 위해 그것들을 사기도 했었다. 그 도넛 회사의 소유주가 가진 빵 공장에서 사람이 두 명째 기계에 끼어 죽었다. 책임자들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았고 그 회사는 올해 3조 원이 넘는 사상 최고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나는 이 사실을 안 이후로 이곳에서 만드는 그 어떤 것도 사거나 먹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도넛을 사 온 사람은 너무나 순수한 얼굴로 왜 먹지 않느냐고, 좋아하는 것을 특별히 사 왔는데 사양치 말고 한 개 집으라고 권했다. 자신도 하나 집어서 맛있게 냠냠 먹으면서. 나는 그때 그것을 먹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안에 딸기잼이 든 것을 하나 집어 움쑥 깨물었다. 그러고서 나도 모르게 맛있다고 중얼거렸다.
야만적이다.
맛있는 도넛을 꾹꾹 씹으면서 아주 잠시 느꼈다 내 뒤에 서 있는 너를.
너는 어디까지 왔나.
나는 오늘 내가 살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원에서 벌어진 강간치사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피해자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기사였다. 그의 직업이 무엇이었고 무엇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어디에서 어떤 일을 당해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그것이 궁금하지 않았는데도 알게 되었다. 그 앎이 좆같아서 토할 것 같았다. 그리고 왜 내가 저 사람이 아니지, 하고 생각했다.
아닐 이유는 없다.
나는 길을 걷다가 배에 칼이 꽂힐 수도 있다. 에어컨 없는 곳에서 일을 하다가 열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날아오는 주먹을 맞을 수도 있다. 버스를 타고 지하차도를 지나가다 익사할 수도 있고 놀러 나간 거리에서 압사당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그냥, 그냥 재수 없게 어디의 어떤 곳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너의 머리 위로 쏟아졌던 절대적인 씨발 됨의 폭력. 그것이 이 세상에 가득하다.
네가 어둠 속에서 묻는다.
자냐.
너는 어디까지 왔나.
연일 폭염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펄펄 그악스럽게 끓어오른다. 세상이 씨발 되고 있다는 증거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나의 소중한 사람과 이야기한다. 우리는 차근차근 망하고 있다고, 이런 세상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죄악이라고, 우리는 둘이서만 행복하게 살자고. 그때 너는 내 앞에 나타난다. 이미 태어난 얼굴로. 멍들고 부은 얼굴로. 너를 보고 나서야 나는 부끄러워진다. 너의 냄새를 맡고서야 너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때로 세상의 씨발 됨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는 사람처럼 말하곤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너를 본다.
앨리시어. 너는 언제까지 거기에 서 있을까.
네가 어둠 속에서 묻는다.
자냐.
갤럭시는 흐른다. 흐르고 있다. 반짝이고 아름답게. 앨리시어 너와 내가 두 개의 점도 되지 않는 갤럭시는 네 말마따나 좆같다. 좆같은 갤럭시 안에서 나는 살아가고 있다. 돈을 벌고 사랑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글도 조금 쓴다. 그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내내 팽창하고 멀어지는 갤럭시 속에서. 때로 나는 이 팽창감을 온몸으로 느낀다. 풍선에 찍은 점이 풍선을 불면 빠른 속도로 넓어지며 흐려지는 것처럼 나는 늘어나고 옅어진다.
앨리시어, 토끼 굴 속에서 영영 떨어져 내리고 있는 앨리시어,
너는 어디까지 왔나.
그런 너를 쫓아, 나는 또 어디까지 가나.
네가 어둠 속에서 묻는다.
자냐.
*이유리 소설가. '능청스러우면서도 낯선 상상력과 활달한 문체가 인상적'이라는 평과 함께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빨간 열매』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브로콜리 펀치』, 『좋은 곳에서 만나요』 등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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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식물과 고양이를 사랑하고 싱그러운 기운이 가득한 소설을 쓴다. 문학 플랫폼 <던전>의 운영진으로 활동했고 『괴담』, 『인어의 걸음마』에 표제작을 수록하는 등 여러 SF 앤솔러지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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