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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 특집] 천선란 “내 뿌리의 이야기”

상상의 우주를 열어준 작가의 책 : 『자기 앞의 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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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이 어서 내 우주로 오길 바라는, 그로 하여금 당신의 우주가 넓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채널예스 100호를 맞이해, 커버를 장식했던 17인의 작가에게 
상상의 우주를 열어준 책을 물었습니다.




나를 잘 아는 독자나, 내 북토크에 두 번 이상 참여한 독자분들이 이 에세이의 첫머리가 또 『자기 앞의 生』으로 시작하면 ‘이 책만 읽나?’라고 생각하시려나. 지겨워하는 독자들도 있지 않을 것이다. 언급해도, 너무 자주 언급해서 말이다. 설파하고 다녀야 하는 숨은 보석도 아니고, 누구나 알고 있고 인정하는 책을 이렇게 끈질기게 말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을까. 하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다. 누군가가 내게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거나 ‘인생 책’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생각도 하기 전에 입 밖으로 새어 나오고 마는 것이다.

우주적 상상력을 키워준 책으로 적합한 선정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에게도 우주를 꿈꾸게 한, SF의 꿈을 꾸게 한 책들이 있다. 테드 창 『숨』이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옥타비아버틀러 『블러드 차일드』, 김보영 『다섯 번째 감각』,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 그러하다. 

처음에는 이 다섯 권의 책을 제일 먼저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이 다섯 권의 책 중 어떤 것이 가장 영향을 주었는지 도무지 선정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 책들은 각기 다른 형태로 나의 가지가 되었다. 내가 맺는 열매들은 이 가지 끝에서 나왔다. 그러니 하나를 뽑기란 매우 어려운 과제였고, 결국 이 중에서 선정하기를 포기한 나는 더 깊숙이, 더 태초로 돌아가고자 했다. 내 우주의 방향을 정해준, 이를테면 내 뿌리인 셈이다. 

소설 쓰기가 마냥 재미있었던 십 대 초반을 지나 후반에 들어갔을 무렵, 나는 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로 편입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쓰는 사람’의 자세로 돌입했다. 내 나름 프로의 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달까. 넓게는 예술이란, 소설이란 무엇인지. 글을 왜 쓰는지. 욕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문학의 이해’라는 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 같다) 따위를 열심히 탐구하며 일반 교과 과정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전문가의 세계’에 발을 들여 정신없던 시기였다. 

조금씩 소설에 가까워진다고 착각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그 대상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광범위하게 모르게 된다는 것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물론 이렇게 거창하게 말할 정도로 깊이 문학을 공부했던 건 또 아니겠다만, 적어도 나는 그때 ‘소설을 왜 써야 하지?’라는 질문에 걸려 넘어졌다.

나는 왜 쓰는가? 

굉장히 막연하고 쓸모없으며, 있어 보이기 위한, 혹은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한 수단으로만 만들어진 문장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하는 행위에 몰두했다가도 어느 한순간 저 질문에 붙잡혀 수면 밖으로 끌려 나오리라. 무시하고 쓰고 싶은데 그러질 못했다. 왜 쓰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에는 좀 이른 나이라 생각하면서도, 뭐 고민에 빠지는 때가 따로 있겠는가. 그때 우연히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生』을 읽은 것이다. 

별 기대 없이 펼쳤으리라. 읽으려 한 이유는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표지가 시선을 끌었던가? 그랬던 것 같지도 않다. 개인의 취향으로 당시 책의 표지가 썩 내 취향은 아니었다. 에밀 아자르라는 작가가 로맹가리와 동명이인이라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정말 우연히, 어느 날 문득 소설이 나에게 짠! 하고 등장했다. 나는 그것을 책과 나의 운명이라 생각한다. 동시에 내가 글을 포기하지 않도록 세상이…… 도와준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나는 책과 영화가 주는 허구의 이야기가 세상에 꼭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누군가는 지어낸 이야기를 보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 하겠으나, 나는 인간이 자기 삶만 사는 것이 비극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인생밖에 살지 못하므로, 우리는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고 완벽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외로워지고 고독해진다. 내 삶을 완전히 이해해 주는 딱 한 사람만 곁에 있어도 삶은 충분히 달라지겠으나, 완전한 이해가 있을 수 있을까? 완전한 이해에 가닿기 위한 노력만이 있다. 그 노력을 올바르게 행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 타인의 삶을 계속 생각하고 간접적으로 느껴보는 것이다. 소설과 영화가 그 기능을 해준다는 걸, 이 책을 읽고 깨달은 것이다.



소설의 시대도, 화자가 처한 상황도 모두 낯선 건 투성인데 한순간 화자의 지인이 되어, 때로는 화자 그 자체가 되어 세상을 본다. 그 생경한 경험을 『자기 앞의 生』을 통해 처음 했고, 책을 읽으며 처음 읽었고, 책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그것이 내 우주가 확장된 첫 경험이었다. 

나는 왜 쓰는가? 그 막연한 질문에 처음으로 대답 같은 답을 내려준 책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책을 쓰고 싶었다. 이런 소재나 분위기가 아니라,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누군가의 우주를 확장해 줄 수 있는 책. 한 사람의 인생에 큰 파동을 주는 책. 그것이 울음이든 웃음이든 해방이든 좌절이든 변주를 주는 책. 이야기를 만남으로써 세상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지게 하는, 살아보지 못한 삶을 상상하게 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어렴풋이라도 느끼게 만드는 그런 책. 말하고 나니 이건 책보다 마법에 가까운 게 아닐까. 아니면 기적이거나. 어쨌거나 중요한 건 내가 책 한 권으로 그런 마법과 기적을 느꼈다는 것이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간단하고 명료한 말이다. 단지 그런 책을 쓰는 방법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직도 모르지만) 그저 그런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글을 쓸 때 캐릭터와 끊임없이 대화한다. 그 캐릭터가 서 있는 세계가 어떤지는 차후의 이야기이고, 그전까지 나는 내가 만든 캐릭터와 나란히 걸으며 수다를 떨고 좁은 방에서 마주 보고 앉아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며 울기도 한다. 인간은 아닐지라도 캐릭터는 그때마다 내게 온전한 하나의 객체로 존재한다.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그들의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 노력이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천 개의 파랑』을 출간한 뒤 독자분들이 해주시는 말을 듣고 있으면, 이따금 길을 잃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보경의 삶을 공감하거나 은혜의 삶을 헤아릴 때, 투데이를 사랑하고 콜리를 그리워할 때 나는 내가 만든 우주에 행성이 생기고 거기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야기들이 길을 잘 가고 있다고, 조금 느릴 수 있고 가끔 헤맬 수 있지만 그래도 차분히 쓰는 이유를 잃지 않고 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누군가의 우주를 확장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니 큰 욕심을 내지 않지만. 정말로. 

오프라인 서점을 가면 이곳에 있는 모든 책이 하나의 우주처럼 보인다. 어떤 책을 펼치던 우주가 펼쳐질 것이다. 물론 그 우주가 나와 잘 맞아야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당신들이 어서 내 우주로 오길 바라는, 그로하여금 당신의 우주가 넓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천선란

소설가.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 2019년 9월 첫 장편소설
『무너진 다리』를 썼고,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에서 『천 개의 파랑』으로 장편소설 부문 대상을 받았다.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이끼숲』, 뱀파이어 로맨스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를 썼다. 모호한 소설을 쓰고 있다.




자기 앞의 생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저 | 용경식 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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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천선란(소설가)

1993년 인천에서 태어나 안양예고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 작가적 상상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늘 고민했지만, 언제나 지구의 마지막을 생각했고 우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꿈꿨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일들을 소설로 옮겨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시간 늘 상상하고, 늘 무언가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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