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력 특집] 인생 만화가 되었습니다
<월간 채널예스> 2023년 8월호
매일 만화를 편집하고 만화 관련 책을 쓰고 만화책을 골라 도서 플랫폼을 채우는 이들에게도 인생 만화는 있다. 왜 인생 만화가 되었는지, 어떤 장면과 대사를 기억하는지. 인생 만화에 대한 짧은 답을 모았다. (2023.08.09)
우리들은 자랐다. 책장을 넘기고 스크롤을 내리며 울고 웃었다. 도망갈 이야기가 있었고 꿈꾸던 이름들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아프리카의 바람을 느끼는, 골목길에 앉아 에베레스트산의 공기를 호흡하는 신기도 키웠다. "선달아, 꺼벙아, 까치야, 백호야, 슬비와 푸르매야, 우리들의 장그래 씨 그리고 새로이야..." 덕분에 추억이 넘쳤다. 덕분에 여전히 즐겁다! 컨테이너 가득 만화책을 쌓아놓은 덕후도, 만화 얘기라면 지칠 줄 모르는 평론가도, 할 말이 있고 연필만 쥘 수 있다면 멈추지 않겠다는 만화 작가도, 인생 만화를 곱씹는 만화 편집자와 마케터도, 그리고 숱한 독자들까지. 우리들의 만화력은 계속 연재 중이다. |
매일 만화를 편집하고 만화 관련 책을 쓰고 만화책을 골라 도서 플랫폼을 채우는 이들에게도 인생 만화는 있다. 왜 인생 만화가 되었는지, 어떤 장면과 대사를 기억하는지. 인생 만화에 대한 짧은 답을 모았다.
소라치 히데아키 글·그림 | 학산문화사
인생이 뭔지도 모르는데 인생 작품을 말해도 되는 걸까... 인생의 정의는 유수의 철학자들도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 사흘 안에 인생 만화에 대한 글을 써야 하고, 그사이 내가 인생을 알게 될 것 같진 않으니 선행 단계는 건너뛴 채 고민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은혼』의 '야규편'을 두고 깊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곤도는 흠모하던 타에가 강제 결혼을 하게 되자, 그를 납치해 간 야규 가문에 쳐들어간다. 검술 명문가인 야규가는 상대의 몸에 부착된 작은 접시를 깨는 술래잡기를 제안한다. 하지만 불현듯 찾아온 생리 현상에 곤도와 야규가의 리더는 게임 도중 동시에 화장실에 들르는데 뒤처리를 할 휴지가 없다. 있는 것이라곤 사포(일반 사포보다 3배는 거칠다)와 늘 갖고 다니던 타에의 사진... 한시바삐 나와 옆 칸에 있는 술래를 잡아야 하는 절체절명 진퇴양난의 상황. '똥꼬'를 사포로 닦을 것인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로 닦을 것인가.
'나 이 상황, 만화에서 봤어' 하는 데자뷔가 느껴질 때가 있다. 『은혼』의 많은 에피소드들이 그러하고, 살아온 바를 설명하려면 이 만화를 자꾸만 인용하게 된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choice)라고 하는데, 화장실에 갇힌 곤도처럼 주어진 선택지는 늘 이딴 식이다. 그저 망함과 덜 망함 사이의 양자택일뿐... 고민 끝에 뒤처리를 하고 나온 곤도는 제법 멋지게 술래를 잡는다. 그런 그의 '똥꼬'는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인생은 모르겠지만, 사람은 아주 약간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사는 게 아닐까. 물론 이 신념보다 중요한 건 화장실에 휴지 비치 여부다.
이노우에 타케히코 글·그림 | 대원
맞벌이를 하셨던 부모님에게는 번번이 찾아오는 방학이 참 곤란한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나는 방학 때마다 사촌 형 집에서 지내곤 했는데, 대체로 지루하거나 불편한 시간들이었지만 그래도 사촌 형이 아끼는 『슬램덩크』는 유일하고도 완벽한 위로가 되었다. 머무는 내내 읽고, 계절이 바뀌거나 해가 바뀔 때마다 읽어도 매번 새롭고 그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곤 했다. 『슬램덩크』를 보다가 참지 못하고 코트로 뛰쳐나오면, 같은 이유로 공을 튀기는 친구들이 십중팔구 있었고 그런 애들과 공을 튀기며 여름을 났다.
이 만화에서 어떤 캐릭터를 제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대개 서너 명의 인물 안에서 판가름 난다. 하지만 진짜 재미있는 점은 그다음부터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캐릭터를 묻는다면 그 가짓수는 부지기수가 된다. 가지각색의 이유로, 어쩌면 '그게 이유가 돼?' 싶을 정도의 개인적인 이유로 캐릭터와 쉽게 사랑에 빠진다. 단 한 명도 열외 없이 열정적이었던 만화 속 캐릭터들에게 그때의 우리는 열정이라는 걸 배웠던 것도 같다. 그런 점에서 "『슬램덩크』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자와 열정을 논하지 말라"는 친구의 우스갯소리를 제법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한계에 다다른 정대만이 절체절명의 순간 이렇게 외친다.
그래, 난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어쩌면 뻔할 수도 있는 이 대사가 지극한 감동을 줬던 건 사실 그는 노력과 끈기의 대명사 채치수와 달리 포기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가 과거와 다르게 거듭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순간이었고, 실제로 그걸 증명해 낸다. 정대만이 힘겹게 던진 공은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림을 통과한다. 그 장면을 지날 때마다 매번 철썩하고 공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았던 건 분명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Keigo SHINZO 글·그림 / 장혜영 역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지난해 여름, 만화 신간에서 새롭게 읽을 만한 게 없을까 찾던 도중 작화에 눈길이 가서 『매일, 휴일』을 읽었다. 평소와 같은 일상, 퇴근 후 적당히 저녁을 먹고, 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읽을 때면 잔잔하게 스며드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만화였다. 살면서 한 번쯤은 다들 일상에서 무기력해지고 지칠 때가 있을 텐데, 이 만화를 읽을 당시엔 나 역시 그런 감정을 느낄 때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집에서 쉬면서 만화책이나 보고 싶다' 할 때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만화다.
『매일, 휴일』은 일상물이라는 장르가 주는 장점을 두루 갖췄다. 새로운 에피소드와 등장인물들이 소개될 때마다 다음에는 또 어떤 사연을 가진 캐릭터가 나올지 기대하게 하는 즐거움도 준다. 특히, 4권에서는 만화가가 꿈인 히로토의 사촌 동생 '나츠미'가 꿈을 향해 도전하는 과정이 나오는데, 나츠미는 부모님의 반대와 자신의 만화에 대한 쓴소리에도 불평만 늘어놓지 않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도 꺾지 않는다. 눈물을 글썽이더라도 말이다. 자연스레 꿈에 대한 나츠미의 확고한 태도를 응원하고 싶어졌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법'을 말하는 만화가 아닌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명확한 태도와 스스로 위로하는 방식에 공감이 되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주인공들의 일상에 보낸 응원은 결국 나 자신에게 주는 응원이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기억에 남는 대사는 1권에서 주인공 이쿠타 히로토와 그에게 단독 주택을 물려준(무려 공짜로) 이웃집 할머니의 대화다. 평소와 같이 할머니 댁에 들러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히로토에게 할머니는 "넌 지금 행복하냐?"고 묻고 다시 한번 "다음 단계의 행복은 생각 안 해?"라고 묻는다. 곰곰이 생각하던 히로토는 답한다.
"별로 생각한 적 없는데요, '행복' 같은 건."
행복엔 별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진짜 행복하고 싶은 사람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행복에 대한 갈망은 가지고 있지만, 당장 오늘 하루, 무사한 내일도 보장할 수 없는 일상에서 다음 단계의 행복까지 챙길 여유 따위는 없을지도 모르니까. 오히려 '행복' 같은 걸 생각하지 않는 히로토라 매일을 '휴일'처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익 글·그림 | 삐약삐약북스
'지역의 사생활99' 시리즈 중 '구미'편의 부제는 '땅콩밭의 파수꾼'. 주인공 도일이 애인에게 차이고 직장에서도 잘리면서 쫓기듯 고향 구미를 찾으며 펼쳐지는 이야기로 유쾌하게 읽히면서도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처음 이 만화를 읽었을 때,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마음들이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작은 도시 출신인 나는 스무살 이후 줄곧 서울에서 생활했다. 서울살이는 늘 불안정했다. 특히 20대 때는 주머니가 항상 가벼웠고, 마음 둘 곳이 없어 자주 헛헛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한 번도 고향을 그리워한 적은 없다. 나에게 고향은 반드시 떠나야 하는 곳이었으니까. '땅콩밭의 파수꾼'은 고향을 향한 복잡한 마음을 무척이나 생생하게 표현한다. 나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곳,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감정을 마주하게 하는 곳, 영원히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지긋지긋한 세계... 과거를 붙들고 있는 도시를 고향으로 둔 사람이라면, 다행히(?) 탈출했지만 찐득하게 얽혀 있는 마음만은 다 떨치지 못한 사람이라면 분명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만화다.
도일이 처음으로 조카 도하와 마주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도하는 도일이 그토록 탈출하고 싶어 했던 그 방에 앉아 있다. 마치 땅속에 묻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자신과 꼭 닮은 도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도일은 비로소 과거의 시간들과 화해하게 된다. 도일은 도하가 현재를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이 도시에서의 삶이 덜 막막하고 덜 외로울 수 있도록 함께 울어주고, 꼭 안아준다.
(<엘르> 피처 디렉터, 『아무튼 순정만화』 저자)
이와아키 히토시 글·그림 | 학산문화사
날이 잔뜩 서 있고 비관적이던 10대 후반에 『기생수』를 만났다. 인간의 뇌를 점령한 뒤 그 몸을 숙주로 삼아 '인간을 죽여라'라는 본능으로만 작동하는 '기생수'들이 등장한 일본의 한 도시. 주인공인 신이치의 기생수인 '오른쪽이'는, 뇌까지 점령하는 데에 실패해 오른팔만 차지한 채 신이치와 공존하는데 외부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지적이다. 그런 오른쪽이가 던지는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오히려 기생수 아닌가?", "인간이 포식자인 지금 세계는 과연 공정한가?" 같은 질문들이 당시 나의 감수성과 잘 맞았던 것 같다.
오른쪽이는 신이치의 '감정'을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이치가 '감정'을 잃어갈 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감정임을 알게 된다. 기생수들의 캐릭터 또한 다양하다. 인간과 기생수의 공존을 고민하며 아이를 출산해 인간의 감정을 이해해 보려고 했던 타미야 료코나, '환경 이슈'를 중점으로 내세우며 의회 진출에 나선 정치 집단 등 기생수가 바라보는 인간 사회, 때로는 기생수보다 더 '비인간적'인 인간의 모습이 비교되며 '종'으로서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 이 만화는 10대 시절 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신이치 : 길에서 우연히 만나 알게 된 생물이... 돌아보니 죽어 있었다. 그럴 때면 왜 슬퍼지는 걸까?
오른쪽이 : 그야 인간이 그렇게 한가한 동물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게 바로 인간이 지닌 최대의 강점이라고. 마음의 여유가 있는 생물. 이 얼마나 멋진 일이야.
동정심, 공감 능력, 때때로는 무모함. 그런 인간다운 면모를 잃지 않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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