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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력 특집] '덕후'의 삶은 넓고도 깊습니다

<월간 채널예스> 202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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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의 삶이란 게 그렇다. 한 번 빠지면 깊게 파고 오래 파고 계속 판다. 덕분에 이야기는 쌓이고 즐거움은 융숭하며 삶은 노곤하지 않다. 김형규의 시간이 만화적으로 펼쳐지는 이유다. (2023.08.07)


우리들은 자랐다. 책장을 넘기고 스크롤을 내리며 울고 웃었다. 도망갈 이야기가 있었고 꿈꾸던 이름들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아프리카의 바람을 느끼는, 골목길에 앉아 에베레스트산의 공기를 호흡하는 신기도 키웠다. "선달아, 꺼벙아, 까치야, 백호야, 슬비와 푸르매야, 우리들의 장그래 씨 그리고 새로이야..." 덕분에 추억이 넘쳤다. 덕분에 여전히 즐겁다! 컨테이너 가득 만화책을 쌓아놓은 덕후도, 만화 얘기라면 지칠 줄 모르는 평론가도, 할 말이 있고 연필만 쥘 수 있다면 멈추지 않겠다는 만화 작가도, 인생 만화를 곱씹는 만화 편집자와 마케터도, 그리고 숱한 독자들까지. 우리들의 만화력은 계속 연재 중이다.


'덕후'의 삶이란 게 그렇다. 한 번 빠지면 깊게 파고 오래 파고 계속 판다. 덕분에 이야기는 쌓이고 즐거움은 융숭하며 삶은 노곤하지 않다. 김형규의 시간이 만화적으로 펼쳐지는 이유다.



"가지고 있는 만화책 권수요? 솔직히 셀 수가 없어요"

한 1만 권은 넘는 상황인데, 어느 순간부터는 셀 수가 없어서 솔직히 가늠을 못 하겠어요. 1988년도에 산 책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책을 사면 절대 버리지 않아요. 만화책은 너무 많아서 따로 컨테이너에 보관하고 있고요.


“첫 만화책은 길창덕 작가님의 『선달이 여행기』예요”

아버지께서 사주신 첫 책이었어요. 초등학생인 선달이가 고등학생 형과 함께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탐방하는 내용이죠. 너무 재미있어서 이후로 『꺼벙이』, 『순악질 여사』, 『신판 보물섬』 등 길창덕 작가님의 작품을 모두 섭렵했어요. 그렇게 초등학생 때는 명랑 만화의 세계에 빠져들었는데, 『맹꽁이 서당』『요철 발명왕』의 윤승운 작가님, 『로봇 찌빠』, 『도깨비 감투』의 신문수 작가님, 『심술첨지』, 『심술통』의 이정문 작가님, 『강가딘』의 김삼 작가님과 고우영 작가님의 시리즈까지. 주로 클로버문고에서 나온 책들을 봤어요.


"7년간 1만 2000권을 봤더라고요"

중학교에 올라가서 <아키라>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비주얼이나 음악이 굉장하더라고요. 또, 그즈음 『드래곤볼』이 유명해지고 『닥터 슬럼프』, 『북두의 권』, 『공작왕』 이런 작품들이 복제가 돼서 500원짜리 작은 책으로 나왔거든요. 학교 앞에 있는 문방구에서 팔았는데 그걸 다 모았어요. 비싼 책은 못 사니까 동네 글방에서 빌려 읽었고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로 넘어가면서 7년 정도 글방에서 빌린 내역을 봤더니 1만 2000권을 봤더라고요.


"가리지 않고 다 읽어요"

순정 만화도 좋아하죠. 제가 중·고등학생일 때는 순정 만화가 인기였던 시절이라 『윙크』,  『나인』 같은 만화 잡지도 자주 봤고 작품도 사서 읽었어요. 나중에 방송에도 출연하고 만화책을 좋아하는 게 좀 알려져서 한국 만화 홍보 대사를 한 적도 있는데요. 좋아했던 작가님들을 직접 뵐 수 있는 자리도 생기고 사인도 받았어요. 강경옥, 신일숙, 윤승운, 신문수, 허영만, 김형배, 이두호, 윤태호, 주호민 작가님 등등, 작가님들이 사인을 하거나 그림을 그려주신 스케치북이 있는데, 그게 제 보물이에요.


"구하기 힘든 만화, 지금도 모아요"

작가님 한 분을 좋아하면 그 작가님의 작품을 파는 스타일이에요. 작품도 모두 사려고 노력하죠. 한 번은 윤태호 작가님을 만나서 『혼자 자는 남편』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본인도 안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너무나도 존경하는 작가인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도 『아톰』, 『블랙 잭』『마그마 대사』『키리히토 찬가』『미크로이드 S』『리본의 기사』『도로로』 등을 갖고 있는데 그 시절 판본은 지금 구하기 힘들어요. 유데타마고 콤비의 『근육맨』도 그렇고요. 시마모토 카즈히코의 『호에로 펜』은 구하고 싶어서 거의 매일 중고 사이트를 검색하고 출판사 직원분도 수소문하는 등 2~3년간 추적하다가 겨우 전질을 샀어요.



"치아를 어떻게 그렸나 유심히 보게 돼요"

공포물도 좋아하는데, 특히 치기공사 출신인 이토 준지의 작품을 많이 봤어요. 제가 치과 의사다 보니, 만화를 볼 때 치아를 어떻게 그렸는지 유심히 보게 되는데요. 이토 준지의 그림은 슬쩍 지나갈 수 있는 묘사에서도 치아를 정확하게 그려요. 얼마 전 돌아가신 미우라 켄타로도 『베르세르크』에 나오는 주인공 가츠의 치아를 전치, 송곳니, 어금니까지 정확한 해부학적 형태로 그렸고요. 근육 묘사는 훌륭한데, 치아는 무슨 옥수수 알갱이를 심어놓은 것처럼 표현하거나 사람의 치아는 28개, 사랑니 포함해서 32개인데 아래 보이는 치아만 30개를 그려 놓거나 하는 경우를 보면 제 입장에선 조금 별로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번뜩 떠오르는 명장면, 명대사는요"

만화 좋아하는 분들 사이에선 아주 유명하죠. 『북두의 권』 마지막 장면이에요. 핵전쟁 이후의 디스토피아에서 권법으로 악인을 무찌르는 내용인데, 가슴에 북두칠성 흉터가 있는 켄시로라는 주인공이 악인의 혈자리를 누르고선 뒤돌아서며 말해요. "너는 이미 죽어 있다!!", "오마에와 모 신데이루!!"라는 일본어 대사는 유튜브에 밈으로도 많이 올라와 있어요.


"만화 덕분에 치과 의사가 됐어요"

지원한 대학의 본고사 중 생물 시험을 보는데, 주관식 문제 중에 호르몬 관련 문제가 나왔어요. '어떤 여자 환자가 내원했는데 쉽게 피로하고 얼굴이 좀 달덩이 같고 멍이 잘 들고 몸통은 부어 있는데 팔다리는 가늘고 무기력증을 호소한다. 이 환자의 병명과 치료법을 쓰시오.'였죠. 보자마자 마후네 카즈오의 『슈퍼 닥터 K』 속 한 장면이 떠올랐어요. 애장판 11권 「크리스마스에 꽃다발을」이라는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여자 환자의 경우가 딱 그랬거든요. 병명은 '쿠싱 신드롬'이고요. 정답을 맞힐 수밖에 없었는데, 역시 만화는 나의 평생 스승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덕질은 계속됩니다"

<문제적 남자>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이 『슈퍼 닥터 K』 이야기를 했어요. 프로그램이 끝나고 어느 날 작가님이 연락을 하셨는데, 시청자 게시판에 올라온 사연을 전해 주시더라고요. '몸도 안 좋고 쉽게 피곤하고 우울증도 심해서 자살까지 생각하던 차에 우연히 김형규 씨가 나온 프로그램을 봤다. 나와 똑같은 증상을 이야기하더라. 당장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쿠싱 신드롬 진단을 받았고 수술을 받기로 했다. 김형규 씨 덕분이다. 정말 감사하다.' 이런 사연이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는데 머리가 띵하더라고요. 나는 그저 만화책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돌고 돌아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이 되었구나 싶어서요. 더 열심히 만화를 봐야 하는 이유가 또 늘었어요!(웃음)



*김형규

치과 의사이자 다양한 TV 프로그램, 드라마, 뮤지컬에 출연하고 있는 방송인, 본인의 SNS에는 '문화예술창작의료인, 만화광, VJ, 닥터베로, 우주전사일인용' 등으로 소개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양치를 잘할 거야 / 양치를 안 할 거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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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기낙경

프리랜스 에디터. 결혼과 함께 귀농 했다가 다시 서울로 상경해 빡세게 적응 중이다. 지은 책으로 <서른,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 <시골은 좀 다를 것 같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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