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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아의 카페 생활] 오늘 먹으면 가장 맛있는 과일 - 옴니버스 베이크

임진아의 카페 생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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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케이크에 멜론을 집어넣는 게 아닌, 멜론의 당도를 앞세워서 만든 케이크라고 할 수 있겠다. 가장 다디달고 충분한 부분이 케이크 시트와 생크림 사이에 알맞게 들어 있다. (2023.07.28)


격주 금요일, 임진아 작가가 <채널예스>에서 작업하기 좋은 카페를 소개합니다.

‘임진아의 카페 생활’에서 소개하는 특별한 카페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한 번 떠오르면 입에 넣기 전에는 절대 가시지 않는 음식이 누구에게나 있을까. 상상만으로 식감이 느껴진다는 건 단지 망상의 영역만은 아닐 테다. 지금 입에 넣으면 딱 기분 좋을, 근래에 필요했던 식감. 내 입에는 이런 식으로 식감의 공기가 번번이 머금어진다. 음식을 먹을 때면 맛만큼이나 식감을 중요히 여기는 사람에겐 식감의 공기가 오래 기다리던 편지처럼 찾아온다.

대개는 과일의 식감이다. 특히, 여름이 가까워지면 자세를 몇 번이나 꼿꼿하게 세우며 고쳐 앉는다. 혹여나 이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제철 과일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가을로 넘어가 버릴까 긴장이 되기 때문이다. 자칫 하나의 과일에 심취해버리면 다른 과일에게는 야박한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수박 한 통을 사서 남김없이 다 먹으려고 애쓰다 보면 복숭아만의 시간대를 잡기 영 어렵고, 자두 한 알 한 알 쪽쪽 빨아먹으며 여름의 에너지를 채우다 보면 참외 씹을 생각을 저버리기란 얼마나 쉬운지. 그래서 가만히 앉아 있는 내게 식감의 요정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나 보다. 잊었니? 이런 것도 씹곤 했는데 하면서.

낯선 도시에서 고작 며칠을 여행하면서도 과일 생활을 이어가느라 바쁘다. 여행 중에도 생활은 계속되므로 아무리 특별하고 맛있는 걸 먹으며 돌아다니더라도, 과일로만 채워지는 욕구는 반드시 과일로 채워야만 한다. 주로 비즈니스 호텔에서 지내기 때문에,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좀처럼 칼을 쓰는 과일을 먹기 어려워서 쉽게 먹을 수 있는 과일들을 사기 위해 장을 보러 나간다. 여행 중에 마트에서 사는 과일은 주로 체리, 귤, 사과 한 알 정도가 단골 과일이고, 플라스틱 통에 든 조각 과일도 고맙다. 회전이 빠른 동네 대형 마트나 백화점 식품관에서 사는 조각 과일은 확실히 여행의 과일 맛이다. 여름이라면 익히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는 노란 옥수수도 좋다. 호텔 침대에 기대앉아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옥수수의 물기를 마시듯이 씹다 보면 다음 날에도 씩씩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체력이 채워진다.

호텔 냉장고나 일상의 냉장고에 오늘 먹으면 가장 맛있는 과일을 준비해 두기란 역시 쉽지 않다. 요점은 오늘 먹으면 가장 맛있어야 한다는 점인데, 가장 맛있는 어느 날은 나 몰래 지나가 버린다. 그 후에는 무르기 전에 먹어야 하는 대상이 된다. 천도복숭아가 상하는 과정이란 얼마나 솔직한지, 수박이 맛없어진 이유에는 미리 잔뜩 잘라두고 부지런히 먹지 않았던 내 탓이 얼마나 큰지, 멜론이 언제 가장 맛있는지 알아채는 건 얼마나 어려운지. 나의 집에 과일을 데려온 이상 이 과일의 시간으로 잠시 살아야 한다. 매일 눈을 맞추고 너의 상태 그리고 나의 상태를 함께 바라봐야만 한다.

하지만 멜론도 먹고 싶고, 수박도 먹고 싶고, 복숭아도 먹고 싶고, 참외도 먹고 싶고, 아오리 사과도 먹고 싶은 게 내 입이고 내 마음이다. 이를 해결하기는 의외로 어렵지 않다. 오늘 먹으면 가장 맛있는 과일은, 과일을 고심해서 골라서 내어놓는 카페에 있다. 여행 중에도 그렇고 일상을 살면서도 과일을 가장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은 그 과일들로 맛을 내는 카페에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번 여름에 먹은 첫 멜론은 작업실 근처에 있는 옴니버스 베이크의 멜론 쇼트케이크였다. 딱딱한 멜론이라는 열매를 직접 자를 필요도 없이 맛볼 수 있는 찬스가 나의 생활권 안에 있었다. 단 케이크에 멜론을 집어넣는 게 아닌, 멜론의 당도를 앞세워서 만든 케이크라고 할 수 있겠다. 가장 다디달고 충분한 부분이 케이크 시트와 생크림 사이에 알맞게 들어 있다.

여름에는 멜론 쇼트케이크와 복숭아 쇼트케이크를 선보인다는 소식을 듣고서 며칠 동안 내 몸과 내 입을 신경 썼다. 언제 먹으면 가장 기분 좋을지 궁금해하다 보면 오늘이다 싶은 날에 자세가 꼿꼿해진다. 오늘 먹으면 가장 맛있는 과일이란, 먹고 싶은 날에 가장 맛있는 부분을 먹으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옴니버스 베이크에 오기 전날 밤, 잠들기 전 눈을 스르륵 감으면서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일은 멜론 케이크를 먹으러 가자고.

케이크에는 역시 커피가 어울리지만 과일이 주인공인 날이니 피치 아이스티를 곁들이기로 했다. 일 년 만에 마시는 옴니버스 베이크의 계절 음료다. 진하게 우린 얼그레이 티에 얇게 썬 천도복숭아가 들어간다. 비정제 유기농 설탕에 재운 천도복숭아가 잔뜩 들어 있어서 마시다가 떠먹고 떠먹다가 마시는 리듬이 좋다. 단맛을 넣지 않은 냉차도 함께 내어주시기 때문에, 마지막에 입을 헹구기 딱 좋다. 단맛이 가시자마자 맛 좋은 과일들의 식감이 입안에서 오히려 선명해진다.

멜론 쇼트케이크와 복숭아가 듬뿍 들어간 피치 아이스티를 마시며 밖을 바라보니 지나가던 동네 어린이가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다. 두리번거리던 아이는 안쪽에서 작업하고 있던 사장님에게 손을 크게 흔들었다. 동네 이웃이자 단골손님의 호탕한 인사였다. 옴니버스 베이크가 단골인 삶. 새삼 나의 생활을 바라보게 된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틈을 만들어 먹으러 가는 생활을. 과일이 먹고 싶으면 과일을 눈앞에 데려오는 생활을. 계절을 챙기는 나의 이 달큰한 생활을.



계절을 새로 맞이할 때나, 이 계절이 흐려지는 기운을 느낄 때면 계절을 노래하는 책에 손이 간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옛날에도 사계절은 그대로 존재했고, 여름이면 여름을 이야기하려 드는 문인 또한 자신의 방에서 펜을 들었다. 정은문고에서 출간되는 작가 시리즈 『작가의 계절』은 어느 계절에 펼쳐도 내 마음에 쏙 맞는 계절 풍경이 그려져 있다. 이번 여름 내 마음에 들어온 문장 또한 있었다.

밤이 짧은 여름철이 내 마음을 끄는 이유는 석양이 길어서이기도 하다. 1년 가운데 반이 낮이고 반이 밤인 북쪽 나라를 상상하지 않더라도 석양과 새벽이 꽤 가까워진다. 오후 7시 반이 넘어야 어두워지고 어두운 밤이 오전 3시 반이나 4시 가까이면 밝아진다. 그 풍경을 떠올리면 즐겁다. 아직 우리가 잠에서 깨지 못한 채 반쯤 꿈을 꾸는 동안 밖은 이미 환해지고 있다. 생각하면 흐뭇하다.

시마자키 도손 작가가 그린 짧은 여름밤의 풍경. 잠든 이 몰래 먼저 환해지는 밤의 풍경에 과일의 표정이 그려지는 건 왜일까. 이 밤은 냉장고 혹은 부엌에서 다음날을 기다리고 있는 과일의 밤이기도 하지 않을까. 깨어나면 한 입 크게 베어 물 이를 기다리고 있는, 내일 가장 맛있어지기 위해 환해지는 과일의 밤. 생각하면 정말이지 흐뭇하다.

나의 여름 부엌을 그리며 더불어 가까이에 있는 옴니버스 베이크의 부엌도 그려보게 된다. 과일을 먹는 데에 여름의 시간을 부지런히 쓰고 싶다는 마음에는, 과일이 든 케이크와 차를 부지런히 먹고 싶다는 마음이 함께 한다. 과일과 빵이 만나고, 과일과 얼음이 만나는 풍경. 그걸 입에 넣으면서 '식감'이라는 자국을 꾹꾹 눌러보는 여름 풍경. 이 풍경을 앞세우다 보면 아무리 더운 여름도 그저 짧게만 느껴진다.



작가의 계절
작가의 계절
다자이 오사무 등저 | 안은미 편역
정은문고(신라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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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임진아(일러스트레이터, 작가)

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그리거나 쓴다. 일상의 자잘한 순간을 만화, 글씨, 그림으로 표현한다. 지은 책으로는 『사물에게 배웁니다』,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아직, 도쿄』 등이 있다.

작가의 계절

<다자이 오사무> 등저/<안은미> 편역13,5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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