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여성의 날 특집 – 딕테를 읽는 여자들
딕테 모임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진행 중입니다. 딕테를 읽으며 텍스트 너머로 연결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나아가 함께 읽는 여성들이 함께여서 도착할 수 있는 낯설고 먼 곳의 풍경도 담았습니다.
받아쓰기의 받아쓰기
“혹시 제가 책 하나 소개해도 될까요?”
일요일마다 열리는 뜨개 모임에 참석한 손님 한 명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말을 걸지 않으면 먼저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던 분이기에 용기 있게 건넨 그 질문이 기꺼웠다. “네. 그럼요!”라는 씩씩한 내 답변에 그 손님은 『딕테』라는 책이 있노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첫 번째 신호였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예요?”
지난가을쯤 열린 북페어에서 알게 된 손님이 서점으로 놀러 왔고, 책을 한 권 추천받았으면 한다기에 좋아하는 책을 물었다. 초대받지 않은 페어에서 부스를 돌며 셀러로 참여한 작가들에게 되레 자기 작품을 소개한 사람이었다. 직접 만들었다는 작품도 몹시 흥미로웠기에 그가 좋아하는 책이 궁금했다. 그는 『딕테』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두 번째 신호였다.
“제가 인프로그레스와 모임을 같이 해보고 싶어요.”
같은 동네 주민인 전승민 평론가님이 겨울 방학을 기념해 서점에 놀러 왔고, 짧게 맥주와 독서를 즐긴 후 모임 제안을 했다. 며칠 전 『딕테』로 북토크를 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어떤 모임을 해볼까요?’라는 질문에 가장 먼저 『딕테』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신호였다.
어떤 의지는 외부에서 시작된다. 『딕테』 독회를 기획하게 된 건 내 안에서 생긴 의지라기보다는 주변에서부터 시작된 목소리, 즉 신호를 감지한 결과다. 그렇게 우리는 4주간의 ‘해방촌에서 『딕테』 읽기’ 모임을 시작하게 됐다. 아홉 개의 챕터로 구성된 책을 매주 세 챕터씩 다루고, 마지막 주에는 『딕테』에서 발화한 글쓰기를 하고 합평하는 구성이다. 평론가에게 내가 쓴 글을 평가받다니… 사실 글을 쓰는 이들에게 이 모임은 설레면서도 두려운 자리였다.
첫 번째 모임, 근심 가득한 얼굴로 우리는 모였다. 도대체 『딕테』는 무엇이며 차학경은 누구란 말인가. 이 알쏭달쏭한 텍스트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각자의 속내였다. ‘더듬거렸다’라고 하는 게 맞을 거다. 그날의 우리는 『딕테』의 초반부를 눈으로 더듬거리며 차학경의 텍스트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참가자 중 어떤 이들은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중 언어자였다. 원서와 번역서를 번갈아 가며 책을 더듬었다. 그러다 불어가 쓰인 페이지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누구도 이렇다 할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제가 불어를 전공했어요’라며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는 불어의 문법을 설명하며 차학경이 말하는 바를 추측했다. 흐릿했던 텍스트가 아주 조금 선명해진 첫 번째 모임이었다.
우리는 『딕테』의 독법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어떤 이는 원서를 추가로 사고, 어떤 이는 번역서를 추가로 샀다. 그리고 어떤 이는 불어가 나온 페이지를 미리 학습했다. 그렇게 각자가 터득한 『딕테』 독법을 공유했다. 여전히 미로 같은 텍스트 안에서 때때로 길을 잃었지만 그때마다 누군가가 길잡이가 되주었다. ‘차학경은 왜 ‘사랑시’가 아니라 ‘연애시’라고 했을까?’라는 질문 앞에 어리둥절해 있을 때 ‘사랑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연애는 둘 이상이 하는 상호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라는 누군가의 답변을 듣고선 모두 머릿속에 불이 켜졌다. 독서 모임으로도 도파민이 나올 수 있을까? 우리는 텍스트를 해체하며 함께 유희했다.
우리가 더듬거린 끝에 『딕테』를 움켜쥘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전승민 평론가님 덕분이다. 우리의 안내자. 우리를
차학경의 세계로 인도하는 매개자. 『딕테』에 압도당한 이들이 텍스트에서 자유로워져 자기의 글을 쓸 수 있게 만들어 준 응원군.
같은 요일, 같은 시간, 같은 작품을 이야기하는 세 번째 자리가 됐을 때 우리는 더없이 친밀해졌다. 친밀한 만큼 가감 없이 생각을 이야기했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여덟 번째 챕터인 ‘합창 무용’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한 에피소드가 연상된다는 의견이었다. 『딕테』를 읽기 전까지 이 작품을 알 수 없듯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모임이 끝난 후 나는 바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첫 화를 클릭했다.
우리는 글이 쓰고 싶어졌다. 평가에 대한 두려움보다 쓰고 싶은 욕구가 커졌다. 욕구를 촉발시킨 『딕테』와 연결하여 나의 글쓰기를 하고 싶어졌다. 네 번째 모임에는 각자 자신이 쓴 글을 들고 왔다. 시, 산문, 낙서 등 각자의 형태로 끝맺은 ‘딕테적’ 글쓰기였다. 『딕테』를 읽기 전의 나와 후의 내가 같은 존재일 수 있을까? 모임을 기획하며 ‘온몸으로 텍스트를 밀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읽기와 쓰기의 경험’을 하게 될 거라는 전 평론가님의 말이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4주 차에 걸쳐 『딕테』를 밀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며 전에 없던 독서 경험을 했다. 마지막 모임이 끝났지만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던 우리는 각자의 책에 흔적을 남겼다. 『딕테』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긴 것과 모임을 하며 생긴 감정이 언어가 되어 글자로 새겨졌다.
좋은 작품을 글을 쓰고 싶게 한다. 창작은 또다른 창작으로 재생산된다. 『딕테』 독회를 통해 우리는 차학경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고 우리의 글을 쓰며 창작의 시작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번 모임을 통해 인프로그레스가 여성 작가들이 함께 창작하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소망에 한뼘 가까워졌다. (인프로그레스 김안젤라)
인프로그레스 독서 모임
입으로, 귀로, 몸으로 읽는 책
문장을 절실하게 읽는다는 것은 나를 들여다보는 일과도 같다. 한 줄, 한 문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과거의 나를 불러내고, 오늘의 나와 연결하며, 책장을 덮을 때면 다시 현실 속의 나로 돌아온다. 하지만 책 속에서 살아 숨 쉬던 화자와 이야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를 스친 문장들은 내 안에 여운을 남기고, 읽다 접어둔 페이지들은 미완의 흔적이 된다. 읽었던 문장들을 다시 펼칠 때, 때때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적이 있었던가? 내가 나를 반쯤 아는 것처럼 문장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우리가 타인의 삶을 온전히 알지 못하듯, 책 속 화자의 삶 역시 온전한 결말로 남아 있지 않다. 어쩌면 읽기란, 미완결의 이야기들을 살아 있는 상태로 남겨 두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딕테’는 받아쓰기라는 사전적 정의를 넘어선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행하는 것이 받아쓰기이듯, 딕테는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문장을 새기는 행위에 가깝다. 글자를 따라가며 의미를 체득하는 과정, 그리하여 기억하기 위한 몸짓. 차학경의 『딕테』는 단순한 문장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읽기를 넘어, 기억을 각인하는 의식과 같다.
『딕테』를 읽으며 나는 미완결로 남은 수많은 이야기와 화자들을 떠올린다. 끝을 맺지 못한 이야기, 더 이상 쓰일 수 없는 문장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잊힌 목소리들. 차학경은 과거의 아홉 명의 뮤즈를 매개로 하여, 독자인 나를 접신하게 만든다. 그들의 언어를 따라 받아쓰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의 존재를 잇는 통로가 된다. 마치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 담듯이, 『딕테』를 읽는 동안 나는 다시 쓰여지는 책이 된다.
일종의 간증처럼, 『딕테』를 읽는 독자들은 이러한 울림을 경험한 적이 있다. 어떻게 이러한 울림이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딕테』가 단순히 눈으로 읽는 텍스트가 아니라, 입으로, 귀로, 그리고 몸으로 읽는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2024년, 딕테가 출간되자마자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응이 이를 증명하듯, 독자는 이 책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고 있다. 받아쓰듯 읽고, 소리 내어 반복하며, 문장을 몸에 새긴다. 그렇게 읽기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기억과 연결의 의식이 된다.
특히나 많은 여성들, 그리고 어머니와 딸의 관계 속에서 『딕테』는 각인된 경험 자체로 다가온다. 『딕테』를 읽는다는 것은 미완의 문장들 속에서 끝없는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이다. 읽고, 기억하고, 받아쓰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사라진 목소리들을 다시 불러온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쓰인 문장은, 결국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닿아 새로운 읽기로 이어진다. 읽기란 결국 끝나지 않는 대화이다.
2018년부터 운영하는 ‘히스테리안’은 다양한 문화예술계 종사자들과 출판과 <워킹클럽> 프로그램, 시각 전시를 기획하는 단체이다. 히스테리안은 가장 숭고한 히스테릭한 환자를 ‘독자’로 염두에 둔다. 타인이 부과한 정체성에 집요하게 반문하고 끊임없이 짜증나도록 질문을 이어가는 사람, 그러한 사람을 독자라고 상정한다. 우리에겐 『딕테』는 끝나지 않은 대화이다. 다양한 독자들과 『딕테』의 진동을 감각하기 위해 이십 년 동안 ‘딕테 읽기’를 수행하며, 『짐승일기』를 출간한 김지승 작가님과 <워킹클럽>을 함께 했다. 프로그램에서 김지승 작가님은 딕테의 상징체계와 딕테의 저자인 차학경의 세계관을 공유해주셨고, 모임은 온/오프라인으로 동시로 진행되었다. 이날, 서울권 독자들보다 타 지역, 해외에서 많은 신청을 해주었는데, 『딕테』의 열풍은 특정한 지역에서 소비되는 것이 아니었고, 동시대 우리가 체험하는 감각임을 확인했다.
『딕테』는 우리에게 화자를 연결하게 하는 책으로, 받아쓰게 한다. 그렇게 우리에게 저마다의 미완의 결말을 써 내려갈 동력을 쥐어준다. (히스테리안 강정아)
히스테리안 독서 모임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딕테
출판사 | 문학사상

김안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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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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