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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 육아 휴직이 중단되다

'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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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허일후 아나운서의 앞날이 무사하기를 바라며 우리는 함께 식사를 했다. 곧 헤어질 거라 생각하니 함께 보낸 젊은 시절 얘기가 많이 나왔다. (2023.06.26)


격주 월요일, <채널예스>에서 ‘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을 연재합니다.
6개월 육아 휴직을 냈지만, 조금 일찍 복귀한  
 전종환 아나운서가 일상과 삶을 이야기합니다. 



허일후 아나운서가 오랜 시간 몸담았던 MBC를 떠나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16년 7개월 동안 아무것도 아니었던 저를 길러주고 키워주셨던 정든 회사를 떠난다"라며 "아직은 작지만 크게 키워나갈 IT 회사로 이직한다"라고 밝혔다. 떠날 거라 생각해 본 적 없는 이가 떠나겠다는 소식은 어쩔 도리 없이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게 했다. 우리는 20대 중반에 만났다. 1년 선후배 관계로 함께 보낸 시간이 꽤 긴데 다투거나 멀어져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내게 언제나 가깝고 유능한 동료였다. 그는 누구보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컸고 아나운서에게 필요한 덕목들 대부분을 갖추고 있었다. 서글서글한 외모와 성격, 굵은 목소리, 뛰어난 장악력까지. 그만큼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어울리는 사람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06년 추운 겨울날 집을 나서던 길이었다. 낯선 번호가 전화기에 찍히더니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허일후라고 합니다. 이번에 MBC 신입 아나운서로 입사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밝고 털털한 성격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목소리였다. 어쩌다 아나운서가 됐던 나와 달리 그는 오랫동안 아나운서의 꿈을 위해 노력했던 친구였다. 그는 앞으로 펼쳐질 방송 인생에 대한 낙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보다 회의적인 나는 "아나운서의 삶이란 게 꼭 그렇게 밝고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욕심을 너무 크게 부리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라는 식의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 데, 이제 막 세상에 나선 꿈 많은 그에게 내 말은 깊게 가닿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모든 방송을 잘하고 싶다고 말했고 실제로 모든 방송에서 출중한 역량을 뽐냈다.

물론 그의 삶에도 굴곡은 있었다. 그는 아나운서로서 탁월한 직업인이었으나 그렇다고 스타 아나운서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애매했다. 물론 이건 나를 포함한 대다수 아나운서들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모두가 스타를 꿈꾸며 아나운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탁월한 역량을 생각했을 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일 수는 있겠다 싶다. 누구보다 방송을 잘하고 좋아했던 그였는데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방송을 하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다. 한 번은 우리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방송을 하지 못하는 마음에 대한 길게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어느 때보다 절절한 아픔이 느껴졌다. 이 모든 인연을 뒤로하고 그는 MBC를 떠나기로 했다.

우리나라에 방송국이 두 개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방송국은 KBS 아니면 MBC 둘 중 하나였다. 1990년대 들어 SBS가 새롭게 문을 열었지만 방송국이 3개라는 사실이 많은 이들에게 어색하게 다가왔다. 방송국 독과점 시대에 자란 이들에게 아나운서를 포함한 방송국 종사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1분 뉴스에만 출연해도 다음 날 식당에 가면 많은 이들이 알아본다는 시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의 어머니도 아침 뉴스를 진행하는 손석희 아나운서를 보며 "우리 아들도 나중에 저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곤 했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방송국에 취직해 손석희 선배가 진행하던 아침 뉴스를 진행하기도 했지만 모든 면에서 나는 턱없이 모자랐다. 거기에는 지성, 외모, 진행 역량 등 다양한 요인이 있겠지만 방송국의 영향력 약화도 여러 이유 중 하나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방송국은 셀 수 없이 많아졌다. 많아졌으면 보는 사람도 많아야 하는데 TV를 보는 사람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심지어 방송국에 다니는 나도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TV가 없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에 방송국 종사자들의 위상은 과거와 같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보니 많은 이들이 회사를 떠났고, 떠나고 있다. 나와 함께 입사했던 동료 아나운서 세 명은 이미 오래전에 회사를 떠났고, 내 바로 위 기수 3명도 떠났고, 내 아래 기수 3명도 허일후 아나운서를 마지막으로 모두 떠나게 된다. 위아래 합쳐 열 명의 아나운서가 있었는데 모두가 떠나고 이제 나 하나만 남은 셈이다. 어디 아나운서뿐이겠나? 기자, 피디, 방송 기술, 제작 카메라까지. 방송국을 평생직장이라 여기던 다양한 직종의 동료들이 이런저런 고민 끝에 회사를 떠나는 일은 이제 흔한 풍경이 됐다.

떠나는 게 자연스러운 세상이 됐지만 나는 여전히 회사에 남아 있다. 어떤 강한 의지로 인해 남는다기보다는 뚜렷하게 나갈 이유를 찾지 못해 남는 소극적인 행동을 설명하려니 스스로가 겸연쩍어지지만 이 민망함을 무릅써야만 이 글은 완성될 것이다. 꼬박꼬박 잘 나오는 급여는 나를 붙잡는 첫 번째 조건임에 분명하다. 월급은 무는 순간 끌려갈 줄 알면서도 물 수밖에 없는 미끼 같은 존재인데, 나는 여전히 이 미끼를 포기하지 못하겠다. 이보다 조금 다른 차원의 이유를 찾아보자면 언젠가 사회적 합의 끝에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공영방송이 자리를 잡는다면 그곳에는 잘 듣고, 제대로 이해하고, 똑바로 전하고, 날카롭게 질문할 수 있는 아나운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존경하는 선배들에게 배운 아나운서의 전문성과 직업 윤리를 언젠가 그런 방송국에서 일할 후배들에게 전해줄 의무가 내게도 있다고 믿는 것이다. 별도리 없어 남게 된 자의 이유는 이리도 길고 장황하기만 하다.

떠나는 허일후 아나운서의 앞날이 무사하기를 바라며 우리는 함께 식사를 했다. 곧 헤어질 거라 생각하니 함께 보낸 젊은 시절 얘기가 많이 나왔다. 막 아나운서로 입사해 행복했던 시절에 우리는 참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점심부터 다음날 아침 해장까지 끼니 3번을 연속으로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우리는 같이 낄낄댔다. 일후가 떠나게 되면 아마도 이런 종류의 대화가 오랫동안 그리워질 것이다. 나는 허일후 아나운서가 떠나며 생긴 조직 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육아 휴직을 중단하고 회사로 돌아오기로 했다. 조직 내 또래 중에 남은 이가 얼마 없는 상황에서 휴직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내의 동의로 남은 육아 휴직 사용은 훗날로 미뤄졌다. 그리하여 봄에 시작된 나의 육아 휴직은 여름의 초입에 돌연 마무리됐다. 남게 된 나와 떠나게 된 허일후 아나운서 모두의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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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전종환(아나운서)

MBC 아나운서. 에세이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을 썼다. 6개월 동안 육아휴직을 하고 아내와 아들과 제주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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