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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 범민이의 독후 발표 대회
'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 5화
비록 대회는 실패했지만 범민을 위해 준비한 공부 프로그램이 모두 무의미했던 건 아니었다. 아내는 범민이 일기를 쓰면 좋겠다는 마음에 SNS에 '범민 다이어리' 계정을 만들어주고 글쓰기를 독려했다. (2023.05.30)
격주 월요일, <채널예스>에서 ‘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을 연재합니다. 6개월 육아 휴직을 낸 아빠 아나운서 전종환이 제주 일상을 이야기합니다. |
제주 홈스쿨링을 준비하며 가장 심혈을 기울인 건 '독후 발표 대회'였다. 우리는 매주 한 권씩 좋아하는 책을 읽고, 느낀 점을 발표한 뒤, 투표를 통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이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우리는 범민이 책을 사랑하는 아이로 크길 소망했고 '독후 발표 대회'야말로 그를 위한 완벽한 수업일 거라 확신했다. 의도대로라면 범민은 한 주에 한 권씩 책을 읽을 것이고 그 소감을 글로 정리해 말로 풀어내게 될 터이니 읽기, 쓰기, 말하기를 한 번에 훈련할 수 있는 학습프로그램인 셈이었다.
시작은 좋았다. 범민은 첫 발표를 앞두고 역력하게 긴장한 모습을 보였지만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범민은 자신이 준비한 원고를 바탕으로 책을 읽은 소감을 발표해나갔다. 아내와 나는 그런 범민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범민아. 처음엔 다 그런 거야. 어색하고 힘들지? 하지만 우리 아들은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심지어 우리는 전문적으로 말을 다루는 아나운서 부부가 아니었던가. 영문법을 가르치는 실력은 신통치 않더라도 말하기 수업만큼은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내는 부드럽고 권위 있는 목소리로 범민에게 설명했다.
"범민아. 처음에는 원고가 있어야 마음이 편할 거야. 하지만 원고에 구애 받으면 안 돼.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말을 친구에게 한다 생각하면 그게 좋은 발표가 될 거야."
범민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원고를 옆으로 치우고 발표를 이어갔다. 범민은 처음으로 열린 '독후 발표 대회'에서 당당히 일등을 차지했다.
하지만 우리의 발표 수업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의도는 좋았으나 문제가 여럿이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스피치 수준과 관계없이 범민에게 늘 만점을 부여했다. 범민이 수업에 흥미를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 컸을 것이고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줄 것이 만점 밖에 없었을 수도 있겠다. 반면 범민은 우리 부부 모두에게 늘 최저점을 부여했다. 일등을 차지해 장난감을 사려는 얕은 수작이었다. 결과적으로 범민은 언제나 일등이었다. 눈치 빠른 범민은 이 발표 대회의 구조를 정확히 파악했고 이내 게을러졌다. 예전에 봤던 책으로 적당히 시간을 때웠고 그렇게 일등을 차지해 장난감을 모으기 바빴다. 범민의 읽고, 쓰고, 말하는 능력은 제자리였으나 즉흥적으로 말하는 실력만은 일취월장했다. 이건 아니지 않은가? 애드리브 능력 키우기 대회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아빠. 우리 발표 대회를 더 자주 하면 안 돼?"라고 묻는 범민을 보며 나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 질문은 마치 "호구 아빠. 책 읽었으니 됐지? 빨리 장난감이나 사줘"처럼 들렸으니까. 우리는 대회를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비록 대회는 실패했지만 범민을 위해 준비한 공부 프로그램이 모두 무의미했던 건 아니었다. 아내는 범민이 일기를 쓰면 좋겠다는 마음에 SNS에 '범민 다이어리' 계정을 만들어주고 글쓰기를 독려했다. 그냥 쓰라면 쓰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아내는 너의 팔로어 2천 명이 지켜보고 있다는 말로 범민을 꼬드겼는데, 그건 타고난 범민의 관종기를 활용한 탁월한 아이디어였다. 물론 처음부터 일기 내용이 좋을 리는 없었다. 범민의 일기는 감정의 배설로 채워지는 날이 많았는데 첫 일기는 다음과 같았다.
제목 : 얄미운 엄마 우리 엄마는 거짓말쟁이다. 목욕도 안 시키고, 사탕도 안 사주고, 책도 안 읽어준다. 기분이 나쁘다. |
그래도 시작한 것에 의미를 두며 우리는 일기 쓰기에 많은 공을 들였다. 하루가 끝날 무렵 우리는 탁자에 모여 앉아 범민의 하루 얘기를 들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사건 혹은 주된 감정을 골라냈고 이걸 어떻게 글로 풀어나가는 게 좋을지 함께 논의했다. 나는 첫 문장은 간결해야 한다거나 마지막 문장은 여운을 남기는 게 좋다는 등의 충고를 건넸다. 범민 일기는 조금씩 발전해갔고, 이제 일곱 살의 글치고는 꽤나 많은 생각과 성찰을 담아내기도 한다. 최근에 쓴 범민 일기는 다음과 같다.
제목 : 할머니, 할아버지의 특징 할아버지 할머니가 제주에 왔다. 그 분들에겐 특징이 있다. 할아버지는 성격이 특이하다. 늘 자기가 킹이고 나는 쫄자라고 말한다. 할머니는 성격이 좋다. 내가 아플 때 간호를 해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세상 모든 사람이 좋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
나는 일상의 경험에서 보편적인 사실을 끌어낸 범민 일기의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쏙 들었다. 역시 글이란 써본 만큼 느는 법이었다. 범민은 늘어가는 팔로어 숫자를 확인하고 자신을 응원해주는 분들에게 직접 댓글을 남기며 일기 쓰기의 즐거움을 느껴가고 있다. 자신을 애정으로 지켜봐주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은 일곱 살 아이가 일기를 쓰게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던가. 그 마음을 동력삼아 범민은 오늘도 일기를 써내려간다.
<덧글> 앞선 글에서 소개했던 범민의 영문법 수업은 잠정 중단됐습니다. 글을 본 많은 분들이 일곱 살 아이에게 영문법 수업은 무리일 거란 말씀을 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문법을 배우는 범민의 표정이 때로 고통스러워보였던 것도 같더군요. 제 욕심이었구나 싶습니다. 대신 범민이 좋아하는 포켓몬스터를 영문판으로 함께 읽기로 했습니다. 이 역시 걱정되는 바가 없는 건 아니지만 포켓몬의 힘을 빌려 함께 나아가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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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아나운서. 에세이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을 썼다. 6개월 동안 육아휴직을 하고 아내와 아들과 제주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