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미술대상은 2001년 제정된 미술상으로, ‘숨어 있는 소나무’라는 의미를 가진 송은문화재단의 설립자인 故 유성연 명예 회장의 뜻을 이어받아,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후원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 20여 년간 이 상을 통해 배출된 40여 명의 작가는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올해 공모에는 총 598명의 작가가 지원했으며, 예선을 거쳐 본선에 진출한 20명의 작가가 선정되었다. 이들의 야심 찬 신작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제24회 송은미술대상전》은 내년 2월 22일까지 진행된다. 2020년 세계적인 건축가 듀오 헤르조그 & 드 뫼롱이 설계한 송은의 신사옥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동시대 미술가들의 실험 정신으로 가득하다. 언급한 작품들이 모두 2024년에 제작된 최신작들이 때문에 제작연도를 표기하지 않았다.
1층 로비에서 제일 먼저 마주하는 작품은 최장원 작가의 <행려자의 파빌리온: 일시성과 가벼움에 관하여>이다. 건축과 미술의 경계를 탐구하는 그는, 고대 신전의 숭고한 기둥을 연상시키면서도 원시 오두막을 닮은 설치 작품을 통해 건축과 도시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구조물에 가까이 다가가면 표면에 새겨진 스테이트먼트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일시적이지만 추후 작업에 대한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건축과 환경에 관한 저의 단상입니다. 구조물과 함께 감상하면 더욱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영국의 테이트 모던과 홍콩의 M+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을 설계한 헤르조그 & 드 뫼롱의 건축에서 계단은 단지 이동 동선이 아니라 율동적인 역동성을 부여하는 공간이다. 로비에서 둥근 벽면을 따라 자연스럽게 2층 전시실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만들어진 오디토리움은 열린 전시 공간으로, 영상 상영이 진행된다. 탁영준 작가는 이곳에서 19세기 후반 노르웨이의 외딴 마을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러브 스토리를 그린 소설 <The Bell in the Lake>에서 영감을 받은 댄스 필름 작품 <월요일 날 첫눈에 똑떨어졌네>를 선보인다. 퀴어 정체성과 종교적 신념, 그리고 특수한 장소성이 교차하는 지점을 추적하여 영상, 조각 등으로 구체화한 이번 작품은 중세 목조 교회와 퇴역한 여객기를 배경으로 한다. 교회에서는 듀엣 안무가가 본인 부모님의 러브 스토리를 바탕으로 창작한 안무를 선보이고, 여객기에서는 그 안무를 재해석하여 구성한 겹겹의 이야기를 연출한다. 작품의 구조와 정서는 바깥 정원에 설치한 종 조각을 통해 완성된다.
2층 전시장에서는 노상호 작가의 회화와 조각이 돋보인다. 그는 <홀리-중력과 은총>이 라는 제목 아래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감각적 혼합을 주제로 두 세계의 물리적 차이를 나타내고자 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에서 만들어진, 눈사람이 불타고 있는 글리치 이미지를 통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현실에서는 눈사람이 불에 타지 않지만, 글리치 이미지는 아날로그 세계에 존재하는 우리의 현실을 더욱 강하게 인식하도록 도와줍니다.”라며 작가는 이를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신과 소통하는 고해소의 상황에 비유한다.
3층 전시장에는 디지털 시대를 재해석한 송예환과 추미림 작가의 작품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송예환 작가는 <정지된 정보의 바다>라는 설치 작품을 통해 공격적인 알고리즘과 기업의 이윤 추구로 자율 의지가 억제된 오늘날의 인터넷 사용자, 즉 ‘웹 서퍼’를 물속에 가라앉은 서퍼에 비유한다. 추미림 작가는 일상의 모든 네트워크를 가속화는 데이터에 주목하며, 이를 통해 새롭게 형성되는 도시적 감수성을 탐구한 5점의 영상 작품을 선보인다. 그는 영상 패널을 캔버스로 사용하며, “클라우드에 저장된 수많은 기억이 사라질까 늘 염려한다”라고 고백한다. “제 작품은 이러한 기억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끌어내는 작업입니다. 왼쪽에 설치된 작품은 제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계획도시로서, 도시의 구조를 한눈에 포착할 수 있는 위성지도의 시각적 요소를 조형적으로 결합하고 ‘릴스’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형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가장 고전적인 매체인 회화를 고집하는 이혜인 작가의 작품이 눈에 띈다. 그는 재래시장 골목의 가게들을 실제 스케일에 가깝도록 그렸다. 수십 년 동안 재개발을 기다리며 쇠퇴해 가는 그곳에는 손님 대신 낡은 골동품으로 가득한 주점과 밤에는 붉은 조명이 비치는 유흥업소가 있다. 작가는 공간의 시간적 축적을 캔버스에 담으며 회화를 “타인의 삶으로 들어가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지하 2층의 전시 공간은 송은 건축의 하이라이트로, 지하에서 올려다보는 보이드 공간은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디자인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1층 로비의 뚫린 천장을 통해 들려오는 작품의 사운드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승애 작가의 드로잉 애니메이션과 설치 작품 <사냥꾼들>은 특히 인상적이다. 그는 동식물의 초월적 힘에 대한 경외를 동북아시아 무속 전통과 연관 지으며, 이번 작품에서는 시베리아 설화를 탐구한다. “제가 이번에 주목한 것은 태초의 대지를 창조했다고 묘사되는 ‘새’의 모습입니다. 신의 부탁을 들어 바다 밑에서 흙을 가져와 대지를 만드는 새의 모습은 헌신적이며 고결합니다.” 작가는 땅과 하늘을 잇는 존재로서의 새의 상징성을 바탕으로, 시베리아 샤먼 복식에 수놓은 새 문양, 독수리와 여성의 형상, 그리고 동물을 영적 매개로 삼아 보이지 않는 세계와 교감하는 장면들을 드로잉 설치와 애니메이션을 구현한다. 그는 탁본을 활용하며 “영혼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의 존재를 확인하고 시각화하는 데 탁본이 가장 적합하다”라고 설명한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안동선 (미술 전문기자)
15년간 패션 매거진 <하퍼스 바자> 등에서 일했다. 현재는 미술 전문 기자로 활동하며 미술 에세이 『내 곁에 미술』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