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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의 짧은 소설] 돌이키는 하루

<월간 채널예스> 202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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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키는 하루를 끝내시겠습니까?" 버튼을 한 번 더 누르고 나는 눈을 감았다. 영영 여기에 머무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학생 때 일기장에 얼른 어른이 되고 싶다고 썼던 일을 떠올리며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2023.05.02)


그때는 이 날이 내 생애 최고의 날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돌이키는 하루' 설정 버튼을 누른 건 중학교 1학년때였다. 한가로운 수요일 밤, 방에서 혼자 창밖을 내다보며 무심코 목 뒤에 쏙 들어간 부분을 쓰다듬고 있었는데, 그러다 그 속에 있는 버튼을 손톱으로 꼭 누른 거였다. 그 즉시 삐빅, 소리와 함께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이런 멘트였겠지.

"오늘 하루를 평생 돌이키는 하루로 설정하시겠습니까? 설정 후에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도 버튼을 한 번 더 눌렀고 누르고 나서야 아, 망했다 생각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뭐, 중학생 때는 다들 미친 짓을 한 번씩 하곤 하니까.

당시에는 조금 후회하긴 했었다. 누구에게나 딱 한 번씩만 주어지는 '평생 돌이키는 하루' 기능을 이렇게 바보같이 써버리는 사람은 나 말곤 없을 것 같았다. 보통은 아껴 뒀다가 더 좋은 일이 있을 때 사용하니까 말이다. 특별히 끝내주는 하루를 보낸 날, 예를 들면 아이가 태어난 날이라든가 애인을 처음 만난 날이라든가. 하다못해 응원하는 스포츠 팀이 기가 막힌 경기를 보여준 날이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완전히 평범한 중학생의 하루라니, 이런 걸 왜 반복해서 보고 싶겠어.

하지만 서른다섯 살이 된 지금, 이제는 알 수 있다. 내 선택은 최고였다는 걸.

야근을 하고서도 일거리를 싸 들고 돌아온 새벽, 지친 몸으로 침대에 누워서 나는 목 뒤의 버튼을 누른다.

"돌이키는 하루가 시작됩니다."

이제는 낯익은 안내 음성을 들으며 눈을 감고 그날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뜬다.

엄마가 나를 깨우고 있다. "너 지금 안 일어나면 진짜 지각해!" 소리치면서. 부스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간다. 지금보다 훨씬 젊고 건강한 엄마가 뒷모습만 보인 채 부엌에 서 있다. 밥상에는 내 아침밥이 차려져 있다. 어제 저녁에 먹었던 김치찌개와 달걀 프라이. 어릴 땐 왜 몰랐을까, 누가 아침을 차려준다는 게 이렇게 감사하고 소중한 일인지를. 찌개에 밥을 말아 후룩후룩 삼키는 사이 엄마는 내 교복을 다리미대에 올린다. 아직 다리미의 뜨끈한 온기가 남아있는 교복 블라우스를 걸치고 집을 나서니 바깥은 화창하다.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드문드문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고 있다. 신발주머니를 경쾌하게 휘저으며 나도 걸어간다.

곧이어 옆 아파트와 합쳐지는 갈림길에서는 혜경이를 만날 차례다. 그다지 길지 않은 등굣길을 중학교 삼 년 내내 함께 다닌 내 절친한 친구. 나를 반기는 혜경이의 앳된 얼굴을 보니 새삼 지난 일이 후회가 됐다. 혜경이랑은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가면서 멀어졌다. 각자의 삶에 바빠 어느샌가 서로 분리되어 버렸고, 그것을 서로 탓하다 사소한 일로 다툰 뒤엔 아예 연락도 하지 않게 된 거였다. 고등학교에서 다른 친구를 사귀더라도 항상 베스트 프렌드는 우리 둘인 걸로 하자고 약속했었는데. 커서 어른이 되면 한 건물에 살면서 이 층은 내가, 삼 층은 혜경이가 쓰고 일 층에는 카페를 차리자는 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도 모르지만, 이때는 모든 걸 다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평생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던 이들과 멀어진 건 혜경이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교실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는다. 책상에는 당시 좋아하던 아이돌의 사진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이 아이돌이 나중에 성범죄자가 된다는 사실을 그땐 까맣게 몰랐었지. 목숨 걸고 좋아하던 오빠들의 사진을 노려보며 책상 서랍에 아무렇게나 쑤셔 박힌 교과서를 꺼낸다. 이날 하루를 하도 많이 반복한 탓에 수업은 달달 외울 수 있는 지경이 됐다. 1교시는 영어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은 영어 선생님이 가슴에 책을 안고 들어오자 교실은 곧 조용해진다. 이때는 정말 영어가 너무 싫었는데. 나이를 먹은 지금은 주말마다 비싼 돈을 내고 직장인 영어 회화 교실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헛웃음이 난다.

옆자리 친구와 끄적끄적 필담을 주고받으며 한창 딴짓을 하고 나면 수업이 끝난다. 쉬는 시간에는 교실 뒤로 우르르 몰려 나가 각자 뭉친다. 공기놀이와 학종이 따먹기를 하는 아이들이 바닥에 엎드리고 그 옆으로는 말뚝박기를 하는 아이들이 어느새 줄을 섰다. '포켓몬스터' 고무 딱지를 서로 교환하는 아이들도 있다. 평소 같았으면 공기놀이 패에 끼어들어 현란한 솜씨를 뽐냈겠지만 오늘은 야근 탓인지 좀 피곤하다. 한 발짝 떨어져 창가에 서서 아이들을 구경하기로 한다. 뭐가 저리 재미있을까. 소리를 질러대며 웃는 아이들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진다. 현실에서 저렇게 웃어본 게 언제였더라. 유튜브나 웹툰을 보며 피식 웃은 적은 있어도 저렇듯 온 힘을 다해서, 무언가에 완전히 빠져들어 웃어본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은 후딱 흘러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종이 치자마자 급식실로 튀어 나가는 발 빠른 남자아이들을 앞세워 나도 혜경이의 손을 잡고 뛴다. 수요일은 보통 맛있는 반찬이 나오는 날이라 아이들의 얼굴이 유난히 밝다. 치킨너겟을 튀기는 고소하고 짭짤한 냄새가 이미 3교시 때부터 풍기고 있었다. 반별로 선 급식 줄에 식판을 골라잡고 섰다. 김치콩나물국, 조밥, 오이무침, 그리고 눅진하게 불어 있는 떡볶이와 공룡 모양 치킨너겟 세 개가 식판에 올려진다. 그 위에 케첩을 스푼으로 푹 퍼서 얹으면 점심 식사가 완성된다. 도대체 왜 급식에서 먹던 맛을 집에선 낼 수 없는 걸까, 특히 달콤하고 찐득한 요 떡볶이는 어떤 양념으로도 재현할 수 없는 특유의 맛이 있단 말이지. 친구와 조잘조잘 아이돌 이야기를 떠들며 부지런히 밥을 입으로 퍼 넣는다.

어제 <연예가중계> 봤어? 걔네 진짜 사귀는 거 아니야? 

혜경이가 밥풀을 튀기며 열변을 토한다. 나는 열심히 맞장구를 쳐주지만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다. 혜경이가 말하는 그 남자 연예인은 몇 년 뒤 다른 아이돌과 열애설이 터져 일간지 일 면을 장식한다는 걸.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 남은 점심시간엔 혜경이와 매점에 간다. 메뉴는 항상 정해져 있다. 가슴이 커진다는 뜬소문 때문에 꼭꼭 챙겨 먹곤 했던 딸기우유와 나나콘이다. 작년에 왼쪽 어금니에 임플란트를 한 이후 딱딱한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고 있지만 여기서만큼은 걱정 없다. 짭짤하고 단단한 나나콘을 와작와작 씹으며 혜경이의 팔짱을 끼고 운동장을 빙빙 돈다. 소리를 지르며 축구공을 차는 남자아이들의 머리 위로, 교복 윗도리를 다 적시며 수돗가에서 물장난을 치는 아이들의 등짝으로 여름 햇빛이 내리쬔다. 아아, 아무 걱정도 없는 이 한가로운 시간. 회사에서도 점심을 먹고 나면 짧게 산책을 하곤 하지만 이때랑은 완전히 다르다. 동료들과 마음에도 없는 수다를 떨지 않아도 되고, 오후 업무를 맨 정신으로 버티기 위해 커피를 들이켜지 않아도 되는 순수한 휴식.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치고, 꾸벅꾸벅 잠이 오는 5교시도 끝난다. 담임 선생님이 종례를 마치자마자 미리 챙겨 둔 가방을 들쳐 메고 혜경이와 함께 쏜살같이 학교를 빠져나간다. 바로 옆 아파트에 사는 혜경이와 갈림길이 나올 때까지 함께 걷는다. 화두는 단연 아이돌 얘기, 그리고 친구 얘기와 부모님 얘기와 선생님 얘기. 구르는 낙엽만 봐도 자지러지는 나이라지만, 별다를 것 없이 매일 주고받는 똑같은 이야기인데도 왜 그렇게 재미있는지. 입이 아플 때까지 수다를 떨었는데도 헤어질 때의 인사는 정해져 있다. 네이트온 들어와! 갈림길 끝에서 혜경이가 웃으며 손을 흔든다.

집에 들어가면 아무도 없다. 어느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내 침대 위에 교복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놓고 거실로 나와본다. 식탁에 랩에 싸인 그릇과 함께 쪽지가 놓여 있다.

'딸, 엄마 모임 간다. 유부초밥 먹고 저녁에는 공부 좀 해'

그릇에는 먹음직스러운 유부초밥이 잔뜩 쌓여있다. 집에 돌아오면 음식이 준비되어 있다니! 매번 보는 광경이지만 매번 감탄하며 나는 랩을 벗긴다. 그릇을 통째로 들고 컴퓨터 앞으로 간다. 아무리 바빠도 빼먹을 수 없는 중요한 하루 일과, 친구들의 싸이월드 순회와 일촌 파도타기를 잊을 순 없지. 유부초밥을 집어 먹은 끈적한 손으로 키보드를 누른다. 네이트온에 접속하자 기다렸다는 듯 혜경이의 채팅이 도착한다.

'혜경이 왔어요 뿌우~'

나는 킬킬 웃는다. 그래 그래, 지금은 괴상하게 들리지만 이때는 이런 말이 유행했었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싸이월드 삼매경에 빠진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이들이 다양한 일촌명을 달고 미니룸 안에서 웃고 있다. 살펴보니 드문드문 기억나는 이름이 있긴 하다. 

얘는 일찍 결혼했다 이혼했다던데

그리고 얘는 술장사를 한다고 들었고...

그러다 보니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다. 도어록 누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컴퓨터를 꺼버리고 책상에 앉았지만 소용없다. 방에 들어온 엄마가 컴퓨터 본체에 손을 얹어보고는 뜨끈뜨끈하구먼, 하며 등짝을 내리친다. 아 엄마, 진짜 좀 전까지 공부하고 있었어! 변명해 보지만 소용없다. 

이윽고 저녁상이 차려진다. 무를 넣고 조린 고등어, 엄마의 특제 왕달걀말이가 차려진 밥상에 나는 기쁘게 다가앉는다. 아직 화장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묵묵히 밥을 떠 넣던 엄마가 나를 보고 묻는다. 오늘 학교는 어땠어? 하고. 뭐, 맨날 똑같지. 나는 무심히 대답하지만 속으로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누가 이렇게 나한테 매일 물어봐 줬으면 좋겠다, 오늘 하루가 어땠느냐고.

저녁상을 물리고 나선 엄마가 설거지하는 소리를 들으며 텔레비전을 켠다. 물론 오늘의 텔레비전 프로는 다 외우고 있다. 뭘 볼까,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니 익숙한 연예인들의 지금보다 훨씬 젊은 얼굴이 휙휙 지나간다. 그때 또다시 도어록 소리가 들린다. 아빠다! 나는 뛰어나간다. 술에 취해 얼굴이 벌건 아빠가 비틀거리며 구두를 벗고 있다. 오오 우리 딸 하고 아빠가 팔을 벌리는 것보다는 아빠가 들고 있는 검은 비닐봉지에만 관심이 있다. 왜일까, 아빠들은 꼭 술에 취하면 아이스크림을 사 오곤 하는 건. 거기 들어 있는 아이스크림이 뭔지도 당연히 알고 있지만, 나는 봉지를 벌려보고 괜히 한번 볼멘소리를 해본다. 

메로나, 바밤바, 붕어싸만코! 순 아빠 좋아하는 것만 사 왔어! 

아빠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소파에 펄썩 앉고는 리모컨을 빼앗아 간다. 뉴스를 틀고는 조금 보는 것 같더니 금세 앉은 채로 잠이 든다. 엄마가 혀를 차며 아빠의 양말을 벗겨준다. 나는 메로나를 하나 물고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간다.

창문을 연다. 어릴 적부터 써온 낡은 책상이 있는 정겨운 내 방 안으로 여름 저녁의 공기가 밀려 들어온다. 아파트 어딘가에 심어져 있는 라일락 향기와 오늘 낮 내내 데워졌다 천천히 식어가고 있는 열기가 섞여 향기롭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이때는 정말로 몰랐다. 아무 걱정도 없이 순수한 즐거움만 가득 있었던 오늘 하루, 앞으론 이런 하루를 다시는 보낼 수 없는 때가 곧 온다는 걸. 미치도록 가기 싫은 곳을 내 발로 가고 죽도록 하기 싫은 일을 웃으며 해야 하는 삶이 내 것이 되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젠 그 삶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눈으로는 계속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목 뒤를 더듬었다. 버튼을 꾹 누르자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돌이키는 하루를 끝내시겠습니까?"

버튼을 한 번 더 누르고 나는 눈을 감았다. 영영 여기에 머무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학생 때 일기장에 얼른 어른이 되고 싶다고 썼던 일을 떠올리며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눈을 떴다. 서른다섯 살의 내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는 뒷목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밀린 일을 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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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유리(소설가)

소설가. 식물과 고양이를 사랑하고 싱그러운 기운이 가득한 소설을 쓴다. 문학 플랫폼 <던전>의 운영진으로 활동했고 『괴담』, 『인어의 걸음마』에 표제작을 수록하는 등 여러 SF 앤솔러지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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