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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의 짧은 소설] 오 분 동안
<월간 채널예스> 2023년 2월호
이 창 밖 풍경을 보면 말야. 꼭 이 세상에 우리만 남은 게 아닐까 싶어. 사실은 모두 이미 죽은 거야. 대재앙 때. 우리만 운 좋게 살아남은 거지. (2023.02.06)
"유미야?"
"응. 나 여기 있어."
"옆에 라디오 있어? 있으면 좀 켜 봐."
"잠깐만 시계 좀 만져 보고. 에구, 벌써 열두 시가 다 됐네. 켤게."
— 이어서 오늘의 바이러스 오염 수치를 알립니다. 오늘 오후의 오염 수치는 어제에 이어 98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자정까지, 안전고글을 착용한 경우 65분 가량, 안전고글을 착용하지 않은 경우 5분 가량 눈을 뜰 수 있겠습니다. 오늘 바람의 방향에 따라 대기 오염이 가장 낮은 5분은 저녁 8시 35분부터 40분까지로 추정되며, 이는 실외와 실내를 가리지 않고 적용되는 기준입니다. 해당 시간에는 사이렌으로 알려 드릴 예정이므로, 이외의 시간에 국민 여러분께서는 시력 보호에 특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눈으로 침입하는 이 바이러스에 인체가 견딜 수 있는 시간 이상으로 노출될 시 치명적인 —
"됐어, 꺼."
"...안전고글 있는 사람들은 좋겠다."
"그러게 우리도 하나 사자니까."
"무슨 돈으로 사냐."
"…"
"바깥에 구호 물품 와 있나?"
"그런 것 같아. 뭔가 문 앞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어."
"내가 지금 가 볼게."
"아! 내 발 밟았어."
"에고, 미안."
"문 열 때 조심해. 라디오 들었지? 안전고글 쓴 강도단 얘기."
"어떤 멍청한 강도가 우리 집을 털겠냐. 털어 봐야 즉석밥이랑 스팸만 있을 텐데."
"그래도 조심해."
"조심하는 게 뭔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웃으라고 한 말 같은데 왜 안 웃기냐."
"오, 정말 뭐가 와 있네. 묵직한 걸 보니 구호 물품 맞는가 보다. 어휴, 뭘 귀한 거라고 이렇게 꽁꽁 싸매 놨대. 거기 칼 있어?"
"응, 여기. 조심해."
"뭘 자꾸 조심하래.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구만."
"뭐뭐 들었어?"
"보자, 즉석밥이랑, 생선 퓨레인 것 같고, 이건 부스럭거리는데 라면인가? 과자인가? 그리고 이건 가루 우유 박스겠고."
"무슨 맛일려나? 초코맛이었으면 좋겠다. 제발."
"난 딸기가 더 낫던데."
"아, 김치찌개에 계란말이 먹고 싶다. 따끈한 밥에."
"나도. 우리 예전에 갔던 그 식당 기억나? 수미네 집 근처에 있던 거기."
"기억나지. 그게 벌써 언젯적 일이냐. 대재앙 한참 전 일이니까."
"그러고 보니 수미네 고양이랑 수미는 잘 있을까."
"코코? 코코는 아마... 음."
"수미는? 수미는?"
"수미는 잘 살고 있을 거야. 애가 워낙 야무졌잖아. 구호 물품 알뜰하게 아껴가면서 잘 버티고 있겠지."
"하긴, 수미네는 입이 하나니까."
"너 지금 내가 많이 먹는다고 탓하려는 거지?"
"아하하! 간지럽히지 마. 그런 거 아니었어."
"수미네 고양이 진짜 귀여웠는데."
"맞아. 복슬복슬 따뜻하고."
"착하고 애교있고."
"좋은 곳에 있을 거야."
"어디든간에, 여기보단 낫겠지."
"원아?"
"응, 나 여기 있어."
"진짜 거기 있지?"
"그럼, 당연하지."
"라디오 좀 켜 봐. 심심하다."
"전기 아껴야 돼. 어제 보니까 이번달 거 얼마 안 남았더라."
"그럼 아무 얘기나 해 줘."
"무슨 얘기?"
"대재앙 전 얘기. 아무거나."
"음, 그럼... 우리 바닷가 갔던 얘기 해 줄까."
"그거 너무 많이 들었어. 좀 웃긴 걸로 해 줘."
"음, 그러면 예전에 너 술 취해서 사탕 껍질 밟고 넘어졌을 때."
"그건 너만 웃긴 얘기잖아."
"너 그때 흉터 아직도 있지 않아?"
"허벅지에. 아, 책이나 읽을까. 참, 어제 내가 읽던 점자책 못 봤어?"
"그 책 여기 어디쯤에 있어. 내가 읽었어."
"제자리에 좀 갖다 놓으라니까. 아까 엄청 오랫동안 더듬거리면서 찾았단 말야."
"미안 미안. 자, 찾았다. 여기."
"아, 땡큐."
"나도 책이나 읽을까. 심심해 죽겠어."
"책 이거 한 권밖에 없잖아. 너 읽을래? 나 이따 읽을게."
"아냐, 됐어."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인생을 즐길 걸 그랬어. 더 놀러 다니고, 더 맛있는 것도 먹고."
"대재앙 전에도 우리 많이 놀러 다녔잖아."
"더, 더 놀았어야 돼. 이렇게 눈도 못 뜨고 살 줄 알았다면. 이게 뭐야 진짜."
"만약에 이거 다 끝나면... 아니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어디 가고 싶은데?"
"해외! 아니다 국내부터. 온천 가고 싶어. 때 싹 벗기고. 노천탕에서 바나나우유 먹고 싶다. 그리고 영화관도 가고 싶어. 팝콘에 콜라 쫙쫙 마시면서 영화 한편 때리고 싶네. 화끈한 액션 영화로. 영화보고 나온 담엔 알지? 집에 와서 치킨 시켜놓고 나무위키에 영화 찾아보는 거."
"어째 다 먹는 거랑 겹쳐 있냐 넌."
"인간의 본능이지 뭐. 넌? 뭐 하고 싶은데?"
"난, 그냥 너 보고 싶어. 시간 안 재고.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뭐야, 갑자기 느끼하게."
"그냥, 그러고 싶다 난."
"사실 나도 그래."
"에이, 이미 늦었어."
"킥킥킥."
"크크크."
"유미야."
"응, 나 여기 있어."
"원아, 점자 시계 어디다 뒀어?"
"내 옆에 있어. 지금 몇 시냐면 어... 일곱 시 삼십팔 분."
"아직 멀었네. 지겨워."
"라디오라도 듣자. 전기 없으면 난방을 좀 아끼면 되잖아."
"알았어, 알았어."
— 유종환 김수희의 '그땐, 그땐, 그땐'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 보내드릴 곡은 대재앙 직전에 가장 사랑받았던 곡 중 하나죠, 목형규의 '사랑은 언제나 여름비처럼' —
"아 나 얘 딱 싫더라."
— 대학 바이러스생명공학과 김형준 박사님 모시고 이야기 듣겠습니다. 박사님, 현재 오염 상태는 어떤 —
— 안전고글은 삼일! 가볍고 튼튼한 삼일 안전고글로 안전한 생활 —
— 폭발을 일으킨 제3생화학무기공장 책임자의 처벌과 정부의 후속 대처를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시위 희생자는 육백서른세 명으로 늘었습 —
— 사연 보내 주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경기도에 살고 있는 스물한 살 박은비라고 합니다.
"오, 이거 듣자."
— 대학에 입학한 지 일 년이 채 안 됐을 때 대재앙이 터졌습니다. 이제 막 얼굴을 익힌 친구들이 이제는 이름도 가물가물하네요. 모든 것이 올스탑된 일상 속에서 겨우 하나 마련한 안전고글을 온가족이 돌려 쓰고 있습니다. 저희는 세 가족이라 하루에 삼십 분 정도씩 쓸 수 있는데 그래서 이 사연도 급하게 쓰느라 횡설수설하네요. 대재앙 직전에 친구들과 엠티를 가기로 했었는데, 이제는 개안 금지가 풀린다고 해도 어디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바깥은 전부 황폐해졌으니 말이에요.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산으로, 바다로 놀러 갈 수 있는 날이 오겠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펜을 놓습니다.
"그래도 얘네 집은 좋겠다, 안전고글 있고."
"그러게. 대학 생활도 일 년이지만 해 봤고. 할 거 다 했네 뭐."
— 네, 박은비님 사연 잘 들었습니다. 은비님 말씀대로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박은비님 댁으로 즉석 반찬 5종 세트 보내드릴게요. 그럼 다음 사연 —
"즉석반찬 5종이래. 뭘까?"
"뭐, 마른반찬 같은 거겠지. 이제 끈다. 전기 아끼자."
"응."
"원아?"
"응, 나 여기 있어."
"몇 시야? 시간 다 되지 않았어?"
"어, 그러게. 보자... 여덟 시 삼십사 분이야!"
"앗, 놓칠 뻔했잖아! 시계 잘 만지고 있으라니까."
"미안. 초 셀게. 삼십사 분 사십 초, 사십일 초, 사십이 초..."
"아, 드디어 눈 뜬다! 나 벌써 안대 풀 준비 다 했어."
"오십삼, 오십사, 오십오, 오십육, 오십칠, 오십팔, 오십 구!"
이윽고,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렸다. 원과 유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곧바로 눈시울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핑 돌았지만, 둘은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힘주어 눈을 더 크게 뜨며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부터 찾았다. 둘 다 눈 언저리에 보호 안대 자국이 시뻘건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상대방의 부스스하고 꾀죄죄한 얼굴을 원과 유미는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 원이 이렇게 생겼었지."
"야, 하루에 한 번은 보는데 뭘 잊어버린 것처럼 말해."
"나만 그래? 눈 감고 있으면서 네 얼굴 생각하면 자꾸 조금씩 바뀌어. 기억이 마음대로 조작되는 것처럼. 그러다가 이렇게 눈 뜨고 보면 그래, 이렇게 생겼었지 싶은 거."
"하긴 나도 그래. 우리 유미 이렇게 생겼었지. 동글동글 토실토실."
"야, 토실토실은 빼."
둘은 손을 마주잡으며 동시에 시계를 보았다. 점자와 디지털이 함께 붙어 있는, 대재앙 이후 출시된 시계는 벌써 일 분이 지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앗! 사 분밖에 안 남았어. 뭐 할래? 빨리 뭔가 하자."
"음, 창 밖을 보자. 창 밖이라도 볼래."
"그래, 가자."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창가로 걸어갔다. 원이 커튼을 열었다. 황량한 거리가 드러나며 태양광 가로등 빛이 쏟아져 들었다. 흐릿한 빛이었지만, 어둠에 눈이 익은 두 사람은 동시에 눈가를 찌푸렸다.
"뭐 보여?"
"아니."
유미가 창문에 바짝 붙은 채 말했다. 유미의 입김이 창문에 뿌연 얼룩을 만들었다. 손차양을 한 원이 유미 옆에 서서 먼 곳을 내다보았다. 지나가는 사람, 차 한 대 없는 텅 빈 거리엔 이미 예전에 말라죽어 을씨년스러운 나무등걸만 남은 가로수들이 귀신처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등걸을 뿌연 안개 같은 것이 감싸며 휘돌고 있었다. 아마도 유독한 바이러스가 가득할 밤바람이.
"맨날 보는데 맨날 똑같아."
"맨날 똑같은데 왜 맨날 보자고 하냐."
"그러게. 근데 있잖아."
유미가 원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이 창 밖 풍경을 보면 말야. 꼭 이 세상에 우리만 남은 게 아닐까 싶어. 사실은 모두 이미 죽은 거야. 대재앙 때. 우리만 운 좋게 살아남은 거지."
"나도 그런 생각 하는데."
원이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유미가 창문에서 물러서자 원이 커튼을 다시 닫았다. 그것을 신호로,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눈을 꼭 감고 잡았던 손을 놓았다. 이제부터 손은 앞을 더듬는 데 써야 했으므로.
잠시 후, 사이렌이 다시 한 번 길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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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식물과 고양이를 사랑하고 싱그러운 기운이 가득한 소설을 쓴다. 문학 플랫폼 <던전>의 운영진으로 활동했고 『괴담』, 『인어의 걸음마』에 표제작을 수록하는 등 여러 SF 앤솔러지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