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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의 짧은 소설] 다른 이야기

<월간 채널예스> 202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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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출근한 오후, 슬슬 배가 고파져 남은 찌개나 데워 먹을까 하던 참이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하며 인터폰을 바라보았는데 거기 내가 서 있었다. (2023.03.13)


남편이 출근한 오후, 슬슬 배가 고파져 남은 찌개나 데워 먹을까 하던 참이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하며 인터폰을 바라보았는데 거기 내가 서 있었다. 

"나야." 

문 바깥에서 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비비고 인터폰 화면을 다시 보았다. 화질이 별로 좋지 않은 작은 네모 화면으로 보아도 저건 분명 내가 맞았다. 인터폰을 똑바로 바라보는 습관까지도. 나는 현관으로 걸어가 문에 달린 동그란 구멍으로 바깥을 한 번 더 내다보았다. 나는 혼자 있는 것 같았다. 망설이다가, 나는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성큼 현관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조금만 둘러보고 갈게." 

나는 다짜고짜 신발을 벗고는 올라섰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나는 거실로 들어가는 나의 뒷모습을 살폈다. 나는 깃 주변에 너구리 털 같은 것이 두껍게 달린 카키색 점퍼에 펑퍼짐한 검은 바지, 그러니까 내가 절대로 입지 않을 법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저 단발머리는 뭐람, 안 그래도 튀어나온 광대뼈가 더 도드라지잖아. 나는 못마땅한 눈치를 팍팍 드러내며 나를 쳐다보았는데 나도 마찬가지로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구질구질하게 사네." 

집 안을 휙 둘러본 내가 그렇게 말하고는 소파에 펄썩 기대듯 앉았다. 툭 내던지는 말투는 물론이고 그 앉는 모양새가 나랑 너무 똑같아서, 나는 기분이 나쁜 와중에도 저 모습을 기억해 두었다. 저렇게 앉으니 정말 볼썽사납구나, 앞으로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남편은? 아직도 같이 살아?"

"... 출근했어." 

"회사는 어디 다니는데? 아직도 그 조그만 인쇄 회사 다녀?"

"응." 

나는 더더욱 못마땅한 표정이 되더니, 길게 길러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을 소파 테이블에 딱딱 두드리며 입을 비죽거렸다. 내가 젊었을 때 자주 짓던 표정인데 남편과 살기 시작한 이후로 없어진 버릇이었다. 다툴 때 저 표정을 지으면 잠깐 말다툼으로 끝날 것이 하루 종일 가는 대형 싸움이 되곤 했기 때문이었다. 

"난 결혼 안 했어."

입을 비죽이는 내가 말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둘로 나뉘었는지 깨달았다. 결혼부터구나. 그렇다면 내가 찾아온 건 나 때문인지도 모른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나는 부쩍 결혼 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딱히 남편과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 때문에 접어야 했던 꿈이라거나 특별난 불만 따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먼저 결혼한 친구들은 내게 자신들도 그랬다며, 지금쯤 그런 생각이 슬슬 드는 시기라고들 말했다. 물론 그런 말을 나에게 하지는 않을 거였다. 이미 탐탁잖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내가 그런 얘기를 들으면 뭐라고 할지 뻔했으니까. 시침을 딱 떼고 나도 소파에 앉으니 내가 툭 말했다.

"커피라도 줘." 

"커피 끊었어. 남편이 위궤양 생겨서."

"남편이 위궤양인데 네가 왜 커피를 끊어." 

건수라도 잡았다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나는 입을 딱 다물었다. 구차한 변명 대신 찬장 깊숙이 숨겨두었던 믹스커피를 꺼내 왔다. 두 봉을 툭툭 털어 한꺼번에, 물은 아주 조금만. 커피가 아니라 걸쭉한 젤리같이 된 그것을 나는 호록호록 소리를 내며 맛있게도 마셨다. 

"역시 내 취향을 잘 아네." 

"잔소리는 됐고, 돌아가. 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안 그래도 이것만 마시고 갈 거야. 볼 건 다 본 거 같으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커피잔을 든 채 일어서더니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이것저것을 살펴보았다. 텔레비전 위에 걸린 결혼사진을 보고는 드레스가 촌스럽다고 평했고, 식탁 의자를 덮어둔 손뜨개 방석을 갖고는 아직도 실력이 형편없다고 했다. 

"뜨개질할 시간이 있는 거 보니 한가한가 보네."

"한가하긴, 나도 바빠." 

"남편 수발드느라?"

빈들빈들 웃으며 비꼬는 말에 짜증이 버럭 났다. 나도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그러는 너는 뭐 하고 사는데? 너도 너 사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여기 와본 거 아냐?"

"마음에 안 들긴, 난 엄청 행복한데."

나는 다 마신 커피잔을 싱크대에 갖다 놓으며 노래하듯 말했다.

"회사 다니면서 내 밥벌이는 하고 살아. 고양이도 키우고, 주말엔 테니스도 치고. 넌 그런 거 못 하지? 네 남편은 연애할 때도 운동이라면 질색하는 샌님이었으니까."

나는 뭐라고 쏘아붙이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알 수 있었다, 저건 나였으니까. 내가 저렇게 못되게 말할 때는 마음속이 이미 문드러질대로 문드러진 이후였다. 입으로 뱉는 것이 말이 아니라 독이라는 걸 알면서도 제어하지 못하고 나오는 대로 떠들고 나서야 너무 심했나하고 찔끔 후회하는 나쁜 습관. 잘 알지, 그럼 그럼. 나는 이미 무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아무튼, 다 마셨으니까 갈게. 커피 고마웠어."

나 역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챘는지, 나는 내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벗지도 않았던 외투를 한번 고쳐 입고는 그대로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나를 따라가며 말했다.

"또 와. 어떻게 왔는진 모르겠지만." 

현관문을 잡은 내가 말했다.

"안 올 거야."

그러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이윽고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타닥, 타닥 들렸다. 멀쩡한 엘리베이터를 놔두고 계단으로 다니는 버릇까지 나랑 똑같구나, 아니 저건 나니까 어쩔 수 없나. 나는 방금까지 내가 앉아 있던 소파에 앉았다.(털썩 기대지 않도록 주의했다) 보자, 내가 결혼한 지 올해로 오 년째니까 나는 남편과 헤어진 지 오 년이 되었겠구나. 그렇다면 그 후로 다른 애인은 없었던 걸까. 아마 있었을 것이다. 나라면. 그다지 매력적인 편은 아니지만 기묘하게도 연애는 척척 잘하곤 했으니까. 아무튼 뭐가 잘 안된 건지, 아니면 그렇게 마음을 먹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결혼은 하지 않은 듯하지. 남편과는 왜 헤어졌을까, 생각하다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당장 떠오르는 이유만도 수십 가지가 넘었기 때문이었다. 자기 전에 양치질을 하지 않아서, 보리차를 다 마시곤 빈 병을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 두어서, 룸살롱 상호가 대놓고 찍힌 라이터를 무심하게 사용해서, 자동차 조수석에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던져서 나는 남편과 헤어지고 싶었었다. 그중 이별 사유는 뭐였을까. 아니면 저 모두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왜 저 모든 이유를 내버려두고 남편과 결혼했을까. 처음으로, 나는 내가 왜 이 사람과 결혼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입맛이 비슷해서였던 것 같다고. 사실 그건 취향이 비슷하다기보다 남편의 식성이 무딘 것에 가까웠지만, 내가 좋아하는 곱창이며 닭발, 육회 같은 것들을 남편도 즐겼고 먹는 것에서만큼은 우리는 쿵짝이 꽤 잘 맞았다. 매운 것과 단것도 잘 먹어서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을 때 함께 먹을 수 있었다. 그땐 그게 좋다고 생각했었다. 입맛이 비슷하면 세계관도 인생관도 비슷하게 마련이라고 믿었고 그런 것들이 비슷한 두 사람은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정말로 잘 지냈느냐 하면, 뭐 못 지낸 건 아니지만.

나는 이미 돌아가고 없는 나에게 방금 한 생각을 말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왜 결혼했느냐면, 입맛이 비슷해서야. 아마 나라면 이해해 주려나. 물론 나니까 나를 이해하겠지만 분명 겉으로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이 세상에 또 있느냐며 쏘아붙였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그런 것도 같았다. 결혼이란 뭔가 더 운명적이고 타당한 근거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내 앞으로의 생에 이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으리라는 그런 확신이랄까 무모함이랄까가 있어야 했던 거 아닐까. 그런 게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남편에게는 있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본래 남편은 무딘 입맛만큼이나 무뚝뚝한 사람이라 간지러운 애정 표현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남편은 계산적인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프러포즈를 하기 전엔 그런 계산쯤은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더 나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 확률, 이 여자와 결혼해서 만족스러운 삶을 누릴 수 있는 확률, 기타 등등 이것저것에 대해서. 그렇다면 나는 남편의 테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면)를 통과한 셈이었다. 나는 테스트 따위 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화가 났다. 여전히 계산이 느리고 속셈이 없구나 나는. 아까 찾아온 내가 괜히 성질머리를 부리고 간 것은 그 때문이었나. 아니, 지금 없는 속셈이 결혼을 안 했다고 해서 생길 것은 아니었으므로 아마 단발머리 나 역시 비슷할 테지. 

그렇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결혼하지 않은 채로 속셈이 없는 나는.

나는 저녁까지 그대로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했다. 그러느라 저녁 식사를 준비하지 못한 건 물론, 돌리고 있던 빨래며 다림질을 하려고 꺼내두었던 다리미며 전부 그대로 놓아둔 채로 해가 저물고 말았는데 남편이 돌아오며 현관문 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 벌써 시간이...'하고 생각했다.

"뭐 하고 있어? 불도 안 켜고."

남편이 거실에 불을 켜며 말했다. 

"어, 미안.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무슨 생각?"

"아냐, 좀. 아무튼 저녁 준비도 못 했네."

"시켜 먹지, 뭐." 

남편은 무심히 말하며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었다. 지하철이 더웠는지 땀이 좀 배어 있는 남편의 이마가 오늘따라 유난히 넓게 보였다. 머리숱이 줄어들긴 했지, 저 사람. 나는 남편이 아무렇게나 소파에 걸쳐놓은 겉옷을 옷걸이에 걸며 생각했다. 옷을 걸어두고 나와보니 남편은 어느새 팬티 바람이 되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배달 앱을 보는지 휴대폰을 슥슥 넘기다가 물었다. 

"배고파. 뭐 시킬까?" 

"여보, 그런데 있잖아." 

나는 갑작스럽게 말했다. 남편은 여전히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어어, 대답했다. 나는 남편 곁에 다가앉았다. 

"오늘 있잖아, 집에."

내가 찾아왔는데 단발머리를 하고 있더라고... 이 말을 막 하려던 참이었다. 나는 문득 입을 다물고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생각했느냐면 사실은 남편의 뚱뚱한 엄지손가락이나 싱크대에 아직 그대로 놓여 있는 커피 마신 컵, 아까 소파에 눕듯이 앉았던 나의 화장기 없는 얼굴 그런 것들을. 그래,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내 입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잡상인이 왔다 갔어."

"잡상인?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어?" 

남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문 안 열어줬지?" 

"응, 가만히 있으니까 돌아가더라."

남편이 휴대폰을 내밀며 '어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주 시켜 먹곤 하던 곱창볶음 가게의 메뉴가 띄워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왠지 앞으로도 이렇게 평생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 정도쯤이야. 나는 속으로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의 휴대폰에서 띠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문을 완료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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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유리(소설가)

소설가. 식물과 고양이를 사랑하고 싱그러운 기운이 가득한 소설을 쓴다. 문학 플랫폼 <던전>의 운영진으로 활동했고 『괴담』, 『인어의 걸음마』에 표제작을 수록하는 등 여러 SF 앤솔러지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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