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외로운 자들을 홀로 두지 말아요 (G. 천선란 작가)
책읽아웃 - 김하나의 측면돌파 (193회)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거기만 가면 남들은 잘 경험하지 못했던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느낌이 나요. 세상이랑 다 완벽하게 차단된 곳이라서. 그래서 ‘이런 배경으로 소설을 한 번 써봐야겠다’ 싶었어요. (2021.06.24)
완다는 그리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립다는 것은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고, 돌아가고 싶다는 것은 현재에 없다는 것이고, 현재에 없다는 것은 있어야 할 공간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이고, 텅 비어 있다는 것은 그 자리가 춥고 쓸쓸하다는 것이다. 그리운 것들이 많으면 그만큼 현재는 춥고 쓸쓸해질까. 그렇다면 누군가의 세상은 겨울뿐일 것이다. 언제나 춥고 쓸쓸하니까. 완다는 뱀파이어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그 피부가 얼음처럼 차가운 것이 그리워할 대상이 많아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뱀파이어는 홀로 켜진 전구 밑에 쌓인 죽은 날벌레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떠나보냈을 것이다. 완다는 문득 슬퍼졌다.
천선란 작가의 소설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속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오늘 모신 분은 21세기 한국의 SF 소설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입니다. 단단한 주제의식과 진한 여운이 담긴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죠. 천선란 작가님입니다.
김하나 : 제가 듣기로 (천선란이라는 이름이) 필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이름을 지으신 배경을 말씀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천선란 : 일단 저의 본명이 너무 흔해서 필명을 꼭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필명 여러 개를 생각해보다가 가족들 이름에서 하나씩 따오면 좋겠다 싶어서 한 글자씩 따오게 되었습니다.
김하나 : 아까 제가 사인을 부탁드렸을 때 손가락에 보니까 ‘란’자가 타투가 돼 있던데, 그러면 ‘란’자는 어느 분으로부터...?
천선란 : 엄마 이름에서 나왔어요.
김하나 : 그렇군요. (필명은) 만족하시나요? 내 필명 같다, 이런 생각이 드시나요?
천선란 : 네, 일단 독자 분들께서 이름이 굉장히 SF랑 잘 어울린다고 해주셔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김하나 : 맞아요. 묘하게 어감에서 오는 SF적인 느낌이 있어요. SF를 다루고 우주가 등장하거나 뱀파이어나 존비가 등장하거나 하는 데에 그런 우주 같은 느낌과 인천이나 과천, 한국을 배경으로 한 것 같은 느낌이 이름에 잘 표현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의도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선란 : 네, 의도 안 했지만 감사합니다. (웃음)
김하나 : 오늘 스튜디오에 오실 때 두 분과 함께 오셨어요.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가 안전가옥 오리지널 시리즈로 출간된 작품인데, 안전 가옥은 신기하더라고요. 오늘 오신 두 분도, 보통은 편집자나 마케터가 오시는데, PD님 두 분이 오셨습니다. 안전가옥 오리지널 시리즈로 이번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를 쓰실 때는 이전의 집필 경험과는 좀 달랐나요?
천선란 : 네, 많이 달랐습니다.
김하나 : PD님들과 협업처럼 되는 건가요?
천선란 : 네, 같이 이야기 의논하고 약간 트리트먼트를 먼저 짜는 과정을 시작했어요.
김하나 : 그러면 그 과정이 낯설거나 신선하거나, 또는 힘들다거나 다음에는 어떤 방향으로 해 봐야겠다 거나, 이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드셨나요?
천선란 :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명이서 같이 붙어서 한다는 게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내가 쓰고 싶고 내가 이렇게 써야 더 잘 써질 것 같은데, PD님들이 이렇게 하면 인물들의 성향이 안 나타난다거나 이야기가 작위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는 피드백을 해주시는데, 어디까지 수용을 하고 어디까지는 내 고집을 가지고 가야 될까 라는 게 제일 힘들었고. 근데 확실히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세 명의 생각이 들어가니까 제가 놓쳤던 부분들을 많이 찾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끝에는 좀 힘차게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일단 가장 가까운 독자 두 분이 응원을 해 주시니까 쓰면서는 재미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김하나 : 중간에 ‘나 힘들어요, 못하겠어요’라고 했을 때도 두 분이 응원을 해 주시기도 하고 ‘이 뒤가 궁금하다, 꼭 완성시켜 달라’ 이런 응원(cheer up) 같은 게 있었군요.
천선란 : 네. 그리고 뭔가 셋이서 함께 침묵을 했던 시간들이, 그런 기억들이 많이 납니다. (웃음)
김하나 : 그러면 침묵을 했던 순간이 언제쯤 찾아왔었나요? 생각나는 한 부분만 말씀을 해 주신다면?
천선란 : 제가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는 크게 세 번을 다시 썼어요. 거의 처음부터. 근데 두 번째쯤 다시 쓸 때 커다란 회의실에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어떤 이유 때문에 한 10분 정도의 침묵이 있었고. (웃음) 10분 끝에 마지막 버전을 다시 쓰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때가 제일 많이 생각이 나요.
김하나 : 이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글을 혼자 써나가는 것도 정말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때는 내가 판단하고 내가 책임진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쓸 거야, 이렇게 판단을 한다면. PD님들과 함께 일을 하게 되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는 것도 너무 중요한 요소가 되고, 내가 혼자 쓰는 게 아니니까, 책임 소재도 내가 고집하는 만큼 책임이 더 가중되는 것이고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은데요. 또 한편으로는 요즘은 웹툰 산업이라든가 어떤 영상물을 제작한다거나 할 때는 글을 작업을 할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협업을 하잖아요. 그래서 이 협업을 통해서 작가로서 내 이야기를 쓰는 것과는 다른 경험을 쌓게 되시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도 이런 작업을 다시 더 해보실 의향은 있으신가요?
천선란 : 이 작업을 통해 제가 기획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웃음) 역으로 PD님들에게 다음에는 이런 거 해 보고 싶다고 방금 전에도 말씀드리고 왔거든요. 기획안을 써서 드리겠습니다, 라고. (웃음)
김하나 : 나 쓰는 거 싫다, 쓰는 거 너무 노가다인 것 같다, 기획을 해서 던지겠다. (웃음) 내 갈 길을 찾은 것 같다. (웃음)
천선란 : 적성을 찾은 것 같습니다. (웃음)
김하나 : 이번 작품이 탄생한 과정이 궁금한데요. 이 작품의 배경은 인천에 있는 철마 지역의 재개발 단지에 있는 재활병원을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서 연이은 자살 사고가 있고 이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들의 이야기로 시작이 되는데요. 이전에 ‘실종자 수 0명’이라고 하는 작품으로 공모전에 응모를 하셨다가 떨어진 후에, 이것이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로 다시 태어났다고 들었는데요. 어떻게 된 사연인지 말씀을 좀 부탁드릴게요.
천선란 : ‘실종자 수 0명’도 안전가옥 오리지널 시리즈에 냈었다가 떨어졌는데, 같이 이 작업을 해 주셨던 스토리 PD님께서 따로 연락을 주셔서 ‘이 이야기를 계속 개발을 해보고 싶다’고 하셔가지고 같이 이야기를 꾸려나가게 되었습니다.
김하나 : 그러면 ‘실종자 수 0명’도 병원을 배경으로 했다는 기본 골조는 비슷한 거로군요.
천선란 : 네, 그거 하나만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웃음)
김하나 : 사실 작가님이 다 엎고 새로 쓰는 거 잘하시잖아요. 전적을 제가 알고 있기 때문에...(웃음)
천선란 : 아, 네. (웃음)
김하나 :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였죠. 제가 오늘 『천 개의 파랑』을 가지고 왔는데, 만약에 천선란 작가님의 세계에 대해서 아직 모르고 계신 청취자님들이 계시다면, 저는 『천 개의 파랑』으로 입문을 하는 게 정말 좋지 않을까 싶어요. 어떤 학습이라든가 이 작가에 대한 뭔가를 알기도 전에 정말 쭉쭉 시원하게 읽히는 책이라서 그런데, 너무 놀랍게도 이 책을 집필하신 기간이 그렇게 짧다면서요?
천선란 : 네, 한 3주 정도 썼습니다.
김하나 : 그냥 쓰는 것만 해도 3주가 될 텐데, 『천 개의 파랑』이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수상작이잖아요. 그런데 응모를 하시기 직전까지 아주 방대한 작품을 써두셨다가 갑자기 엎고 이 소설을 쓰시게 됐는데, 이 얘기를 좀 들려주세요. 궁금해요.
천선란 : 원래는 스페이스 오페라처럼 ‘이게 진짜 짱인 SF다’ 그런 마음으로 한 작품을 쓰고 있다가, (웃음) 거의 다 완성을 해서 다시 읽는데, 재미는 있었지만 작가가 뭘 얘기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제가 이 소설에 어떤 감정을 넣고 싶은지도 모르겠어서 ‘이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김하나 : 너무 방대한 걸 호기롭게 써나가다가 약간은 길을 잃은 느낌이 드셨나 봐요.
천선란 : 네, 약간 멋 부리는 느낌만 나서. 그래서 사실은 아예 포기를 했어요. 한 달 정도밖에 안 남아서 포기를 하다가, 그때 마침 정세랑 작가님이 어떤 유튜브 채널에 나오셔서 ‘공모전에 음모를 할 때는 무조건 장편으로 해라, 그래야 경쟁자 수가 적어진다’ 이 얘기를 하셔가지고, (웃음) 그때 새벽에 침대에 누워서 그걸 듣고 있다가 ‘안 되겠다, 뭐라도 써서 내야겠다’라고 하고 그때부터 『천 개의 파랑』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김하나 : 이 책(『천 개의 파랑』)에 비해서는 ‘실종자 수 0명’이라고 하는 원래 골조가 있던 책을 고쳐가는 과정은 아주 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이야기 구조가 새로운 이야기를 쓸 때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어떤 걸 남기고 어떤 것을 새로 만들 것인지를 판단을 더 해야 되는 과정이었겠어요. 다른 작업이었겠네요.
천선란 : 네.
김하나 : 병원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은 ‘실종자 수 0명’에서 철거하지 않은 부분인데, 그렇다면 병원을 배경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신 이유는 뭐였을까요?
천선란 : 저희 어머니가 병원에서 거의 8년 넘게 지내고 계시는데요. 그때부터 대학병원이랑 큰 재활병원, 그런 곳들은 장기 입원이 좀 불가능하다 보니까, 이후에는 좀 작은 재활병원을 계속 돌아다니시다가, 지금 이 배경이 된 재활병원에서 거의 한 4년 내지 5년 정도를 지내시고 계시거든요. 그렇게 장기 입원이 가능한 요양병원 기능을 하는 재활병원들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입원하시는 분들이 다 장기로 입원을 해 계셔서 거의 가족 같은 느낌이 나요.
김하나 : 아, 다른 환자들과 함께.
천선란 : 네. 병원에서 겉절이도 무치시고 고구마도 엄청 많이 삶아서 나눠 드시고 하는데, 거기에서 오래 있다 보니까 거기만 가면 남들은 잘 경험하지 못했던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느낌이 나요. 세상이랑 다 완벽하게 차단된 곳이라서. 그래서 ‘이런 배경으로 소설을 한 번 써봐야겠다’ 싶었어요.
김하나 : 지금 작가님이 93년생이신데 어머니께서 8년 넘게 병원에 계시다고 한다면 작가님이 20대 초반부터 어머니의 병원 생활과 함께 작가님의 병원 생활도 시작이 된 것인데, 처음에는 아주 힘드셨을 것 같아요.
천선란 : 네. 처음에는 ‘곧 끝나겠지’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내년에는 집에 가서 같이 살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 있었다가, 그게 아니고 이게 우리 일상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기간이 좀 힘들었던 것 같아요.
김하나 : 일상이라고 받아들이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였을까요?
천선란 : 한 3년 차쯤이었는데요. 그때까지도 저희 어머니의 어떤 뇌출혈로 인한 치매 증상이 완화되지 않았고 24시간 간병이 붙어 있어야 하는데 가족들은 다 회사를 나가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계속 병원에 있어야 됐고, 그때쯤 대학병원을 나와서 재활병원을 막 찾고 다녔을 때였어요.
김하나 : 작가의 말에서 ‘수연의 맨 마지막 말을 던지게 하고 싶었다’고 하셨는데, 그 말은 ‘외로운 자들을 홀로 두지 말아라’라고 하는 메시지예요. 그런 메시지도 그렇고, 병원이 배경으로 된 것도 그렇고, 작가님의 어떤 생활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점점 뭉쳐져서 이 소설로 태어나게 된 것 같군요.
천선란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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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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