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작가는 낯선 세계를 우리 앞에 턱, 내려놓습니다. 부엉이, 늑대 등의 피부를 자신의 몸에 이식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세계(「수브다니의 여름 휴가」), 다중 자아를 타고난 ‘셀븐인’이 등장하는 세계(「양면의 조개껍데기」), 타원은하계 외곽에서 발견한 ‘진동새’를 탐구하는 ‘자아’의 일부가 등장하는 세계(「진동새와 손편지」)처럼 김초엽 작가가 펼쳐보이는 세계는 너무나 낯설고 과감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죠. 이 두근거림의 정체를 조금 더 깊이 탐구해봅니다. 거기에는 타인의 욕망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다양한 관계를 상상하고, 갈등을 긍정하고, 인간과 다른 무수히 많은 존재를 끌어안는 시선, 말하자면 경계를 의심하고 더 나아가보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러니 감히 『양면의 조개껍데기』 속 이야기들이 책이라는 경계까지 흐려 독자의 삶에도 침투하는, 그래서 독자를 변화시키는 강한 힘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순 속에 살아가야 하는지도 몰라. 살아 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 존재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존재 기반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모순 속에서. 하지만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달고 미지근한 슬픔」, 291쪽)
내가 표현하고 싶은 아름다움은
『양면의 조개껍데기』는 작가님의 세 번째 소설집이자, 4년 만의 신작 소설집이에요. 여기 담긴 일곱 편의 작품을 쓰는 기간이, 작가님께 어떤 시간이었는지 궁금한데요. 이전의 작업과는 어떻게 달랐나요?
데뷔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두 번째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를 출간할 때까지는 파도가 막 밀려오는 느낌이었어요. 몰려오는 파도를 타고도 싶고, 어떻게든 그 파도에 올라타야 하기도 했던 시간이었죠. 데뷔하고, 예상치 못하게 주목을 많이 받았어요. 덕분에 제안도 많았고요. 그 제안을 어떻게든 잘 해내야겠다 생각해서 쓴 작품이 많았는데요. 그 파도를 다 보내고, 조금은 잔잔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왔어요. 아무리 많은 주목을 받는 작가라 해도 그를 향한 관심이 어느 정도 올라가고 나면 작가만 남는 시간이 오는 것 같아요. 그런데 오히려 그 시간이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고유한 고립이라는 걸 많이 느끼게 됐어요. 지난 4년은 반드시 혼자 있는 시간, 타인과 단절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시간이었던 거예요.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일부러 그런 시간을 주려고 멀리 떠나서 쓰기도 하고요. 집에 있으면서도 일부러 일정을 잡지 않아 보면서 집필 방식의 여러 시도를 많이 했던 시기였습니다.
“차갑지만 차갑다고만은 할 수 없는, 슬프지만 가만히 보면 반짝이는 조각들이 섞인 양면의 마음”을 이번 소설집에 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어떨까요?
표제작을 편집자님이 정하셨어요. 편집자님과 저의 지인들이 『양면의 조개껍데기』라는 제목이 가장 매력적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표제를 정하고 나니까 이 말이 묶어주는 수록작들의 공통점이 조금 보였어요. 여기 담긴 작품들을 쓸 때는 두 권의 소설집을 펴낸 이후였고, 앞으로 내가 무엇을 다루고 싶은지 고민을 많이 하던 때였거든요. 그러면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아름다움은 좀 더 복잡한 것, 좀 더 다층적인 동시에 너무 난해하지 않게 마음에 와 닿는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요. 왜 이 이야기가 나에게 감정의 파문을 일으켰을까, 왜 아름답다고 느꼈을까 들여다보게 하는 굉장히 여러 겹이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떤 인물이나 어떤 마음, 어떤 사건의 양쪽을 오가는 이야기를 많이 쓰게 됐어요. 이쪽을 깊이 다루고 나면 저쪽도 가보고, 근데 그거 아닌 것 같아, 라고도 해보는 식으로요. 그런 생각을 표현한 말이었어요.
단정짓지 않고 계속 질문해 보는 작업이잖아요. 그것이 작가님께는 즐거움인가요? 힘들진 않으세요?
저는 이게 익숙해요. 평소에도 어떤 사안이나 현상에 대해 확고하게 입장을 정하는 편이 아니고요. 일단 정해 놓고도 계속해서 의심해요. 이거 맞나, 이것에 반하는 다른 증거가 있지 않나, 하는 식으로 계속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는 편이죠. 그런 태도가 저에게 깊숙이 박혀 있어서 이야기를 쓸 때도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어떤 인물을 응원만 하지 않고요. 저와는 다른 인물을 쓰더라도 그 인물의 이해하고 싶은 면을 발견해보려 하기 때문에 이 방식이 조금은 체화된 느낌입니다.
과학자의 연구 태도와 흡사하게 느껴져요. 동시에 SF의 방법론과 잘 맞는 면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요. 계속 질문해보고, 탐구해가는 과정 자체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는 것이 SF장르의 아름다움이기도 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작품들을 쓰면서, 확실히 제가 배웠던 연구의 방법론을 작품 쓸 때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전문 연구자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러한 연구 방식을 배웠으니까요. 일단 어떤 연구를 할 때는 반드시 선행 조사를 철저히 해야 해요. 소설을 쓸 때도 같은 소재나 주제를 다룬 작품들을 파악해야 하고, 거기에 내가 파고들 틈새가 있는지 혹은 다른 사람들이 조합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 주제를 조합할 수 있는지 먼저 파악해야 하죠. 또 연구 과정에서 계속 내가 세웠던 가설을 시험해야 하거든요. 그 시험을 견디도록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에 결론을 내리는데요. 논문의 결론 부분을 보면 언제나 연구의 잠정적 결론을 내리면서도 그것으로 완벽한 답이 아니라 다음으로 이어지는 질문이 있잖아요. 저는 소설도 그런 방식으로 쓸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진동새와 손편지」 역시 언어의 한계, 그리고 한계에서 나오는 가능성 등을 깊이 상상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이 단편을 쓸 때 구체적으로 어떤 탐구의 과정이 있었는지 들려주세요.
워낙 인공지능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시점이죠. 그러다 보니까 저도 생각을 안 할 수 없더라고요. 하지만 인공지능 얘기를 맨날 피해다녔어요. 저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하면서 다 거절하다가요. 한번은 속아서(웃음) 관련 강연을 하러 간 적이 있어요. 정확히는 스토리 컨퍼런스에 초청을 받은 거예요. ‘스토리’는 원래 하던 것이라 그냥 갔는데 저에게 배정된 것이 AI에 대한 세션이었어요. 아마 SF작가라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어쨌든 현장에서 ‘AI가 존재할 때, 인간의 고유성이란 무엇일지’ 질문하시는데 피할 수 없으니까 생각을 해보게 됐어요.
보면 AI가 무언가를 점점 더 잘하고, 어떤 것은 이미 인간을 추월한 것 같기도 해요. 한편 SF에는 언제나 인간과 다른 존재가 등장하고, 그 존재들이 거울처럼 우리를 비추죠. 그때 알게 되는 것은 인간의 무능함, 쓸모 없음이거든요. 근데 오히려 그게 인간의 고유성 아닌가 싶어요. 우리는 AI처럼 지식을 복제할 수 없고, 연결될 수 없어요. 각자 자신의 몸에 갇혀 살기 때문에 내가 경험하는 빨간색이 남의 빨간색과 같은지조차 말하지 못한 채 평생 1인칭 관점으로 이 삶을 체험하다가 죽어요. 그런데 인간처럼 개인 개체에 갇혀 있는 경험을 AI는 못하죠. 그렇다면 그 한계, 1인칭 관점으로 평생 살다가 결국 이것만 체험하고 죽는 것이 인간의 고유성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창작을 할 때도 그렇거든요. 뭔가 제약이 있다면, 이 제약 안에서 나의 최대를 펼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독특한 게 나와요.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에서도 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하려고 애쓰고 끌어안아서 가능성을 펼쳐 보이는 가운데 인간만의 독특한 게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잘 몰라, 근데 알고 싶어
개인 개체로 평생을 살다가 죽는 인간 존재의 조건이라는 것이 『양면의 조개껍데기』 속 작품들을 읽으면 많이 부서지고 깨지죠. 자신을 다른 종이라 믿는 아더킨(「수브다니의 여름휴가)이나 자신의 신체에 성별 불일치 감각 즉, 디스포리아를 겪는 레몬(「양면의 조개껍데기」) 등 작품에 담긴 퀴어성이 눈에 띄었는데요. 경계를 가뿐하게 흔드는 존재들이 정말 좋았고요. 이 세계에 대한 매력적인 은유로 작품들을 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님께 이러한 존재들을 불러오는 마음, 이 존재들이 작품에 담기는 과정을 듣고 싶어요.
「양면의 조개껍데기」는 처음부터 퀴어 앤솔로지에 실리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퀴어 소재를 선택할 필요가 있었는데요. 다른 작품에도 비교적 세계로부터 배제되는 인물들이 등장하죠. 다만 반드시 ‘해야겠다’ 생각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이야기로서 갈등이 있어야 더 흥미로워지기도 하고요. 다른 세계가 나왔을 때 독자가 이야기에 더욱 매력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처음부터 의도를 갖고 이야기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요. 쓰다 보면 저의 무의식에 있던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반영되는 것 같아요. 다른 존재에 대한 나의 태도나 마음 같은 것들이 말이에요.
그래서 평소에 생각을 똑바로 하려고 노력하죠. 저도 어떤 편견과 한계를 가지고 있고요. 낯선 분야나 낯선 사람들을 보면 혹시 위험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하지만요. 그러한 평소 생각들이 작품에 반영되기 때문에 스스로 계속해서 시험하려고 많이 노력하고요. 어쨌든 독자를 향해서 ‘이것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으려고 해요. 저에게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한 함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분명 경계에 관한 고민이나 관심이 작가님 안에 깊게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불려 나오는 것이기도 할 거예요.
원래의 관심사이기도 해서 자연스럽게 시선이 닿는 것 같은데요. 저는 어쨌든 과학을 기반으로 세계를 보는 편이고요. 과학을 하다 보면 우리가 세운 기준, 우리가 만든 카테고리 같은 것이 사실은 불분명하다는 것을 많이 알게 되거든요. 기준을 벗어나는 현상들이 정말 많고, 앞서 세운 가설들이 폐기되기도 하고, 이론까지도 언젠가는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저는 과학이 그런 식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 좋아요.
과학자들이 말하는 어느 가설에 대한 답변은 항상 잠정적인 결론이고, 이것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는 태도예요. 그것에 대한 완벽한 답을 알 수 없고, 우리 모두가 궁극의 질문에 답변할 수 없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해해 보고 싶고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과학의 태도인데요. 이것이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래서 만약 그 태도를 우리가 평소에도 가진다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해요. 나와 다른 존재, 낯선 현상, 낯선 문화에 대해서도 ‘나는 이것을 잘 몰라, 근데 알고 싶어’와 같은 태도를 가지면 어떨까, 하고 말이에요.
그래서일까요. 질문에 답을 제시하는 쪽이 아니라 질문에 질문을 더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나아가는 것도 작가님 작품의 중요한 부분 같아요. 관련해서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슬픔. 어쩌면 영원히 모르는 것들의 경계가 있고, 그 경계를 알아내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슬픔. 하지만 그 슬픔에서는 여전히 달콤한 맛이 났다. 탐구할 가치가 충분한 슬픔이었다.”(「달고 미지근한 슬픔」, 293쪽)와 같은 문장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맞아요, 그 부분을 쓰면서 이것이 어떻게 보면 과학 소설이 주는 즐거움, 그리고 과학이 주는 즐거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과학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탐구가 지식을 넓혀가는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무지의 영역이 얼마나 넓은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잖아요. 기존의 통념대로라면 무지라는 것은 타파해야 할 대상, 베일을 벗겨야 할 대상이지만요. 생각해보면 무지를 인정하고,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탐구하는 것 역시 좋은 탐구일 수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떤 작품에서는 그런 식으로 무지의 경계를 탐구하는 이야기를 써보려고 노력했어요.
고래를 좋아해서, 「소금물 주파수」를 정말 신나게 읽었어요.(웃음) 아름다운 동화 같기도 하고, ‘해몽’과 ‘모아’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는데요. 작품의 톤을 결정하는 데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들려주세요.
고래를 주인공으로 한다는 건, 필연적으로 의인화가 많이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현실 비중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고민이 컸어요. 의인화가 많이 들어가는데 현실적인 부분이 커지면 안 맞을 수 있거든요. 톤이 어긋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캐릭터를 뒷받침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조금은 유치한 면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때문에 방법을 고민하다가 ‘해몽’이라는 고래 캐릭터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를 즐겁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모아’ 캐릭터를 구상하게 됐던 거예요.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린이들도 읽을 수 있게 가는 동시에 제 또래와 저보다 더 나이가 있으신 분들도 몰입하기 쉽도록 현실과 약간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겹쳐보자고 생각하면서 썼어요.
마지막에 수록된 작품인 「비구름을 따라서」의 도닥이고 감싸 안는 마음도 꼭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이런 걸 도대체 어디 쓰나 싶었던 물건들이 자기 세계를 찾아주면 다 쓸모가 있었던 거예요. 그게 이상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이 세계의 기준이었던 거죠.”(355쪽)라는 말을 건네고 싶은 대상이 있었나요?
여기에 ‘보민’과 ‘이연’이라는, 다소 대조되는 두 인물이 나오는데요. 사실은 제가 보민이라고 생각하면서 글을 썼던 것 같아요. 보민처럼 제가 좀 현실적인 편이에요. 항상 살아갈 방법을 구상하고요. 그에 비해 제가 사랑하는 친동생처럼 이 험난한 사회를 어떻게 견디고 살아나가려고 그러나, 싶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을 보면서 또 그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부단하게 노력하는 시간들이 있었고요. 그런 것이 「비구름을 따라서」를 쓸 때 많이 반영된 것 같아요. ‘이연’이라는 인물은 제가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가까운 사람들을 상상한 거죠.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하는 느낌이란, 현실에 적응하고 싶지 않은 느낌이란, 떠나고 싶은 느낌이란 대체 무엇일까 많이 생각했고요. 관련된 에세이이나 책도 많이 읽어보면서 작업했어요.
질문 뒤에 다시 질문하기
공교롭게도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을 읽고 있는 터라 연결되는 부분을 발견할 때마다 신기하고, 반가웠어요. 가령 자신의 영혼이 고운 모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은 세계가 인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에 기쁨을 느꼈다.”(「고요와 소란」, 212쪽) 같은 대목이 그랬는데요.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감각, 자연에도 행위자성이 있다는 개념은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작가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가요?
그에 대한 저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이야기가 「고요와 소란」과 「비구름을 따라서」예요. 「고요와 소란」에서는 말씀처럼 어떤 물질이 인간에게 미치는 행위력 그리고 사물들에 관한 신유물론적 이론들을 고려했죠. 그런 것을 공부할 때는 역시 의인화의 함정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항상 하는데요. 그래서 「고요와 소란」은 결국 의인화에 대한 얘기이기도 해요. 또 그럼에도 사물들의 행위 능력을 인정하게 된다면 사회는 어떤 식으로 변할 것인가에 대한 사고 실험이기도 하죠. 되게 많은 것들이 섞여 있어요.
한편 「비구름을 따라서」를 통해 하고 싶던 이야기는 이런 거예요. 우리가 사물이나 비인간 생물에게 이야기와 어떤 가치를 부여해서 이 세계에 종속시키지만, 동시에 그에 책임을 지는 나의 행위 윤리에 관한 것 말이에요. 우리가 이 세계에 책임이 있다는 얘기를 조금 더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요. 물론 사물이 갖고 있는 행위성을 인지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너무나 중요한 일이지만, 동시에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더 크다는 생각을 함께 담아봤습니다.
작품에 담긴 퀴어 요소나 사물의 주체성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비거니즘 상상으로 연결이 되잖아요. 「고요와 소란」에서 인간이 사물이나 비인간 생물의 목소리를 듣게 되니까 예전처럼 마구 이것을 소비할 수 없게 되는데요. 이 이야기를 쓰면서 어쩌면 읽는 사람들이 이것을 한 번 정도는 고민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었어요.
그걸 쓸 때는 생각을 계속해서 뒤집었어요. 처음에는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이 사물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더 이상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의 방식은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생물을 함부로 해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가 조금은 좋은 쪽으로 변하지 않을까 생각했고요. 동시에 이 목소리를 들어야만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한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요. 의인화로서만 인간 바깥의 세계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렇다면 그 목소리가 떠난 뒤에는 어떻게 될까, 또 질문해봤어요. 이런 식으로 어떤 질문 뒤에 그것을 계속 엎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작가의 말’에 각 작품을 쓸 때 있었던 작은 뒷이야기를 남기셨잖아요. 그것을 읽다 보니 소설 쓰기에 자극을 주는 장면, 혹은 아이디어란 주로 어떤 것인지 더욱 궁금해지더라고요.
저는 처음에 주제나 질문으로 시작하지는 않아요. 보통은 소재에서 많이 시작하고요. 노트에 메모를 워낙 많이 하거든요.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할 때도 통념과 다른 내용을 보면 메모에 담아요. 다큐멘터리를 볼 때, 여행에 갔을 때도 그때 떠오른 생각 같은 것을 잔뜩 수집해놓죠. 이런 것들 하나하나는 이야기가 되기 어려운데요. 그 중 서너 개 정도를 조합해봐요. 막 엮어보면 전혀 안 묶일 것 같은 것들이 이야기가 되기도 하거든요. 그런 식으로 시작을 많이 해요. 「고요와 소란」 역시 ‘목소리’라는 키워드를 제안 받은 뒤 제 노트의 메모 몇 가지를 조합해본 것이었어요.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와 협업한 「진동새와 손편지」의 타이포그라피 작품은 지금도 웹에서 볼 수 있잖아요. 그 작품 역시 조합이 됐을 때 새롭게 읽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더라고요. 현대 미술의 아름다움이 그와 비슷할 것 같고요. 작가님은 현대 미술을 좋아한다고 하셨어요. 그런 작품에서도 자극을 많이 받으시나요?
많이 받아요. 현대 미술이 사실 SF와 비슷한 소재를 많이 다루고요. 가장 첨단의 주제를 많이 다룬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렵지만요.(웃음) 저는 대중 소설을 쓴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런 난해한 얘기들을 조금 더 사람들이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로 전환하기를 좋아하는 편이어서요. 현대 미술에서 다루는 예리한 것들을 좋아합니다.
벽을 한번 넘어봤구나
“매번 글을 쓸 때마다 이전 작품보다 한 걸음은 아니어도 반걸음까지는 더 나가보자”는 스스로의 도전 과제가 있었다는 말씀을 듣고, 이번 소설집에서 시도한 도전 과제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당연히 독자가 해석해낼 부분도 있겠지만, 작가님의 말씀을 들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해서 이에 관한 질문을 드리고 싶었어요.
반걸음이라는 건 쓰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들이에요. 와중에 점점 더 생각하는 것은 작가가 쓰는 과정에서 애쓰고 노력한 것이 드러날 필요는 없고, 읽을 때는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인데요. 모든 작품에 어느 정도 반걸음 나아가보자는 ‘쓰기의 고민’들이 다 들어있어요. 「고요와 소란」과 「달고 미지근한 슬픔」 같은 이야기를 쓸 때는 예전보다 디테일을 훨씬 많이 넣었어요. 세부적인 조사도 많이 했고 그 내용을 많이 넣었는데요. 독자 분들이 좋아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쓰면서는 전에는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구나, 내 안에서 벽이라고 생각했던 어떠한 것을 한번 넘어봤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또 「비구름을 따라서」에서는 이전보다 인물에 더 포커스를 두었어요. 원래 저는 인물보다 사건, 아이디어, 현상에 포커스 둘 때가 많았는데요. 「비구름을 따라서」은 인물이 중심이고, 이 세계에 대해서 안 풀리는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에 다르게 쓴 거예요. 그렇게 매번 조금씩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혹시 인터뷰에서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양면의 조개껍데기』라는 작품집의 특징은 초반부에 실린 작품과 후반부에 실린 작품이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혹시 첫 작품이 재미가 없으셨다면 그냥 덮지 마시고요.(웃음) 뒤로 가셔서 한번 읽어봐주세요. 재미있을 거예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신연선
읽고 씁니다.

표기식
사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