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화를 읽고 나는 2년 전 구구 님을 처음 만난 어느 팟타이 집에서 내가 그에게 가졌던 인상, 정확하게는 ‘이 사람에게라면 목숨을 맡겨도 될 것 같다는 초면 치고 살짝 부담스러운 신뢰’가 과연 어디서 기인했는지 드디어 알 것 같았다. 그렇구나, 구구 님은 야쿠자였구나. 그래서 그런 거 였구나. 나는 왠지 모든 것을 납득하고 흡족해져 야쿠자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해 본다. 야.쿠.자. 다만 입으로 말고 머리 속에서. 아무래도 입으로는 좀 그러니까….
‘야쿠자의 심장’으로 불의(※특: 주로 인간 남성의 형태를 한 듯 보인다)를 응징하는 구구 님의 열 살, 아니면 열세 살 무렵을 떠올려 본다. 같은 교실에 있었다면 아마도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글쎄, 아니, 결코. 당시 나는 ‘셜록 홈즈 시리즈’와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에 빠져 있었다. 알다시피 셜록 홈즈와 아가사 크리스티의 주된 주인공 둘, 미스 마플과 에르큘 포와로는 앞에 사립이 붙건 가정(domestic)이 붙건 모두 탐정이다. 야쿠자와 마찬가지로 탐정은 혼자다. 성격 문제도 있겠지만 혼자여야 주변에 피해가 덜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명탐정 코난’만 봐도 답이 나온다. 만약 야쿠자와 탐정이 만나게 된다면 그건 보통의 범죄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옛날 이야기나 해보자. 나는 2003년에 중학교에 입학했다. ‘새천년’과 월드컵, 포르노와 조폭, 엽기와 미스터리가 뒤섞여 그야말로 혼돈의 에너지로 들끓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런 에너지는 인터넷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인터넷과 달리 아무 사건(event)도, 사고(思考)도 일어나지 않는 진공 상태 같은 매일을 보내며 나는 지루했다. 인구가 적은 촌이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바로 옆에 위치한 중학교에 입학하는 거의 자동화된 진학 시스템을 따랐다. 교복을 입었을 뿐 모든 게 똑같았다. 학교도, 선생도, 애들도 시시했다. 그 무렵 면사무소 근처의 작은 도서관에서 추리 소설을 발견했다. 도서관에는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추리 걸작선’이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꽂혀 있었다. 의미심장한 표지에 죄다 ‘죽음’이나 ‘비극’으로 시작하는 제목이었다. 만연한 범죄의 공기를 폐 속 깊이 들이 마시자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내가 추리 소설의 진지한 독자였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그랬다. 나는 당시 내가 읽은 그 어떤 작품의 줄거리도 정확하게 기억할 수가 없다. 최근까지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던 『바스커빌 가문의 개』나 『나일강의 죽음』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다. 내가 관심 있었던 건 오직 탐정들. 추리 소설에서 탐정의 매력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다. 셜록 홈즈는 인정 머리도 싸가지도 없는 마약 중독자지만, ‘팩트’(!) 추구를 향한 집념과 재능을 현장에서 100분 발휘하는 과학자-탐정의 모델을 보여준다. 그런 그가 때로 감정을, 심지어 눈물을 보이면 그게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다. 한편, 미스 마플과 에르큘 포와로는 겉보기엔 수더분한 중노년의 외양을 하고 안락 의자에 앉은 채 치정, 살인, 유산이 얽힌, 군침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자극적인 범죄 시나리오, 즉 ‘썰’을 뚝딱 직조해내는 스토리텔러-탐정의 모델을 예시한다. 초면에는 동의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몇 편 읽다 보면 둘만의 새침하고 풋풋한, ‘소녀적인’ 귀여움에 푹 빠지게 된다.
그런데 내가 추리 소설에 빠졌던 이유가 단지 창백한 피부에 길게 쭉 뻗은 팔다리를 갖춘 탐정계의 ‘은교’, 셜록 홈즈가 참을 수 없이 섹시하다고 느껴서만은 아니다. 추리 소설에는 도파민을 돌게 하는 질투와 증오, 거짓과 은폐, 무엇보다 살인과 그 다음 살인, 또 다시 계속되는 살인, 주요 용의자 체포 이후에도 탐정을 비웃듯이 이어지는 살인으로 가득하다. ‘살인’이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머리로 피가 잔뜩 쏠릴 시기였다. 한참 읽다 탐정이 용의자와 목격자를 한데 모아 마치 쇼처럼 사건의 ‘진짜’ 전말을 화려하게 공개하는 연출을 가리키는 ‘포와로 피날레’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느끼면 흥분이 제대로 고조됐다. 마침내 범인이 밝혀지기 직전—아아, 피가 혈관을 팽팽 돌며 뇌가 제대로 ‘가동’되는 바로 그 느낌이란! 그제야 나는 내게 피와 살로 이뤄진 몸이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생의 감각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문자 그대로의 ‘쾌락 독서’였다.
하지만 ‘쾌락’이 어느 정도 비중이어야 ‘독서’로 쳐줄까?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길티 플레저로 범벅된 포르노라 어디가서 이 책이 바로 내 정체성과 영혼의 형성의 가장 밑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책이라고 차마 말을 하기 어렵다면? 시드니 셸던의 『텔 미 유어 드림』이 딱 그렇다. 오늘날 거의 잊혀졌지만 왕년에는 불티나게 번역되고 팔린 이 백인 할아버지의 책은 대부분 아름답고 강인한 백인 커리어 우먼을 주인공 삼는다. 그의 16번째 소설인 『텔 미 유어 드림』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근친 성폭력 트라우마로 인해 남성 혐오와 다중인격장애에 걸려 남자만 골라 살해 후 성기를 절단하는 ‘엽기’ 연쇄 살인마(...)가 됐다는 설정이자 반전이 있다. 나는 살인+섹스+여성이라는 필승 공식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페미니즘의 ㅍ도 모르던 때였다. <원초적 본능>부터 시작해 <언더 더 스킨>같은 영화와 엮어 바기나 덴타타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어쩌고 저쩌고를 할 수 없던 때였다는 말이다.
대신 나는 해리와 분열에 시달리는 여성 연쇄 살인마에게 홀딱 빠져 『텔 미 유어 드림』의 특정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었다. 이따금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가 된 게 허구적 여성의 고통에 대해 너무 많이 상상한 대가인지 궁금하다. 그게 아니라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최대한 『텔 미 유어 드림』 에 근접한, 하지만 포르노는 아닌 다른 책을 읽고 있었을 뿐 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 건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건 별로 생산적이지는 않은 질문이다. 어차피 어린 시절 읽은 모든 책은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이다. 저주에 걸렸다는 건 분명하지만 어떤 저주에 걸렸는지, 언제 그 저주가 발현되는지는 우리는 영영 알 길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책을 ‘골라’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위험한가. 우리가 어떻게 착각하건 간에, 책은 우리에 앞서 우리의 어린 시절을 소유하며 그것에 관한 권리를 점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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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숙(리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2015 크리틱엠 만화평론 우수상, 2021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진격하는 저급들』, 『여기서는 여기서만 가능한』, 『아빠 소설』이 있다. 공저로 『당신은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 『크래시 – 기술·속도·미술시장을 읽는 열 시간』, 『미친, 사랑의 노래』, 『퀴어 미술 대담』이 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hotleve를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