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X리타] 책은 아이들에게 권리가 있다 - 장르 소설과 쾌락
어차피 어린 시절 읽은 모든 책은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이다. 저주에 걸렸다는 건 분명하지만 어떤 저주에 걸렸는지, 언제 그 저주가 발현되는지는 우리는 영영 알 길이 없다.
글 : 이연숙(리타)
202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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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를 읽고 나는 2년 전 구구 님을 처음 만난 어느 팟타이 집에서 내가 그에게 가졌던 인상, 정확하게는 ‘이 사람에게라면 목숨을 맡겨도 될 것 같다는 초면 치고 살짝 부담스러운 신뢰’가 과연 어디서 기인했는지 드디어 알 것 같았다. 그렇구나, 구구 님은 야쿠자였구나. 그래서 그런 거 였구나. 나는 왠지 모든 것을 납득하고 흡족해져 야쿠자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해 본다. 야.쿠.자. 다만 입으로 말고 머리 속에서. 아무래도 입으로는 좀 그러니까…. 

 

‘야쿠자의 심장’으로 불의(※특: 주로 인간 남성의 형태를 한 듯 보인다)를 응징하는 구구 님의 열 살, 아니면 열세 살 무렵을 떠올려 본다. 같은 교실에 있었다면 아마도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글쎄, 아니, 결코. 당시 나는 ‘셜록 홈즈 시리즈’와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에 빠져 있었다. 알다시피 셜록 홈즈와 아가사 크리스티의 주된 주인공 둘, 미스 마플과 에르큘 포와로는 앞에 사립이 붙건 가정(domestic)이 붙건 모두 탐정이다. 야쿠자와 마찬가지로 탐정은 혼자다. 성격 문제도 있겠지만 혼자여야 주변에 피해가 덜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명탐정 코난’만 봐도 답이 나온다. 만약 야쿠자와 탐정이 만나게 된다면 그건 보통의 범죄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옛날 이야기나 해보자. 나는 2003년에 중학교에 입학했다. ‘새천년’과 월드컵, 포르노와 조폭, 엽기와 미스터리가 뒤섞여 그야말로 혼돈의 에너지로 들끓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런 에너지는 인터넷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인터넷과 달리 아무 사건(event)도, 사고(思考)도 일어나지 않는 진공 상태 같은 매일을 보내며 나는 지루했다. 인구가 적은 촌이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바로 옆에 위치한 중학교에 입학하는 거의 자동화된 진학 시스템을 따랐다. 교복을 입었을 뿐 모든 게 똑같았다. 학교도, 선생도, 애들도 시시했다. 그 무렵 면사무소 근처의 작은 도서관에서 추리 소설을 발견했다. 도서관에는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추리 걸작선’이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꽂혀 있었다. 의미심장한 표지에 죄다 ‘죽음’이나 ‘비극’으로 시작하는 제목이었다. 만연한 범죄의 공기를 폐 속 깊이 들이 마시자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내가 추리 소설의 진지한 독자였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그랬다. 나는 당시 내가 읽은 그 어떤 작품의 줄거리도 정확하게 기억할 수가 없다. 최근까지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던 『바스커빌 가문의 개』『나일강의 죽음』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다. 내가 관심 있었던 건 오직 탐정들. 추리 소설에서 탐정의 매력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다. 셜록 홈즈는 인정 머리도 싸가지도 없는 마약 중독자지만, ‘팩트’(!) 추구를 향한 집념과 재능을 현장에서 100분 발휘하는 과학자-탐정의 모델을 보여준다. 그런 그가 때로 감정을, 심지어 눈물을 보이면 그게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다. 한편, 미스 마플과 에르큘 포와로는 겉보기엔 수더분한 중노년의 외양을 하고 안락 의자에 앉은 채 치정, 살인, 유산이 얽힌, 군침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자극적인 범죄 시나리오, 즉 ‘썰’을 뚝딱 직조해내는 스토리텔러-탐정의 모델을 예시한다. 초면에는 동의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몇 편 읽다 보면 둘만의 새침하고 풋풋한, ‘소녀적인’ 귀여움에 푹 빠지게 된다. 

 

그런데 내가 추리 소설에 빠졌던 이유가 단지 창백한 피부에 길게 쭉 뻗은 팔다리를 갖춘 탐정계의 ‘은교’, 셜록 홈즈가 참을 수 없이 섹시하다고 느껴서만은 아니다. 추리 소설에는 도파민을 돌게 하는 질투와 증오, 거짓과 은폐, 무엇보다 살인과 그 다음 살인, 또 다시 계속되는 살인, 주요 용의자 체포 이후에도 탐정을 비웃듯이 이어지는 살인으로 가득하다. ‘살인’이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머리로 피가 잔뜩 쏠릴 시기였다. 한참 읽다 탐정이 용의자와 목격자를 한데 모아 마치 쇼처럼 사건의 ‘진짜’ 전말을 화려하게 공개하는 연출을 가리키는 ‘포와로 피날레’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느끼면 흥분이 제대로 고조됐다. 마침내 범인이 밝혀지기 직전—아아, 피가 혈관을 팽팽 돌며 뇌가 제대로 ‘가동’되는 바로 그 느낌이란! 그제야 나는 내게 피와 살로 이뤄진 몸이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생의 감각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문자 그대로의 ‘쾌락 독서’였다. 


 

하지만 ‘쾌락’이 어느 정도 비중이어야 ‘독서’로 쳐줄까?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길티 플레저로 범벅된 포르노라 어디가서 이 책이 바로 내 정체성과 영혼의 형성의 가장 밑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책이라고 차마 말을 하기 어렵다면? 시드니 셸던의 『텔 미 유어 드림』이 딱 그렇다. 오늘날 거의 잊혀졌지만 왕년에는 불티나게 번역되고 팔린 이 백인 할아버지의 책은 대부분 아름답고 강인한 백인 커리어 우먼을 주인공 삼는다. 그의 16번째 소설인 『텔 미 유어 드림』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근친 성폭력 트라우마로 인해 남성 혐오와 다중인격장애에 걸려 남자만 골라 살해 후 성기를 절단하는 ‘엽기’ 연쇄 살인마(...)가 됐다는 설정이자 반전이 있다. 나는 살인+섹스+여성이라는 필승 공식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페미니즘의 ㅍ도 모르던 때였다. <원초적 본능>부터 시작해 <언더 더 스킨>같은 영화와 엮어 바기나 덴타타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어쩌고 저쩌고를 할 수 없던 때였다는 말이다. 

 

대신 나는 해리와 분열에 시달리는 여성 연쇄 살인마에게 홀딱 빠져 『텔 미 유어 드림』의 특정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었다. 이따금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가 된 게 허구적 여성의 고통에 대해 너무 많이 상상한 대가인지 궁금하다. 그게 아니라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최대한 『텔 미 유어 드림』 에 근접한, 하지만 포르노는 아닌 다른 책을 읽고 있었을 뿐 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 건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건 별로 생산적이지는 않은 질문이다. 어차피 어린 시절 읽은 모든 책은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이다. 저주에 걸렸다는 건 분명하지만 어떤 저주에 걸렸는지, 언제 그 저주가 발현되는지는 우리는 영영 알 길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책을 ‘골라’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위험한가. 우리가 어떻게 착각하건 간에, 책은 우리에 앞서 우리의 어린 시절을 소유하며 그것에 관한 권리를 점유한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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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바스커빌 가문의 개

<아서 코난 도일> 저/<남명성> 역

출판사 | 펭귄클래식코리아

나일강의 죽음

<애거서 크리스티> 저/<이가형> 역

출판사 | 해문출판사

Tell Me Your Dreams

Sheldon, Sidney

출판사 | Warner Books (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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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숙(리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2015 크리틱엠 만화평론 우수상, 2021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진격하는 저급들』, 『여기서는 여기서만 가능한』, 『아빠 소설』이 있다. 공저로 『당신은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 『크래시 – 기술·속도·미술시장을 읽는 열 시간』, 『미친, 사랑의 노래』, 『퀴어 미술 대담』이 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hotleve를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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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

추리 소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인물 ‘셜록 홈스’를 창조해 전 세계 독자를 열광시킨 영국의 소설가이다. 1859년 5월 22일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찰스 얼터먼트 도일은 아일랜드계 잉글랜드인이었고, 어머니 메리 폴리는 아일랜드인이었다. 에든버러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선박에서의 서부 아프리카 해안을 항해하는 등 의사 경험을 거쳐 포츠머스에서 개업하나 환자가 없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의 소설에 폭넓은 소재와 주제를 제공했다. 그는 「사사싸 계곡의 미스터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 쓰기를 시작했으며, 그러던 중 1887년에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첫 작품 『주홍색 연구』를 발표했고, 1890년 두 번째 장편 『네 사람의 서명』을 발표하면서 점차 인기가 높아졌다. 1891년 런던에서 다시 개업하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했기에 작품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1892년에 『셜록 홈즈의 모험』과 『셜록 홈즈의 회상』(1894) 등 홈즈 시리즈 단편을 차례차례로 발표하여 추리소설의 장르를 확립했다. ‘셜록 홈즈’ 시리즈만으로 두 편의 장편과 네 권의 단편집을 발표하였다. 냉정하고 날카로운 홈즈와 온후한 왓슨이 여러 사건에 도전하는 이 시리즈는 60여 편에 이른다. 셜록 홈스 이야기는 처음 발표되자마자 세상에 돌풍을 일으켰고 세계 각국에 소개되었다. 독자들은 괴팍한 성격과 탁원한 재능으로 카리스마를 풍기는 홈스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그 결과 홈스는 명탐정의 대명사가 되었고, 심지어 많은 독자가 그를 실제 인물이라고 믿기까지 했다. 『용감한 제랄의 모험담』, 『잃어버린 세계』 등의 과학소설도 썼다. 1902년, 보어 전쟁에서 의사로 활약, 영국의 참전을 정당화하는 등의 업적으로 기사 작위에 서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들을 잃은 후 심령현상에 관심을 보였다. 홈즈 시리즈가 준 영향은 탐정소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셜로키언이라 불리는 팬이 전 세계에 존재한다. 40년의 세월 동안 꾸준히 홈스 시리즈를 발표하며 미스터리의 보급에 기여했다. 이후 애거서 크리스티, 도러시 세이어스, 앤서니 버클리, S.S.밴 다인 등의 작가들이 등장하는 데 발판이 되어 주었다. 이후에도 아서 코난 도일은 꾸준히 미스터리 장르 작품 활동에 매진하였으나 1930년 7월 7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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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티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는 1890년 9월 15일 영국의 데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뉴욕 출신의 아버지 프레드릭 앨버 밀러와 영국 태생의 어머니 클라라 버머 사이의 삼남매 중 막내로 어린 시절을 애슈필드라 불리는 빅토리아 양식의 집에서 보냈고 이때의 경험이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열한 살에 아버지를 여읜 그녀는 열여섯에 파리로 건너가 성악과 피아노를 공부했다. 1912년,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2년 뒤 크리스티 대령과 결혼, 남편이 출전하자 자원 간호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던 그녀는 1916년 첫 작품으로 『스타일즈 저택의 수수께끼』를 썼는데 이는 4년 뒤인 1920년 출간되었다. 그녀의 처녀작인 『스타일즈 저택의 수수께끼』는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한 헤이스팅스가 옛친구의 어머니 집인 스타일즈 저택을 방문하면서 독살 사건에 휘말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황한 헤이스팅스가 순간 떠올린 것은 계란형 얼굴에 콧수염을 자랑하는 벨기에에서 망명한 에르큘 포아로. 회색 뇌세포로 불리는 불후의 명탐정 포아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책으로, 추리 소설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계속 소설을 발표하던 그녀는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한 뒤, 이듬해 메소포타미아 여행을 하던 중 고고학자 맥스 멜로윈을 만나 1930년 재혼하였다. 1967년 여성으로는 최초로 영국 추리협회의 회장이 되었고, 1971년에는 뛰어난 재능과 왕성한 창작욕을 발휘한 업적으로 영국 왕실이 수여하는 데임(Daem) 작위(남성의 Knight에 해당하는 작위)를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받아 데임 애거서가 되었다. 1976년 1월 12월 런던 교외의 저택에서 8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생애 동안 장편 66권, 단편집 20권을 발표하여 '추리소설의 여왕'이라는 별명과 함께,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추리 소설 작가로 여전히 군림하고 있다. 크리스티 여사와 탐정 에르퀼 푸아로는 묘한 인연을 갖고 있는데, 푸아로는 크리스티의 작가 생활을 처음과 끝에서 장식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가 죽었을 때 [타임스]를 비롯한 영국과 미국의 신문들은 ‘벨기에 사람 에르퀼 푸아로 별세’라는 기사를 제1면에 대서특필하여, 마치 작가 자신이 죽기라도 한 것처럼 슬픔과 아쉬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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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셀던

천재적인 이야기꾼, 언어의 마술사라는 찬사를 들으며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아 온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이야기꾼으로서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는, 25세에 브로드웨이의 무대에서 3개의 뮤지컬을 동시에 히트시키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이후 영화사 MGM에서 시나리오뿐 아니라 제작과 감독을 겸하며 일하다 ABC 방송국의 요청으로 드라마 산업과 손을 잡게 된다. 2년 동안 78편의 드라마 각본을 썼고, 5년 연속 에미상을 수상하는 대히트를 기록한다. 6편의 연극 각본, 200편의 드라마, 25편의 시나리오를 쓰며 각 분야에서 최고의 상을 수상한 그는 50세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이후 18편의 소설을 발표하며 미국의 최고 인기 작가의 위치에 오른 그는, 기네스북에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작가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1974년 〈깊은 밤 깊은 곳에(The Other Side of Midnight)〉가 폭발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힌 그는 〈13월의 천사〉 〈내 생애, 8월 22일〉 등을 계속해서 펴내어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 181개국에서 51개의 언어로, 2억8천만 부가 판매되는 대기록을 세웠다. 계속해서 〈화려한 혈통〉 〈100년 동안 너를 찾았어〉 〈6분 전〉 〈7일간의 유혹〉 〈시간의 모래밭〉 〈마이더스〉 〈영원한 것은 없다〉 등을 발표했는데, 그의 소설은 영상이 풍부하고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긴박감을 더해주어 어떤 독자라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깊이 빠져들게 하는 묘미가 있다. 2005년에는 회고록인 〈또 다른 나〉를 출간하여 다시 한번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2007년 89세로 작고할 때까지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남긴 그는 아직까지도 전무후무한 스토리텔러로서 전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