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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 읽은 인상적인 책들 – 하지현 정신과전문의
‘마음을 읽는 서가’ 마지막 회
오늘은 올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재미있게 읽었지만 ‘마음을 읽는 서가’에 소개하지 못했던 책, 그중에서도 에세이와 만화를 몇 권을 엄선해 서가의 한 켠에 꽂아볼까 한다. (2019. 12. 23)
나는 많이 읽는 사람이다. 미식가와 대식가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대식가에 속하는 독서 취향이다. 먹을 때에는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편이지만, 읽는 것을 고를 때에는 최대한 많이, 이것저것을 지향한다. 그 결과 스펙트럼이 꽤 넓은 독서 편력을 해왔는데, ‘마음을 읽는 서가’ 코너에는 아무래도 심리와 관련한 책이나 어떻게든 엮어볼 만한 주제가 있는 책을 소개해 왔다. 꽤 재미있게 읽었지만 소개하지 못한 책들도 많다. 세어보니 올 한 해 읽은 책이 100권을 훌쩍 넘는데 격주 연재니 스물 몇 권 밖에 리뷰를 하지 못해 아쉬웠다.
오늘은 올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재미있게 읽었지만 ‘마음을 읽는 서가’에 소개하지 못했던 책, 그중에서도 에세이와 만화를 몇 권을 엄선해 서가의 한 켠에 꽂아볼까 한다.
올해 초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란 영화를 보았다. 발랄한 스무살 여대생 노리코가 우연히 일본 차의 세계에 입문해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차의 세상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을 묘사한 잔잔하고 조용한 영화라 느낌이 좋았다. 찾아보니 원작이 있었고, 칼럼니스트 모리시타 노리코의 『매일 매일 좋은 날』 이다. 영화와 비슷한 느낌의 책으로 본인이 25년간 다도를 하면서 경험한 이야기를 에세이로 풀어냈다. 책을 보고 영화를 보면 더욱 그 느낌이 생생해질 것이다. 영화에 작고한 키키 키린이 다도 선생님으로 출연한 것은 덤이다.
2019년은 페미니즘이 한 발 한 발 사회 전면으로 나서고 있는 것을 실감하는 한 해였다. 여러 권의 책이 주목을 받았는데, 김진아의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게 아니라고』 도 그중 한 권이다. 자기 몫을 되찾고 싶은 여성들을 위한 야망 에세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정당하게 자기 몫의 파이(지분)을 획득하기 위해서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 인생을 조금 더 산 선배가 여성들에게 알려준다.
생활밀착형 에세이를 좋아한다. 작년에는 ‘중국집’이라는 조율사가 전국을 다니면서 쓴 중국집 편력이 인상적이었고, 올해는 봉달호의 『매일 갑니다 편의점』 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하루에도 한 번은 문을 열고 들어가고, 골목마다 하나씩 있는 24시간 편의점. 이곳을 수년간 운영해 온 저자가 손님이 없는 시간을 쪼개서 쓴 편의점 운영을 하면서 느낀 것, 구체적인 노하우 등을 담은 책이다. 점주 입장에서 동네 상권, 유흥가, 오피스 상권의 편의점의 장단점, 1 1이나 특가 세일이 어떤 식으로 내려오고 수익이 배분되는지, 잘 팔리는 진열의 요령, 요일별 로 또 어느 상권이냐에 따라 팔리는 물품이 다른 이유 등 편의점을 직접 해본 사람들에게는 뻔한 얘기일지 모르나,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절대 쓸 수 없는 책이었다. 일본에서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소설 『편의점 인간』 을 쓴 무라타 하야카가 있다면, 한국에는 『매일 갑니다 편의점』 이 있다.
본격 심리서는 아니지만 세계적 사회심리학자가 힘을 쫙 빼고 쓴 책이 있다. 로버트 치알디니, 노아 골드스타인, 스티브 마틴이 공저한 『웃는 얼굴로 구워 삶는 기술』 이다. 치알디니가 대인관계에 필요한 20가지 심리 법칙을 아주 쉽게 설명하고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엄청난 레퍼런스를 달지 않고, 복잡하고 심오한 이론을 제시하지 않은 채 한 입에 쏙 넣게 잘 포장해서 제공한 책이다. 심리학에 배경지식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 해도 안심하고 볼 수 있는 책이었다. '8만 원짜리 코트보다 6만 5,000원짜리 스카프가 나은 이유: 기분 좋은 선물의 법칙'이 인상적이었는데, 비싼 카테고리의 싼 물건보다는 싼 물건 카테고리의 고가 물건이 선물로는 효과적이라는 설명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내 돈 주고 사기에는 평소 망설여지거나 아까웠던 물건이 상대의 마음에 오래 남는 길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영화감독이자 소설가, 한국에서는 오다기리 조가 나온 ‘유레루’로 유명한 니시카와 미와의 『료칸에서 바닷소리를 들으며 시나리오를 씁니다』 가 다음으로 읽어볼 만한 책으로 권하고 싶다. 예로부터 영화 감독들은 시나리오를 쓸 때 여관에 들어가서 몇 달씩 칩거를 하고는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뒷얘기다. 이 풍습은 아마도 일본에서 온 듯 하다. 이 책에서 니시카와 미와가 영화 <아주 긴 변명>을 쓰고 연출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써내려 간다. 나는 처음에 료칸에서 시나리오를 쓴다고 해서 엄청 럭셔리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읽어보니 그건 아니었다. 언제 또 다음 영화를 찍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자박자박 준비를 해나간다. 긴 과정의 끝 무렵, 스승 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연출 팀이 마지막에 합숙하는 료칸에 방을 하나 얻어서 함께 숙박을 하며 마무리를 과정에서 이 책의 제목이 나온 것이다. 시골 마을 바닷가의 소박한 료칸이었다. 배우를 캐스팅 하는 과정에 자의식 강한 주연 배우를 달래고, 설득하는 과정, 모든 것을 책임져야하는 감독으로서 고독하고 외로운 일이지만, 함께 작업하는 동료들이 있기에 관계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같이 소소하지만 세밀한 인간 내면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런 식이다.
“저 역시 구제불능의 인간이고 지독하게 절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타인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여전히 기대를 걸고 맙니다.”
그들이 묵은 오래된 료칸의 몇 호실이 반세기전 오즈 야스지로와 같은 거장들이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꼭 한 번 방문해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추가 옵션이다.
마지막은 문보영 시인의 『준최선의 롱런』 이다. 2017년 시집 『책기둥』 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고 상금으로 친구와 피자를 사먹었다는 저자 소개부터 일단 호기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시인은 “최선이 아니라 준(準) 최선만 하자”고 한다. 꿋꿋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일이 어수룩한 게 아니고, 평범한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자고 말한다. 하루를 잘 살아낸 나를 칭찬하고 응원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준최선’의 태도가 필요하다. 대충 하는 건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닌, 그 중간의 어디에서 묵묵하게 롱런을 하는 것, 이 단계에서 한 계단만 오르면 최선이기에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충분히 최선이 될 수 있는 그 영역에서 머물면서 오랫동안 버티자는 것이다. 김하나 작가의 『힘 빼기의 기술』 이라는 책이 떠오르는데, 여기서는 한 발 더 나아가 힘을 어디까지 빼면 될 지까지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말을 갖고 노는 전문가인 시인만의 정제되고 잘 벼려진 언어 유희적 서술이 글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이토 준지가 그린다면? 그것도 『인간 실격』 을? 스티븐 킹의 소설을 데이비드 린치가 연출한 영화를 기다리는 기분과도 같은 일이었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소설로 읽었을 때 그려보았던 요조와 이토 준지의 펜을 통해 묘사된 요조를 비교하면 만화 속의 요조가 200%는 상상을 더 자극하고,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힘이 있었다. 주변인물들과의 관계까지 합쳐지면서 일어나는 시너지의 폭발력을 더해서 한 권을 읽고 나면 다음 권을 바로 시작하기에는 내 여린 자아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참으로 다행인 점은 일본 만화의 속성으로 볼 때 10권은 능히 갈 줄 알았는데, 3권으로 완결된다는 것.
소년 만화의 특징 중 하나는 성인 직업 세계에서 10대 소년이 탁월한 재능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미션을 클리어하면서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다. 10대 소년이 만화가로 데뷔해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바쿠만』 은 만화잡지 연재 생태계를 생생하게 그려서 큰 인기를 얻었다. 올해 나온 야나모토 미츠하루의 『히비키~소설가가 되는 방법』 은 소설을 소재로 했다. 고등학생 히비키가 데뷔 소설 ‘벗의 뜰’로 일본 최고의 문학상 나오키와 아쿠타가와 상을 동시에 받는 천재 소설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재빨리 영화화도 되었는데, 영화보다는 만화가 훨씬 재미있다.
그 외에도 많은 책들이 있지만 여러분들의 카트가 꽉 차버릴지 모르니, 이 정도에서 멈출까 한다. 아, 또 하나 멈출 것이 있다. ‘하지현의 마음을 읽는 서가’다. 2014년 5월 ‘차마 울지 못하는 당신을 위하여’로 시작해서 5년 7개월간 격주로 150여 권의 책을 이 서가에 올려왔다. 2019년 12월 이 칼럼을 마지막으로 오랜 연재를 종료하게 되었다. 이 연재를 그동안 관심을 갖고 읽어준 독자, 공간을 제공해준 <채널예스>, 또 오늘도 좋은 책을 만들고 있는 한국의 출판사와 편집자들에게 감사의 말을 올린다. 월요일 연재라 격주 일요일마다 마감의 압박에 시달려왔는데, 이제 그 무게를 덜고 홀가분해질 것을 생각하니 시원하지만 꽤 낯선 주말이 나를 기다릴 것 같다.
매일매일 좋은 날모리시타 노리코 저/이유라 역 | 알에이치코리아(RHK)
첫 다도 수업에서 만난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즉 ‘매일매일 좋은 날’이라는 말은 결국 무슨 뜻이었을까? 스무 살에서 삼십 대, 그리고 사십 대로 이어지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던 그것은, 알아가는 데 시간이 필요한 다도처럼 책의 전반에 걸쳐 조금씩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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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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