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 에디터
1. 미안해 수박, 미안해 애호박
아내가 카레를 만들었다. 아직 맛은 못 봤다. 오랜만에 잡힌 저녁 약속 때문에 어제 귀가가 늦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토요일 아침. 아내가 아이와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부엌으로 가서 고무장갑을 낀다. 밀린 설거지를 시작한다.
‘글 써야 하는데.’
아직 마감하지 못한 원고 하나를 떠올린다. 내가 인지하는 마감에는 두 종류의 버전이 있다. 편의상 하나를 1차 마감, 다른 하나를 2차 마감으로 부르겠다. 1차 마감은 담당자가 알려준 날짜다. 원고를 청탁받은 저자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늦게 보낼 걸 감안하여, 여유 있게 데드라인을 잡는 경우다. 결과물의 발행이나 인쇄 시기를 역산하여 꼭 데이터를 넘겨야 하는 시점이 2차 마감이다. 1차 마감은 이미 지났고, 2차 마감이 코앞이다.
‘내일쯤이면 보내야 할 텐데. 쓸 수 있겠지?’
일단 수도꼭지의 물을 튼다. 글은 마감이 쓴다는 말도 있지 않나. 그나저나 어제 그 모임에 가지 말았어야 했나. 한때 같은 조직, 프로젝트에 속해 한마음으로 달리던 동료들인데 시간이 지나 소속, 생애주기, 관심사가 달라지면서 처음으로 재미가 없다고 느꼈다. 공통의 대화 주제를 찾으려면 노력이 필요했다.
이미 지나간 일. 부질없고 쓸데없는 생각을 주방 세제 묻힌 수세미로 벅벅 씻어 낸다. 개수대에 쌓인 접시가 조금씩 줄어든다. 스테인리스 스틸 팬 바닥에 굳어 있는 카레에 뜨거운 물을 받아 불려 놓는다.
냉장고 문을 연다. 어제 만든 카레가 담긴 통이 보인다. 잊고 있던 다른 반찬 통도 보인다. 아내가 호기롭게 수박 한 통을 사서 한입씩 먹기 편하도록 잘라 놓은 다음, 나머지를 냉장고에 보관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이거 나중에 송이랑 간식으로 먹어.”
초반에 열심히 먹긴 했다. 최근 1~2주 동안 부부 둘 다 일이 바빠지면서 수박을 깜빡했다. 수박 통을 여니 시큼한 냄새가 난다. 상해 버렸네. 미안해 수박. 다른 통을 여니 반조각 남은 애호박도 상태가 좋지 않다. 미안해 애호박.
설거지를 마쳤다. 싱크대 거름망에 남은 음식물과 상태가 좋지 않은 수박, 애호박 조각들을 음식물 처리기에 넣는다.
재생(▶)처럼 생긴 버튼을 누른다. 신나는 노래 대신 프로그래밍된 여성의 음성이 나온다.
“친환경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시작합니다.”
몇 시간 뒤면, 잔반들은 부글부글 뜨겁게 달궈져 한데 섞인 다음, 잘게 부서져 재처럼 가루로 남겠지.
2. 먼지, 녹, 재
고무장갑을 벗는다. 오른쪽 팔꿈치와 손목 사이에 새겨진 타투가 눈에 들어온다.
‘DUST, RUST, ASH’
아, 내게도 타투가 있었지? 서른한 살이 되던 해,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타투를 했다. 그때만 해도 타투 하나를 하려면 큰 각오를 해야 했고 이걸 몸에 새기는 순간 내 인생이 크게 바뀌는 줄 알았다. 불과 10년 만에 존재마저 망각하다니. 하긴, 이런 게 비단 타투뿐이랴. 처음에는 가느다란 펜촉으로 쓴 듯 글씨가 얇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제법 두툼해졌다.
내 몸 일부에 DUST, RUST, ASH를 새긴 이유. 결국 우리 모두는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녹슬고 재가 되니까 있을 때 잘하자고.
그즈음 2종 소형 면허(바이크 면허)도 땄다. 2015년 5월, 첫 직장을 관두고 돌아올 기약 없이 모터사이클 여행을 떠났다. 타투에 새긴 문구 ‘먼지, 녹, 재’는 결과적으로 그 여행을 대변하는 단어가 됐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반년 동안 약 2만6천 킬로미터를 주행하는 동안, 바이크를 비롯해 마음에 쌓인 먼지, 녹, 재를 닦아 내는 게 주된 일과였기 때문이다.
특정 시기의 강렬한 경험은 이미지로 남는다. 온종일 모터사이클을 탔더니 그때 경험이 주로 시각과 청각 이미지로 남았다. 끝없이 이어진 도로와 지평선, 바람이 헬멧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 엔진 배기음, 차체의 진동이 종종 마음에서 같이 재생된다.
당시 퇴사 직전까지 오전 8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을 반복하던 터라, 여행자 겸 백수가 돼서도 그 패턴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오전 4시간 주행, 점심 먹고, 다시 오후 4시간 주행. 간혹 도로에서 열한 시간을 달리며 초과 주행한 적도 있고, 길을 잘못 들어 하루에 833킬로미터를 달린 날도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이미 하루치 에너지를 다 쓴 상태라, 바이크를 정비하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뒤,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인 동시에 가장 의미 없는 질문은 ‘그래서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거였다. 물론 틈틈이 관광을 했고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내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바이크 안장 위였고, 가장 많이 본 풍경은 계기판 너머로 본 도로였다. 그저 계속 달렸다. 달리고 달리다가 이제 돌아가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어 귀국했을 뿐이다.
두 바퀴는 네 바퀴와 달리 멈추면 넘어진다. 이런 속성 때문인지 달릴 때면 멈추고 싶지 않은 관성이 생기고, 달리는 행위에만 집중한다. 왼쪽, 오른쪽 풍경을 호젓이 살피며 느긋하게 달릴 법도 한데, 막상 스로틀을 당길 때면 그럴 여유가 없다.
대신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에 놓인 하얀색과 노란색 선을 보며 묘한 안정감을 느끼곤 했다. 그 선들은 곡선 구간을 지날 때 출렁였고, 시야 끝까지 직선으로 죽 이어져 있으면 내가 멈춘 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정적이기도 했다. 소실점에 시선을 고정하고 온몸을 모터사이클 조작에 맞춘 뒤 한두 시간을 주행하면, 그때부터 마음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어쩌면 그 순간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여정 초반 다양한 사건 사고로 시끌벅적했던 마음이 러시아를 지나 노르웨이의 멋진 풍경 앞에서 그 정점을 찍고, 서유럽으로 넘어오면서 잠잠해졌다. 이제는 거대한 자연이나 웅장한 건축물보다 사람들의 풍경 속에 감탄할 때가 더 많다. 더불어 스스로의 내면을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다. 모터사이클에 앉아 있는 동안 두 손과 발이 브레이크와 기어, 클러치 조작으로 묶여 있어 사실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생각뿐이기도 하다. 이걸 들은 인숙 씨는 <몸을 앞세워 하는 수행> 같다고 했다.
— 2015년 11월 3~6일 일기 중
한편 ‘(육로로 연결된 곳이라면) 어디든 홀로 갈 수 있다’고 무한정 주어진 자유는 나를 고독하게 했다. 진정 자유롭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
처음 모터사이클을 배에 싣고 동해 항에서 출발할 때 앞으로 다가올 여정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마지막 여정지인 일본 나리타 공항을 떠나 집으로 돌아올 때에도 ‘모르겠다’란 네 글자만 남았다. 긴 여행을 다녀오면 인생의 실마리를 풀 법한 힌트 정도는 발견하는 줄 알았다.
똑 부러진 답을 쥐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 속상했지만, 그럼에도 길에서 몇 가지를 배웠다. 내 원점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아는 게 왜 중요한지 알았다.
그 어느 시절보다 세계를 크게 둘러보고 왔지만, 역설적으로 내 시선은 깊은 내면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와 함께 살 수 있을까. 나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 그 길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찾는다 해도, 용기 내어 걸어 볼 수 있을까. 자존감과 자존심이 덩달아 뒤엉키며 에고를 뜨겁게 달궜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손현
서울 북촌에 산다. 별일 없으면 간단히라도 세끼를 모두 챙겨 먹는다. 저녁은 가급적 아내와 다섯 살 송이와 집에서 먹고자 한다. 종종 아이가 남긴 음식은 내 몫이 되지만, 나조차 못 먹겠으면 음식물 처리기로 넘긴다. 이따금 모터사이클 배기음이 들리면, 나도 모르게 소리의 근원을 찾는 습관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