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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 끝낼 수 없는 싸움에 휘말린 시
"싸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싸워야만 트이는 숨통도 있다." 서윤후 시인이 싸움에 휘말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시를 소개합니다.
글: 서윤후
202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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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랫동안 대결하는 시들을 좋아했다. 기꺼이 싸움에 휘말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시들. 글자에도 땀이 날 수 있고, 기진맥진한 목소리가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다. 시에서 싸운다는 건 끝끝내 알아내고 싶은 것에 다가서는 절박함과 투지였으니까. 끝나지 않는 싸움, 결코 끝낼 수 없는 싸움에 휘말리는 시들은 어떤 용기의 전제 조건이 되기도 했다. 싸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 있고, 싸워야만 트이는 숨통도 있어서 우리는 시 안의 싸움에 기꺼이 휘말리며 대결한다. 승부가 없는 세계. 승패가 중요하지 않은 다툼. 그 불화 속에서 켜진 것은 한 사람이다. 한 편의 시는 그렇게 시작되기도 한다.

 


 

목숨도 타고 작두도 탄다는데

 

고맙지, 기꺼이 사랑해주지

 

이승과 저승 사이 무너질 벽, 당신

 

몸 걱정일랑 하지 마 만신창이가 되어줄게

 

히죽히죽 돼지처럼, 그래

 

이승부터 엎어주지

(「만신」의 부분, 『액션페인팅』 80-81쪽)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잭슨 폴록이 남긴 ‘액션페인팅’과 동명의 제목을 가진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액션페인팅은 남자에게 폭행당한 여자의 몸으로 비유된다. 그러면서도 “기꺼이 사랑해주”겠다고 단언하는 화자는 자신을 방어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장까지 들춰서 까발리는 방식으로 자신을 해체하는 보호를 선택한다. 해체가 보호라니. 그 절박한 절경이 도시 풍경 속에서 아스라이 그려진다. “만신창이”를 자처하는 화자의 상처가, 사람들이 희망 따위로 붙여놓은 반창고 너머로 곪아가는 얼굴 그 자체일 때, 이 액션페인팅의 화가가 누구였는지 생각해본다. 그 사람은 엎어진 이승에서도 잘 살고 있을까. 지금 시인은 어디에 있을까.

 

 


 

내 살을 발라내고

내 뼈를 햇볕 아래 널었다.

 

장님의 허리띠에 나를 매달았다

허물 벗은 뱀처럼

긴 창자로 땅바닥을 끌었다.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은

사람의 외경이다.

 

네 빈 그릇을 채우는

검은 간장 먹은 살코기.

(「혼자 가는 뿔」의 전문, 『이연주 시전집』, 93쪽)
 

비린내 나는 골목 끝엔 집이 있고, 신음 없이 아이를 낳는 어린 사람도 있고, 술 취한 아비도 있고, 벼랑도 있다. 그곳은 어쩌면 “사람의 외경”이었을지도. 잃을 것 없는 풍경 속에서 시인은 끝없이 싸움을 저지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살아갈 수 없는 세계는 골목이 골목을 낳는 미로 속에서 끝없이 그려지기 때문에. 이 시는 손바닥만 한 짧은 시이지만, 유일하게 해방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싸움을 끝마치고 살을 발라내고 뼈를 널어둔 뒤에 얻은 자유처럼 느껴진다. 이 자유가 슬프게 느껴지는 것은, 잃은 것이 많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내경을 남몰래 간직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살얼음의 시림, 혀를 깨문 뒤에

괜찮다고 말하기까지

나 역시 마음이 읽히기를 바랐으니까. 한 번쯤

 

틀리더라도(다르게 적히더라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전과 같은 방식,

당신은 용서받기를 원했지, 내가 아닌 사람에게서. 알고 있었다.

나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어.

(「끈이 풀어지고」의 부분, 『둘이 거리로 나와』, 74쪽)

 

‘희박한 우리’에 대해 가장 다양한 종류로 이야기하는 시집이다. 희박하기 때문에 온갖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것처럼 무성하다. 그 무성함 속에서 ‘나’와 ‘너’는 원래 ‘우리’라는 하나로 세워볼 수 있는 단위였다가, 끝을 앞두고 있는 갈림길이었다가, 서로가 되어보는 수몰된 하나였다가, 서로가 서로를 탈락시키는 0의 원점이 된다. 나는 그것이 꼭 싸움처럼 느껴졌다. “틀리더라도(다르게 적히더라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의 마음, 용서 같은 것이 싸움 끝에는 꼭 필요하니까. 갈라진 마음의 고향일 테니까. 어째서 훼손된 ‘우리’를 복원하면 ‘나’로 돌아오게 되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시집이다.

 

싸우기 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아픔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싸우기 위해 나섰던 용기를 비웃고 싶지 않아서.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나를 구조하는 일. 싸움에 휘말린 시들을 보며, 내 안에 자빠져버린 나를 만난다. 손을 뻗어, 손에 닿아, 손잡는 일을 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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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거리로 나와

<오은경>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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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후

2009년 『현대시』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나쁘게 눈부시기』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고양이와 시』가 있다. 시에게 마음을 들키는 일을 좋아하며 책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