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돼지 꿈
『만화 프로이트 꿈의 해석』을 읽고
책을 집어 들었다. 얼마를 읽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때 꿈을 꾸었다. 꿈이 싱숭생숭해서 깨어났다. 문득 꿈속에서 거대한 돼지가 나왔었던 것이 생각났다. 아! 돼지꿈이로구나.
노비 문장(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 나는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며, 모든 꿈은 깨어 있는 동안의 정신활동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
『만화 프로이트 꿈의 해석』, 최현석 글, 이상윤 그림, 19 쪽
1.
화요일.
너무 일찍 눈을 떴다. 새벽 네 시였다.
작년 10월부터 회사를 새로 세팅하기 위해 준비했다. 사업 모델을 추가하고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신상품을 설계했다. 계획보다 한 달이 지연됐고, 얼마 전부터 <곁>이라는 3시간 집단 치유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영업했다. 그 사이 운영비는 바닥이 났고, 그 자리로 시시각각 불안감이 찾아왔다. 안되면 어찌하지? 열심히 살았는데 이 나이에 망가지면 어떻게 하나?
그랬을 것이다. 그 긴장감으로 새벽 일찍 눈을 떴을 것이다.
책을 집어 들었다. 얼마를 읽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때 꿈을 꾸었다. 꿈이 싱숭생숭해서 깨어났다. 문득 꿈속에서 거대한 돼지가 나왔었던 것이 생각났다. 아! 돼지꿈이로구나. 그러고 보니, 난생 처음이구나!
족히 이만한 돼지가 등장했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살짝 흥분감이 밀려왔다. 시작하는 새 사업의 예지몽인가? 잊어버릴까 봐, 나는 휴대폰 메모장에 꿈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쓰다 보니 내용이 페이스북 포스팅용으로 바뀌고 있었다.
<리얼 생생 드림 다큐- 과연 돼지꿈은 복을 줄 것인가?>
새벽 6시에서 7시 사이 꾼 꿈.
한 노인이 상의를 벗고 안마 침대에 엎드려 있고 눈을 감고 있음. 자는 듯 고요한 얼굴. 모르는 사람들이 몇 명 주변에 서 있고 노인은 수기치료와 같은 어떤 시술을 받고 있는데 거대한 집돼지가 등장.
돼지는 자꾸 노인의 귀를 핥음. 아들로 보이는 또 다른 노인이 돼지를 경계하며 쫓음. 나는 좀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음. 두세 차례 더 돼지가 노인의 양쪽 귀를 핥고 아들 노인이 돼지를 쫓음. 나는 그때부터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하며 지켜봄.
아니나 다를까, 거대한 돼지가 노인의 귀를 물어뜯음. 노인은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당함. 아들 노인이 칼을 들고 달려와 돼지의 목을 찌름. 거의 썰어 댐. 돼지는 여전히 귀를 놓지 않고 주변은 아수라장이 됨. 그럼에도 피는 보이지 않고 돼지 목이 날아갈 지경인데 돼지는 노인의 귀를 여전히 물고 있고 나는 끔찍해 손으로 눈을 가림. 그리고 잠에서 깸.
돼지 꿀꿀, 기분 꿀꿀. 그러다 문득, 어머나 내 평생 돼지꿈을 처음 꾸었네, 라고 깨닫게 됨. 마침 딸이 들어와 “아빠 잘 잤어?”라고 했고 꿈 이야기를 말 하면 복 나갈까 봐 아무 말 안 함. 그리고 조용히 네이버 창에 검색어를 침. “ 돼지가 사람을 공격하는 꿈.” 네이버가 답함.
1) 돼지 죽인 건 일이 잘 시작됐으나 끝이 용두사미--------망해랏, 네이버!
2) 사람을 공격하는 돼지를 죽이는 건 누군가 윗사람의 도움 받아 어려움을 벗어난다는 뜻----------이건 맘에 드네.
3) 꿈에서 돼지를 죽이는 게 흉몽이라는데 그렇지 않아요. 꿈은 반대.----흥해랏, 네이버!
누구 말이 맞을까? 태어나서 처음 꾼 돼지꿈. 이런 건 말하면 안 된다는 데 입이 간지러워서 살 수가 있어야지.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일단 며칠 살아보고 결괏값 공개하기로.
페이스북으로 옮기려는데 후배 얼굴이 떠올랐다. 시간 나면 점 보러 다니고 심심하면 남 사주 봐주는 그 후배에게 카톡을 날렸다.
나: 꿈에 돼지 나왔다.
후배: 얘기하지 마요. 그런 건. 몰래 로또 사는 거야.
나: 내용을 페이스북에 올려도 안 돼?
후배: 내용은 안돼요. 좋은 꿈 내용은 공유하는 것 아님.
그 말에 나는 페이스북을 닫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출근한 후 뭔가 든든하고 설레는 맘으로 일하다 오후에 로또 다섯 장을 샀고 선배와의 저녁 약속을 위해 전철을 탔다.
2.
골프를 배우기 전에 『골프 천재 탄도』를 봤고 테니스를 배우기 전에 『테니스의 왕자』를 읽었다. 만화는 내가 새로 시작하는 운동의 전체적 규칙과 게임의 기술 등을 이해시켜줬고 입문의 동기를 강화했다. 지루할 수 있는 역사도 만화로 읽으면 완독이 가능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대표적인 케이스. 고전도 예외가 아니다. 어린 아들 읽으라고 주문했던 <만화 인문고전 50선>은 짬짬이 한 권씩 빼서 후두둑 읽는 내 애독서 중 하나다.
오락으로서의 만화가 가진 즐거움을 떠나 이렇게 지식적인 매체로 만화를 활용할 때 속도감은 장점이면서 단점이 된다. 두세 시간이면 마키아벨리 『군주론』과 헤로도토스 『역사』를 읽어 버리지만, 사유를 통해 독자가 소화해 내는 그 중요한 과정은 약하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도 그랬다. 시험을 위해, 단순한 독서를 위해, 꽤 많이 이 책 저 책을 뒤적였었다. 번역서만 15종이 넘는 책. 그러나 단 한 번도 그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돼지꿈을 꾸고 나서, 그것을 2시간 만에 봤다. 그 안에 무슨 해몽의 비법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 아니라 정말 우연히도 그 책이 방 안에 뒹굴고 있었고 그래서 봤다. 프로이트의 일생부터 꿈 해석과 꿈의 왜곡 현상, 꿈 작업과 꿈의 재료 등까지 한달음에.
역시 시기가 시기였기 때문일까, 나는 프로이트의 학문적 업적보다 이 지난한 꿈 해석 과정과 배신과 병 등 불우했던 그의 인생이 더 묵직한 비감으로 남았다. 자기 자신을 실험용으로 쓰면서 무의식의 영역을 탐구하고 유대인이라는 것으로 가슴 졸이고 학계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으며 주변 사람을 잃어가는 그의 고단한 삶 위에 최근의 내 힘듦이 겹쳤다.
그랬기에 돼지꿈에 대한 해몽을 프로이트 적인 분석법으로 하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돼지는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대상의 왜곡이며 그것을 죽인 것은 내 욕망의 억압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류의 분석이, 반백 년을 살아 놓고도 행여 복 나갈세라 딸에게도 꿈 이야기를 하지 않고, 후배의 말 한마디에 써놓은 글을 봉인하는 그 은밀하고 내밀한 두근거림보다 어떻게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인가. 나는, 돼지꿈을, 유능한 점쟁이가 내려준 부적처럼, 이 긴장되는 나날의 해독제로 쓰고 싶었던 것이다.
3.
그날 술 자리는 선배가 1차, 2차, 3차를 다 샀다. 사업이 힘든 후배를 위한 선배의 자상한 배려였지만 나는 행여 이것이 돼지꿈의 전부일까 봐 살짝 불안했다. 다음 날 아침, 선배가 내 신상품 <곁>의 첫 번째 클라이언트가 될 것을 오케이 했다. 그 내용과 상관없이 당신이 만든 것이니까, 라고 첨언했다. 몇 개월 준비했던 새 역사 첫 마수걸이를 선배가 해준 것이다. 네이버 두 번째 해몽이 맞아 떨어졌다.
사람을 공격하는 돼지를 죽이는 건 누군가 윗사람의 도움 받아 어려움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로또 발표일까지 두 밤 남았지만 내가 맞은 로또는, 그 선배가 준 든든한 응원이었다. 나 혼자 외줄을 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불안했지만 내 주변에는 선배처럼 한결같이 믿어주고 지지하는 감사한 이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라는 재확인이 로또였다. 그들 하나하나가, 그러므로 고맙고 잊지 말아야 할 복돼지들일 테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인류사의 위대한 인문학이라면 지금 내가 즐기고 있는 <돼지꿈 보다 해몽>은 뭔가 잘 될 거야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뽕과 같은 긍정성, 그래서 사람들이 그토록 돼지꿈 타령을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본 칼럼은, 로또를 이미 샀으므로 이제는 꿈 이야기를 공개해도 된다는 그 후배의 허락을 득한 후에 쓰게 된 것이므로, 부정 탈 일은 전혀 없는 것임을 나 홀로 공증함. 어쨌거나 로또는 아직 유효하다는 말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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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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