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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추얼 남친 잔혹사

함부로 가상연애 하지 마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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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의 에센스를 조금만 덜어낸다면, 가급적 현실에 맞춰 ‘그럴 듯하게’ 만들어낸다면 이 버추얼 짝꿍은 당신의 평화로운 일상을 지켜줄 수 있다. 특히 한 번 보고 말 사이라거나, 그다지 깊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데 사적인 질문으로 당신을 귀찮게 하는 오지라퍼들을 물리치는 효과로 직빵.

아아, 때는 꽃 피는 봄이었읍니다. (쿵짝) 요즘 추억팔이가 유행이니 그런 시류에 편승하여 나도 하나 슬쩍 얹어보고자 한다. 옛날 옛적의 일이다. 갓 스무 살에 접어든 나는 절친한 친구와 대학에 입학하면서 약속을 하나 했다. 그것은 서로 남자친구가 생기면 에버랜드 장미축제에 가서 더블 데이트를 하자는 크흐흑...크그그그그으능리ㅏ넝리ㅑㅤㅗㄱ후ㅤㅑㄴ우피ㅏ우리;ㅤㅏㅈ너릊디ㅡ;....

 

후욱후욱. 방금 빠져나가려는 영혼을 간신히 포획하고 손발을 다림질했습니다 오바. 그래 뭐 지금 생각하면 이불킥을 하다 못해 부끄러워서 침이 절로 흐르지만, 그때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장밋빛 미래는 그런 거였다. 연애는 세련되고 자유로운 어른의 상징이었으니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교문에 잘생긴 남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몰려들어 방충망을 무너뜨린 꿩처럼 건강한 여고생은, 대학 가면 남자친구가 생긴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었다. 장미가 다 지도록 나는 “빗방울처럼 혼자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일은 나에게만 일어나지 않았나보다. 친구들이 속속 남자친구가 생겼음을 통보하기 시작했다. 굳이 남자친구가 아니라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거나 썸 타는 상대가 생겼다. 마치 비온 뒤 일어나는 죽순처럼 어마어마한 기세로. 그러니까, 나.만.빼.고.

 

당시에는 SNS가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았지만 싸이월드가 있었다. 싸이지앵들은 전체공개 다이어리에 뜬금없는 하트를 띄운다거나, 수상한 관계명을 달고 일촌평을 남기는 식으로 자신들이 목하 열애 중임을 표출했다. 사진첩에 하트 폴더가 생기고 연인과의 사진이 올라오는 방식도 빼놓을 수 없지. 처음으로 사회로부터 연애를 승인 받은 봄,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였다 하면 연애 이야기였다. 박수부대를 댓글부대처럼 알바로 쓰면 금방 부자가 될 만큼 박수도 잘 치고 맞장구도 잘 치는 나였지만, 그 핑크빛 기류에 금방 싫증이 났다. “넌 뭐 없어?”라는 질문이 만날 때마다 반복되었고, 없다고 하면 친절한 친구들은 “왜 없을까”를 함께 고민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왜 없을까”가 앞에만 서면 나는 프루쿠루테스의 침대에 눕혀진 것처럼 이리저리 재단되었다. 나는 구제와 조언의 대상이었다. 나는 연막을 치기로 했다. 좋아 그깟 연애, 나도 한다 이거야! 그러니 더 이상의 오지랖은 넣어둬 어허 넣어둬! 이런 버추얼 남친이 필요해지는 연말이다. 각종 오지랖을 반사할 수 있는 액땜 인형처럼, 나의 레시피를 바탕으로 버추얼 짝꿍을 만들어보자.

 

~계간홀로가 버추얼 남친을 만들 때~
(유명한 짤이 있지만 저작권과 나의 합성 실력 부족 등으로 텍스트로 대신한다)

 

일단 이름을 정하자! 멋짐이 5스푼 필요했다. 그 당시 나는 프로 농구를 좋아해서 원정 경기를 보러 시외버스를 타고 원주나 안양까지 다녀오곤 했다. 좋아하던 농구 선수의 이름에서 한 글자, 7년 간 좋아했던 구(舊) 오빠의 이름에 한 글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민혁”이었다. 크. 그야말로 남자 주인공이 되기 위해 태어난 이름 아닌가? 외자면 더 완벽했을 것이다. 그 다음은 로맨틱 10스푼. 우리의 첫 만남은, 어쩐 일인지 대학생인 내가 공고의 담장 위에서 뛰어내리다가 그 앞을 지나가던 민혁이와 부딪치면서 이루어진다. 민혁이는 이 못난이는 뭐냐고 난리 치는 자신의 뺨을 때린 나에게 반하고 외친다. “날 때린 여자는 니가 처음이야.” 캬! 로맨틱! 성공적! 대충 키는 180에 몸무게는 39키로로 하자. 아니아니 그러면 존나세 씨랑 너무 프로필이 겹치니까 45키로…헐 나보다 가벼워서 내가 뛰어내리면 즉사하겠는데? 중2를 3스푼, 교복 모에를 2스푼. 민혁이는 당연하게도 1년 꿇어서 성인인데도 고등학생이었고, 뺨에는 반창고를 하나 붙이고 있었으며, 오토바이를 탔고, 서울 출신이면서 어쩐 일인지 혼자 오피스텔에서 자취를 했다. 마지막으로 이복형제를 1스푼, 차가운 도시 남자의 외로움 2방울…좋아, 완벽해! 그렇게 탄생했다. 나의 버추얼(virtual) 남친, ‘민혁이’는. 이 설정이 다소 세기 초 냄새가 난다고 하더라도 뭐 어떤가. 이 쟈가운 도시 남자 설정은 지금도 잘 팔리는 것 같더라. 당시 나는 “뭐 없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에게 새로운 무기를 내놓는 김박사처럼 자신만만하게 민혁이 1호를 소개시켰다.

 

친구들 : 야 너 아직도 뭐 없냐?
나 : “아 사실 나도 요새 만나는 애 있지~.”
친구들 : “오오 대박대박! 누구야?”
나 : “강민혁이라고…”
친구들 : “민혁이? 뭐하는 앤데?”
나 : “으응…1년 꿇은 공고 일진☆”

 

484_e3.jpg

출처_ MBC

 

아니 안 혼또니. 물론 뻥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가상이었지만, 민혁이와 나의 러브 스토리는 즉각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재미를 붙인 친구들은 만나는 족족 우리(?)의 근황을 물었고, 나는 로맨스의 공식에 충실히 따르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민혁이와 나의 전쟁 같은 사랑(ㅋ)은 가히 무용담에 버금갔으니, 나는 그렇게 연애담이 독점한 수다의 장에 뛰어들 수 있었다. 로맨스의 공식이야 발에 채일 만큼 널렸으니 그것을 즉각적으로 패러디하면 ‘썰’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게 된다.


-야, 민혁이 지금 정문 앞에서 너 기다리는데?


이건 또 무슨 모니터에서 사다코 기어 나오는 소리래. 나는 코로 방귀를 뿡뿡 꼈다. 그런데 진짜 있었다. 한 무리의 남자 고등학생들이, 학교 정문 앞에 오토바이를 대놓고! 민혁아, 너니…? 나는 피조물이 움직이는 것을 본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당황하며 도망쳤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현실로 튀어나온 민혁이는 싸이월드를 시작하기 이른다. 친구들과 놀러갔다 온 사진에 ‘민혁’이라는 이름의 덧글이 달린 것이다. 뜨슈ㅣ! “어딜 자꾸 돌아다니는 거야 내 여자 안되겠네” 뭐 이런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로그아웃을 하고 덧글 남기기를 하면 작성자 이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데, 그 기능을 이용한 친구들의 취미생활? 뭐 그런 거였다. 민혁이는 종종 내 싸이월드에 출몰해서 진짜 남친처럼 나를 고나리했다. 치마가 짧다느니 오늘은 뭐 했냐느니 왜 전화 안 받았냐느니. 처음에야 재미있었지만, 점점 내 생활을 잠식하는 민혁이에게 질린 나는 이 버추얼 연애를 끝내기로 결심한다. 마침 썸남도 생긴 터라, 민혁이가 도배한 미니홈피를 볼까봐 걱정도 됐고. 만남이 그러했듯, 이별도 드라마틱해야 했다.

 

나 : “얘들아, 이제 더 이상 나한테 민혁이 얘기 하지 마.”
친구들 : “왱?”
나 : “민혁이...하늘나라로 갔어...흑...비오는 날 오토바이 타고 나 보러 오다가...”

 

크! “비 오는 날이면 이게 민혁이 눈물이라고 생각할 거야...” 이보다 완벽한 로맨스가 있겠냐능? 나는 나를 각종 오지랖에서 구해주다 못해 내 친구들에게 큰 웃음을 안겨준 민혁이와 이별을 고하고, 현실 남자 사람과의 로맨스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세상 일. 시작할 땐 마음대로였지만, 끝날 땐 아니란다. 민혁이는…죽여도 죽지 않는 남자였다.

 

BB.9149391.1.jpg

출처_ MBC


비 오는 날 썸남과 산 하나를 나눠 쓰고 걷던 나에게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나는 죽은 게 아니라 사고 때문에 기억을 잃었던 거다. 그 사이 다른 남자를 만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이제 너를 되찾겠다.” 그러니까 민혁이는, 내가 멋대로 오토바이 사고로 보내버린 저 세상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다. 기억상실 3 스푼을 추가해서 더 강려크해진 민혁이 2호의 등장이었다. 아 씨 소오름. 소오름! 돌아온 민혁이의 저주 때문인지(?) 그 남자와는 잘 안 되고 끝났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혼자가 되었다. 얼굴을 본 적 없으니 확신은 못 하겠지만 아마 민혁이 2호의 눈 밑에는 인상을 바꿔줄 점 하나가 찍혀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도 민혁이는 심심한 친구들에게 빙의해 나에게 문자를 보냈고 미팅이라도 나갈라 치면 미니홈피에 깽판을 쳤다. (넌 내 거야! 와장창!) 나는 플랜 B를 가동했다. “민혁이 어머니가 찾아와서 흰 봉투를 주고 갔다”는 내 말에 친구들은 또 다시 우리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슬퍼…하기는 개뿔 재밌어 죽었지 아주? 응?


민혁이 3호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도서관 내 자리에 간식을 올려놓으면서 부활했다. 아니 예수님이야 뭐야ㅠ 그것도 아니면 내 친구들 중에 부두교 신자가 있나 자꾸 죽은 애를 살려내고 난리.“이거 먹고 힘내라 내 사랑 ?민혁” 뭐 이런 쪽지와 함께 놓여 있는 마이쮸를 보고, 나는 이 질긴 인연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은 가혹한 운명을 긍정하는 초인의 자세, 운명애, Amor fati...(같은 소리하고 있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피조물과 대결하며 세상의 끝까지 가듯이, 나도 민혁이와 갈 데까지 가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온 세상이 나서서 갈라놔도 절대 깨지지 않는 것이 완전 =무결한 사랑의 공식 아니겠냐며. 내가 민혁이를 창조할 때 온 세상 로맨스는 다 긁어다 아낌없이 퍼부었으니, 우리는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러니 내가 지금까지 홀로이며 계간홀로를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민혁이를 향한 순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충격적 반전을!!! 여러분은 지금 보고 계십니다!!!!! 하하하하하!! 어떠냐 속았지!!!! 캬하하하하핳!!!!


하지만 진짜 유용하긴 하다. 로맨스의 에센스를 조금만 덜어낸다면, 가급적 현실에 맞춰 ‘그럴 듯하게’ 만들어낸다면 이 버추얼 짝꿍은 당신의 평화로운 일상을 지켜줄 수 있다. 특히 한 번 보고 말 사이라거나, 그다지 깊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데 사적인 질문으로 당신을 귀찮게 하는 오지라퍼들을 물리치는 효과로 직빵.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는 이 버추얼 짝꿍을 악귀 쫓는 부적처럼, 팥알처럼 뿌려버리고 따뜻한 이불 속에서 뒹굴어보자. 이것저것 설정 추가하기 귀찮다면, 혹은 꼬리가 길어져 밟힐까봐 걱정 된다면 상대가 잘 모르는 어딘가로 보내버리면 된다. 음, 예를 들면…국가 원수도 권유하는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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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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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진송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

승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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