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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순이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찐득한 사람이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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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빠순이를 발로 찬다. 소속사 직원은 물론 강한 친구들로 대표되는 안전요원들과 방송 스텝, 그리고 1도 관련 없는 생판 남까지. ‘어린 여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평등한 고객의 권리조차 누리지 못한 채 빠순이라는 불가촉천민이 된다. 이것은 비단 취미의 영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몇 년 전, 오랜만에 U턴을 해서 아이돌에 빠졌을 때 나는 갈라테이아의 입술에 도는 온기를 확인한 피그말리온에 버금가는 환희에 사로잡혔다. “내가! 실존하는! 인간을! 좋아하다니!” 그렇다, 그것은…현실에 없다는 이유 하나로 가슴 속에 소중히 품고 있던 종이 남친(대체로 이 남친의 직업은 소년만화의 주인공의 라이벌 혹은 친구 혹은 동료이다)에 대한 순정을 짓밟혀온 덕후가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한동안 사랑에 눈이 멀어,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 연예인이 내 연예인이다 자랑했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 살아 숨 쉬는 인간, 눈코입이 올록볼록한 3차원 사람을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회적 문법’을 준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크으. 너무 순진해따.


냉혹한 현실을 인지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상은 금방 나에게 ‘빠순이’라는 주홍글씨를 붙였다. 날 빠순이라고 부르는 건 상관없어, 사실이니까. 하지만 날 빠순이라고 놀리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물론 ‘퀴어’의 전유처럼 빠순이라는 단어 역시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어감이 많이 변했지만, 빠순이가 빠순이를 빠순이라고 부를 때와 빠순이가 아닌 사람이 빠순이를 빠순이라고 부를 때(헥헥)의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집단 외부에서 사용하는 빠순이의 의미는, 명백한 비하와 조롱을 담고 있다. 빠순이라는 이름에서 추출할 수 있는 두 가지의 특성은 ‘어린 여자’인데, 이때 어리다는 것은 실제의 나이를 뜻한다기보다 개념적 정의이다. 애초에 “오빠!”를 부르짖는다고 해서 탄생한 이름이지만, 빠순이의 연령대 스펙트럼은 비-빠순이들의 상상보다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오프라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빠순이들은 대체로 10~30대의, 객관적으로 젊은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사람들에게도 빠순이 하면 젊은 여성들만 보이는 법이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밑밥을 까냐면, 우리 사회의 오랜 관습인 빠순이 혐오와, 요즘 들어 더더욱 기승을 부리는 여성혐오는 상동관계에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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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에 빨대 꽂는다는 표현이 있다. 혹은 감정이 있는 ATM. 포토카드를 모으려고, 사인회에 당첨 되려고, 콘서트에 가려고, 굿즈를 사려고, 빠순이들은 개미처럼 입금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아이돌뿐만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업계 종사자들의 ‘밥줄’이 된다. 공개방송처럼 무료로 진행되는 행사라고 할지라도, 없는 방청객은 돈을 주고라도 사와야 하고 결국 그 콘텐츠의 소비자들이 빠순이라는 점에서, 자리를 채우는 빠순이들은 소비자일 뿐 아니라 돈 한 푼 안 받고 일하는 파트타임 노동자이기도 한 셈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은 불특정 다수인 소비자가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이다. 자신이 지불한 값에 준하는 물건/서비스를 받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의를 제기하고 합당한 배상과 사과를 받는 것. 왕일 필요도 없고, 딱 그 정도면 족하다. 그러나 빠순이들의 현실은? 녹화가 끝나고 들어가는 ‘오빠’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네는 것만으로 방송국 스텝에게 혼쭐이 나고 눈 부라림을 당한다. 행사를 맡은 아나운서는 빠순이들에게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오빠’를 불러주지 않겠다고 협박하고, 그 자리를 채우게 한 장본인에게 비아냥대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사전녹화나 사인회는 늘 예정보다 늦어져 열악한 환경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안전 요원들은 벌레 보듯 쳐다보고 촬영 관계자는 “되게 할 일 없으신가 봐요.”하고 빈정거린다. 사랑을 저당 잡힌 죄로, 빠순이들은 그냥 을이 아닌 불가촉천민이 되는 것이다.


물론, 다수의 관객을 통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사랑에 빠져 있다면, 굳이 빠순이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어느 정도는 이성이 마비되기 때문에, 안전사고를 막기 위한 단속은  필수다. 그건 당연하다. 하지만 과잉 진압(?)의 순간순간, 물음표가 떠오른다. “지금 나를 이렇게 윽박지르는 이 스텝, 왜 저기 있는 빠돌이에게는 아무 말 하지 않을까?” “새우젓이면 다 같은 새우젓인 줄 알았더니, 암수 구별을…한다?” 여기서 빠돌이라는 존재가 차지하는 특이한 위치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자. 빠돌이는 남자 팬을 지칭하는데, 단지 빠순이가 먼저 생겨났다는 이유로 여성을 뜻하는 접미어 ‘순이’ 대신 남성을 의미하는 ‘돌이’가 붙어 고착화되었다. 그들은 절대 오빠오빠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이들은 머릿수에서는 빠순이들에게 밀리는 소수자이지만, 자리 선점을 위한 몸싸움에서 유리하기 때문에 딱히 약자라고는 할 수 없다. 결정적으로―안전 요원이나 스텝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기준이지만. 이건 현장을 좀 뛰어보면 알 수 있는데(아 내가 막 엄청 많이 뛰고 그랬다는 건 아니고ㅎ 근데 왜 갑자기 땀이 나지;;) 똑같은 행동을 해도, 결국 줘터지는 건 빠순이다. ‘어린 여자’는 굳이 빠순이가 아니어도 여러 모로 만만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실 여성 소비자들이 정당한 대접을 못 받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여성들의 취미와 소비는 사치나 낭비로 직결되고, 때때로 그 분야 자체가 싸잡아 무시당하기도 한다. 화장이나 네일 아트, 명품 브랜드 수집에 대한 비난이 여기에 속한다. 한편 남성 소비자들이 주를 이루는 분야에서 여성 소비자에게 놓이는 것은 ‘얼빠(=얼굴 빠순이)’ 아니면 ‘남자보다 더 잘 아는 순수한 팬’이라는 극단적 선택지뿐이다. 대표적인 예로 프로야구를 꼽을 수 있다. 여성 관객의 증가는 프로야구 흥행의 1등 공신이지만, 술 먹고 싸움질하는 것보다 더 욕을 먹는 것이 선수를 보고 환호하는 여성 관객이다. 빠순이들은 상대적으로 어리고, 여성이기 때문에, 생각이 없거나 감정적이거나 한심한 존재로 낙인찍히며 심지어 같은 분야를 향유할 자격을 검증 당한다(feat. 인필드 플라이가 뭔지나 알아요?). 그리고 이것은, 비단 취미의 영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장동민을 포함한 유세윤, 유상무의 공개적인 여성 혐오 발언에 대항하여 여성들이 프로그램 하차 운동을 벌이고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방송국과 스폰서 기업에 항의를 한다. 미디어 분야에서 여성 소비자의 비율은 압도적이지만, 가해자는 물론 제작자들도 이들의 문제 제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여성들의 징징거림, 과도한 감정적 대응, 여자가 한을 품어 내리는 서리, 누군가의 밥줄을 끊으려는 음모론, 대중들의 광기 정도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정치에나 신경 쓰라”거나 “연예인에게만 도덕적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대지 말라”는 훈계도 풍년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정치이다. 지금까지 미디어에서 자행되어온, 그리하여 결국에는 우리 사회를 이 지경까지 끌고 온 약자에 대한 폭력과 혐오 발언을 저지하려는 시도이자 가해자에게서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각오이다. 연예인에게 죽자고 매달려 물어뜯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옹달샘 개인에 대한 불호와는 무관하고, 그를 죽이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혐오 발언은 용인되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 합의와 미디어 구조의 변화, 그리고 사과를 요구하는 피해자를 개그 소재로 삼는 것은 웃기지 않다는 보편적 감수성이 이 움직임의 목표이다.

 

뭐, 어차피 이 운동을 왜곡하며 여성들의 정치적 움직임을 ‘정치가 아닌 것’으로 끌어내리려는 이들은 이 글을 읽지도 않을 것이고, 절대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을 테니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


빠순이를 혐오하니까 여자들을 우습게 보는 겁니까, 여자를 혐오하니까 빠순이를 우습게 보는 겁니까, 하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처럼 희대의 난제. 다만 무엇을 해야 할 지는 명징하다. 우리는 지치지 않아야 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데, 이를 저지하고자 연대하는 것에,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하는 일에. 무슨 말을 해도, 빠순이를 혐오하고 약자를 비하하는 사람들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약자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빠순이의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큰 ‘오빠’가 공개적으로 혐오 발언을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있다. 그런 식으로 더 많은, 해서는 안될 말이 무엇인지 확고하게 인지하고 있는 ‘오빠’와 ‘언니/내 새끼/존예(등등)’를 양산하고 미디어에 진출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의 약자 빠순이가 겪은 부당함에 ‘오빠’가 함께 분노하고 문제를 제기하여 사과를 받아내지 않았는가. 이럴 때 쓰라고 퀴어 운동에서 내놓은 기똥차게 멋진 문구가 있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아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빠순이의 사랑. 더 이상 어린 여자 빠순이가 아닌 그냥 여자 빠순이가 되는 날이 오더라도, 우리는 한 번의 스트리밍을 더 돌릴 지니! 


빠순이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찐득한 사람이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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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진송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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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송> 저12,000원(0%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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