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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시켜야 하는 남자, 보상해줘야 하는 여자

연애의 ‘기브 앤 테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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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데이트 코스를 번갈아가면서 짜고 더치페이 하라는 법이 생겨도, 대부분의 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데이트 코스의 참신함이나, 관계에서 남자가 기울이는 수고는 사랑의 진정성을 감별하는 기준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의 수치와 ‘이러려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증명, 다른 경쟁자보다 내가 더 진심이라는 신호가 필요하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가는데 두 개의 광고가 시간차를 두고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나는 숙박 예약 어플 광고로, “그녀가 ‘아무데나’라고 말했다”는 문구와 비장한 표정의 남자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자동차 공유 서비스 광고이고, (20대의) 여성이 남성의 팔짱을 끼면서 “오빠 우리 오늘 뭐해?(어디 가?)”라고 묻는다. 두 광고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는, 이 서비스가 데이트를 기획해야 하는 남자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연인 관계에서 데이트는 단순히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각종 퀘스트가 깔린 미션에 가깝다. 여자는 심플하면서도 화려하고 모던하지만 클래식한 것을 요구하는 클라이언트처럼 까다롭고 모호한 갑이고, 남자는 한겨울에 딸기를 구해 와야 하는 효자처럼 불가능한 요구에 고군분투하는 을이다. ‘아무데나’라고 말하지만 진짜 아무데나 가면 불같이 화를 내고, 숙제 검사를 하는 것처럼 오늘은 뭐하냐고 물어보며 압박하는 여자친구의 이미지는 미디어 곳곳에 깔려 있다. “내가 왜 화났는지 모르냐”는 표현은 두 사람 사이에 소통 갈등이 있다는 뜻이지만, 성별의 문제로 치환되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심중을 헤아려야 하는 남자들의 피로도’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피곤하고 이기적인 여자’를 상징한다. 일명 ‘여자어(語 )’, ‘남자어(語)’의 번역이 진위 여부와는 상관없이 연애의 꿀팁인 양 인터넷에 버젓이 돌아다닌다.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야 평화롭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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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도식은 매우 보편적이고 익숙하다. 자신의 어깨가 젖더라도 우산을 한껏 기울여주는 것이 로맨틱, 성공적의 정석이듯 연애 관계에서 남자는 최선을 다해 여자를 만족시켜야 한다. (얼마 전 다녀온 여행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풍경 중 하나도 여자친구를 예쁘게 찍어주려고 바닥에 엎드리다 못해 구르는 남자들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사회 풍조는 얼마 전 방영된 PD 수첩에서 여성혐오의 원인으로 지목 받았다. 데이트 코스나 비용을 남자들이 부담하는 것은 역차별이라는 주장이었다.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지만 인지 못하고 있는 듯하니 네 가지를 명료히 하고 넘어가겠다. 첫 번째, 혐오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두 번째, 그것은 여성이 조장한 차별이 아니며 세 번째, 오히려 여성이 더 불리하고 네 번째, 특정 현상에 불만이 있다면 ‘왜’ 그런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 당장 데이트 코스를 번갈아가면서 짜고 더치페이 하라는 법이 생겨도, 대부분의 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데이트 코스의 참신함이나, 관계에서 남자가 기울이는 수고는 사랑의 진정성을 감별하는 기준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의 수치와 ‘이러려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증명, 다른 경쟁자보다 내가 더 진심이라는 신호가 필요하다.


진정성을 판정받으면 이제 여자가 정당하게 보상해줄 차례다. 스킨십의 수비 시프트(!)를 조정하는 것이다. 남녀 관계의 스킨십은 실로 가열찬 남자의 드리블과 아슬아슬한 여자의 골키핑으로 은유된다. 몇 년 전 크게 인기를 끌었던 개그 콘서트의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 코너에서 “데이트 3회, 시외 데이트 1회 이상”을 스킨십 허용의 기준으로 제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시외 데이트’는 차를 타고 멀리 나가야 하는 특성상 남자가 지불해야 하는 시간과 돈, 수고로움을 압축한 대표적인 아이템이다. 정이현의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는 첫 섹스를 치른 후 남자가 여자에게 고가의 선물을 주는 것이 일종의 세태로 그려진다. 스킨십은 대부분 ‘그럴 만한’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표상된다. 이 과정에서 여자의 선택이나 욕망은 생선의 내장을 손질하듯 깨끗하게 제거되고, 섹슈얼리티는 ‘주거나’, ‘허락하는’ 것으로만 존재한다. 


텔레비전의 연애 상담 프로그램에는 이러한 고민이 넘쳐난다. 자신에게 충분한 정성을 쏟지 않는 남자에 대한 불안감, 스킨십을 거부하는 여자에 대한 불만 말이다. 전자는 양성이 평등하게 성적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상황에서 억울하게 성적으로 이용만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맞닿아 있고, 생존과 직결된다. 후자는 투자 대비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에 대한 실망으로, 상대에 대한 분노로 번진다. 이는 얼마 전 교육청에서 배포한 (말보다는 방구 같은) 성교육 자료에 데이트 폭력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실리기도 했다. 노력에 대해 섹슈얼리티를 보상하는 구도는, 뒤집으면 ‘그만큼 했으면’ ‘해줘야’ 한다는 폭력으로 번역될 위험을 동반한다. 명백히 옳지 않은데도, 노력했고 지불했으니 상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은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구애 단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에서 여자는 열 번의 도끼질을 묵묵히 맞다가 그 꾸준함에 못 이겨 넘어가는 나무이고, 남자는 상대가 받아줄 때까지 풀스윙을 해야 하는 나무꾼이다. 그러나 여자는 나무가 아니고, 하물며 연애도 벌목이 아니다. 구애는 상대방의 허리를 끊어 정복하는 도끼질이 아니다.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도 상대는 화답하지 않을 수 있다. 결과에 따르는 실망감이나 허무함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며, 상대가 원하지 않는 무언가를 강제로 빼앗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너는 내게 돌려주지 않는다는 분노가 연서복 풍의 비난으로 이어지는 것은 차라리 귀여운 축에 속한다. 구애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살해하거나 얼굴에 염산을 붓는 일이 실제 세계에서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니까.)

 

보상해주지 않는 여자는 순식간에 꽃뱀이나 답답한 여자로 낙인찍히거나, 성적으로 침해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의 선택지는 매우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최후의 배수진으로 “나는 ‘쉬운 여자’가 아니다”는 프레임을 선택하는 것이다. “너와 스킨십은 하지만, 내가 문란하거나 밝히기 때문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너의 헌신적인 사랑 때문이니 나를 더욱 소중히 대하라.” 끊임없이 자신의 섹슈얼리티가 ‘쉬운 것’이 아님을 강조해야만, 연애 관계에서 감정 권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숙박업소 앞에서 매달리고 튕기며 실랑이를 벌이는 연인이나 잘못에 대한 처벌로 스킨십을 금지하는 것 등이 가장 노골적인 예시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계급을 부여하고, 계급을 바탕으로 차별과 억압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리지의 <쉬운 여자 아니에요>라는 노래에서 여자 화자는 끊임없이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고 말하며 쉬운 여자와 자신을 대조하고, 쉬운 여자 대하듯 하지 말라고 하소연한다. 발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부정을 통한 정체성 확립은 배척과 비하로 이어진다. ‘그런’ 여자에게는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섹슈얼리티의 계급은 스스로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언제든 금방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과 같다. 노래의 중간에 남자 화자는 “손도 잡아놓고 입도 다 맞춰놓고 혼자 꽃등심 6인분 먹어놓고 이제 와서 쉬운 여자 아니라니 장난해?” 라며 비난한다. 손잡고 입 맞췄으니 곧 전체를 허락한, ‘꽃등심 6인분’을 먹었으니 보상할 의무가 있는, ‘쉬운 여자’로 라벨링 되는 것이다.

 

연애가 그토록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면, 어째서 한 성이 한 성에게 일방적으로 양보하고, 그러면서도 리드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마찬가지로 어째서 한 성의 섹슈얼리티만 “줬다”는 표현이 사용되며, 그것이 연애 관계에서 무기로 사용되는지 의문스러웠다. 서로에게는 서로가 갑으로 보일 것이다. 연애 관계에서 상대를 만족시키려고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니까, 성적 자유를 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것도 결국 성별 각본과 연애 이데올로기의 합작이다. 성별에 따라 연애 관계에서는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억압은 자유를 제한하고 사랑을 착취한다. 그러니 관계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평등한 권력 구조와 차별을 적극적으로 들여다보고, 끌어내고, 해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나와 우리의 관계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내버려둘 수는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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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진송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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