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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귀가 얇습니다

집 살 돈이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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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 대란이라고 한다. 재계약을 하려고 했더니 집주인이 억 단위로 올려 주라고 했다는 괴담이 들린다. 괴담만은 아닐 테다. 실제로 억 단위로 전세금 올린 사람을 봤다. 물론 기본적으로 전세가가 높은 지역이긴 하다. 그럼에도 천도 없는데 억이라니, 서럽다.

나도 전세 산다. 6년간의 반전세 생활을 청산하고 신혼을 기점으로 전세 계약서를 썼을 때, 감격했다. 서울 공기 마시며 잠만 잤을 뿐인데 집주인에게 꼬박 꼬박 돈을 떼이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은 이걸로 끝, 이라고 생각했다.

 

전세는 훌륭한 제도다. 부동산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아 잘 모르긴 한다만, 전세는 세입자에게나 집주인에게다 잘 이용하면 좋다. 집주인은 전세 끼고 집을 사면 저렴하게 집 장만이 가능했다. 실제로 전세 끼고 사서 좋은 시기에 팔아 시세 차익 누리며 많은 돈을 버는 방법은 부동산 재테크 책에 가장 첫 장에 나오는 흔한 팁이다. 한국이 고도성장기에는 전세금을 요리 조리 잘 굴려서 돈을 버는 것도 가능했다. 안 굴리더라도 은행에 넣어놓기만 해도 이자 받는 재미가 쏠쏠했다. 세입자는 세입자대로 매달 없어지는 월세에 비해 시간이 지나도 원금 손실이 없는 전세가 자산 지키기에 유리했다.

 

어느 순간부터 전세는 더는 서로에게 윈윈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었다. 저금리 시대에 집주인에게 전세는 더는 남는 장사가 아니다. 게다가 무리하게 대출을 끼고 산 집이 경매로 나오며 깡통 전세가 속출했다. 세입자는 융자 없는 깨끗한 전세를 원했고, 그런 매물은 비싸지기만 했다. 전세가가 매매가에 육박하면서 전세 수요가 매매로 옮겨가고 있다는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세와 매매 차이가 많지 않다고 해도, 서울 아파트는 워낙 비싸니 그 차이는 기본으로 억 이상이다. 그런데 전세에서 매매로 옮겨 타는 넉넉한 사람이 많을까?

 

생각은 이랬지만, 어느 순간 우리 부부는 서울의 어딘가에 있는 모델 하우스에 있었다. 그렇다. 우리 부부는 둘 다 귀가 얇다. 게다가 귀차니즘이 강하다. 우리 부부로 말하자면, 결혼 준비를 하면서 가구든 가전이든 최소 3군데 이상은 꼼꼼이 둘러 보고 사야 해, 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지만. 가전은 모 백화점에 가서 가전이 있는 층으로 올라간 뒤 처음으로 보이는 브랜드에서 영업사원의 친절한 상담을 받고 덜컥 구매해버렸고. 가구는 먼저 결혼한 누나가 산 곳에서 대충 골랐다. 신혼여행 역시, 에이 세상 어디 가나 똑같지, 하면서 제주로 갔다.

 

DSC01890.jpg

이 사진은 본 글과 크게 상관 없습니다.

 

이런 부부임에도 모델 하우스 행차에 나선 이유는, 그렇다. 재계약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게 재계약이다. 우리가 사는 집의 집주인은 매우 좋은 분이고, 재계약 때 불쌍한 세입자의 처지를 헤아려주실 게 틀림없어, 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진짜 이유는 따로 있을 것! 모델 하우스 구경에 나선 건, 재계약은 순조롭겠지만 그냥 요즘 짓는 집에는 어떤 스마트한 장치가 달려 나올까, 하는 호기심이었을 거라고 우겨본다.


첫 번째 간 모델하우스는 예뻤다. 매매는 아기 훈육할 때 쓰는 단어에서 받침이 탈락한 건가, 라는 깨달음을 얻기에 충분한 분양가였다. 모델하우스에서 받은 각티슈를 들고, 오예 득템, 하면서 집으로 향하던 중 어떤 남자가 전단지를 건넸다. 모델하우스 광고였다. 우리는 이왕 걸음 한 김에 한 군데 더 둘러보고 가기로 한다.


첫 번째 본 모델하우스보다 두 번째 본 모델하우스가 구조가 훨씬 괜찮았다. 무엇보다 넓었고 공간 활용도 좋았다. 이거 얼마에요, 물어나 보기로 했다. 우리를 안내해 온 남자는 잠시 기다리라며 분양가 상담은 딴 분이 해 줄 거라고 했다.


뭔가 대표님께서 쓰실 것 같은 공간에 앉아 우두커니 기다리는 부부. 잠시 후 팀장님이라는 사람이 와서 아파트 단지의 역사와 의의를 설명했다. 약 팔기가 시작된 거다. 귀가 얇고 귀차니즘이 심해 갑을병정 중 갑을만 듣고 답을 찍어버리는 우리 부부답게 점점 팀장의 말에 현혹되기 시작했다. 특히나 가격 부분을 설명할 때는 “오, 이거 정말 싼 걸. 아니 이렇게 팔아도 남는 건가? 건설회사는 사회적 기업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부동산 대출 받기가 시골에서 하늘의 별 바라보기보다 쉽다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예상보다 가처분 소득이 별로 없어도 집 장만은 가능했다.

 

“자, 결정하시죠. 지금 두 세대만 남았습니다.”

 

“네! 하시죠!”

 

라고 답하기가 무섭게 든 깨달음. 아무리 싸게 나온 집이라 해도, 현재 우리 부부가 모은 자산의 5배라는 슬픈 사실. 결국 부부는 계약서에 사인하지 못했다. 집 문서에 수놓을 아직 그럴 듯한 자필 사인이 없다는 핑계를 위안 삼아 집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아내여. 데이비드 소로우는 말했네. 가격을 낮추지 못하면서도 안락한 집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문명이 발전한 거라 볼 수 없다고. 헨리 조지는 지대가 높아지면 경제가 불황에 늪에 빠진다고 했지. 한편 발레리 줄레조는 대한민국의 아파트가 정부, 대기업, 중산층 삼자동맹으로 형성된 비자연적인 현상으로 봤지. 즉, 단기간에 주거 문제를 해결하려 한 정부. 대규모 건설 공사로 돈을 벌려고 한 건축회사. 부자가 되고 싶어했던 일반인의 탐욕. 탐욕 때문이라고!”

 

“남편이여. 그런 소리 한다고 복비라도 없어지나. 헛소리 할 시간에 투잡해서 집 마련할 궁리나 하게.”

 

라고 아내는 말하지 않았다. 아내는 좋은 사람이고 우리 부부는 서로를 힐난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아무런 대화 없이 묵묵히 집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아내님, 사랑해요. 그리고......

 

집주인님, 이런 우리 부부를 어여삐 여겨 무난한 재계약을 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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