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인기 많았던 드라마 <포청천>은 중국 송나라 때 청렴결백하고 지혜로우며 엄격한 명판관인 포증의 이야기이다. 어려운 사건을 해결하고 위기를 넘기는 포청천과 동료들의 활약을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볼 때마다 통쾌하고 짜릿한 순간도 많았지만, 씁쓸함과 개운하지 않은 뒷맛이 오래 남는 사건들도 상당 수 있었다. 악인에게 작두형을 내리는 것이 통쾌하지만은 않구나 생각하면서, 어쩌면 그때 이미 법과 판결만으로는 피해자들이 처한 안타까운 사연들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단순히 죄를 물어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임수희 판사가 쓴 『처벌 뒤에 남는 것들』 은 그가 칼럼을 통해 연재해 온 ‘회복적 사법’ 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한 책이다. ‘회복적 사법’ 이란 법에 적힌 대로 처벌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개념이다. 형벌을 얼마나 줄 것인가를 최우선으로 놓고 판단하게 되는 기존 형사 사법제도 아래에서는 오히려 피해자의 존재가 희미해지게 되며, 가해자 역시 진심어린 사과와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벌을 면하는데 집중하게 되는 경향을 띠게 된다고 한다. 법 제도의 목적이 사회를 유지하고 선량한 이들의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이라면 단순히 죄를 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는 이런 문제를 개선하고자 사법의 각 영역에서 이루어져 온 ‘회복적 사법’의 사례들을 소개하며 과연 어떻게 사법제도의 한계를 극복할지 이야기한다. 법정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더 듣기위해 노력한 이야기, 사건 초기에 경찰관이 회복적 개입의 주체가 되어 운영되었던 회복적 서클, 형사조정과정에서 대화와 소통을 통해 최대한 피해를 회복 하고자 하는 사례들을 만날 수 있다. 제도와 예산이 미비하여 아직 제도화의 길은 요원해 보이지만, 왠지 삭막하기만 할 것 같은 법의 집행과정에서 진심을 다해 피해자를 돕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위안이 된다.
하지만 항상 뉴스를 보면서 ‘피고인이 잘못을 깊이 늬우치고 있으며 피해자에게 사과 및 피해 배상을 하고 피해자와 원만히 합의하여 피해자가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 때문에 파렴치한 중범죄인들이 너무 가벼운 처벌을 받는 것 같아 항상 불만이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일이 너무 많다. 자신의 형량을 감경 받기 위해서 법적인 자문을 받아 진심 없이 단지 형량을 줄이기 위해 반성문을 쓴다거나, 성범죄자가 여성단체에 원치 않는 기부를 한다거나 하는 일이 피해자의 구제를 위해 노력했다는 이유로 형량 감경의 사유가 된다고 하면, 이것은 피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으로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애초에 법이 무력해지는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이런 우려에 대해서 임수희 판사는 책 말미에 응보적 사법과 회복적 사법의 관계를 수레의 두 바퀴로 비유하며, 회복적 사법은 응보적 사법이 단단히 자리 잡은 후에야 안전히 구현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회복적 사법이 응보적 사법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게하고 무겁게 받아들이게 하지 않는다면 피해자를 회복케 하는 반성이란 애초에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제대로 처벌해야 할 죄는 묻지 않은 채 피해자의 상처를 치료하고자 하는 노력을 형식적으로 이용해서 법망의 허점을 비집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일이 너무 많고, 어찌할 수 없어서 화가 난다. 응보적 사법이 제대로 된 회복적 사법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이야기에는 동의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는 않을 것 같아 막막하기만 하다.
2020년 7월 6일 이 글을 작성하는 도중에, 법원은 다크웹에서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거래 사이트 ‘웰컴투비디오’를 운영하며 엄청난 양의 아동 성착취물을 거래하고 그 제작을 사실상 방조하고 교사한 손정우에 대한 미국 송환을 불허했다. 이미 이전에도 그 죄과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낮은 1년 6개월이라는 낮은 형량을 받아 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한 바가 있는데, 미국에 송환되어서라도 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기를 원하던 바람들은 다시 한 번 좌절했다. ‘이 사건의 결정이 범죄의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며’ 라고 언급한 재판부의 말이 무색하게도, 법은 한번 처벌 내린 행위에 대해서 다시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미 잘 알고 있고,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어째서 이토록 명백한 죄에 대해서도 법의 집행자들은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
이 참담한 뉴스를 들으며 ‘회복적 사법’ 이라는 개념을 통해 피해자의 회복을 돕고 한 차원 높은 사회질서와 정의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겠다 생각한 지점에서 다시금 멀리 떨어져 버린 느낌이 들었다. 실망하고 분노한 목소리들을 너무 많이 들어서 무섭고 걱정이 된다. 마음속에 들었던 서늘한 기분을 뮤지션 이랑의 ‘환란의 시대’를 들으며 되새겨 본다.
...아무런 약속도 되어있지 않고
어쩌면 오늘 이후로 다시 만날 리 없는
귀한 내 친구들아
동시에 다 죽어버리자
그 시간이 찾아오기 전에
먼저 선수 쳐버리자...
- 이랑, ‘환란의 세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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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원
뮤지션. 인디계의 국민 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1대 리더. 브로콜리너마저의 모든 곡과 가사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