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후암동, 우물이 있는 동네에 작가님의 작업실을 찾았습니다. 열 걸음이면 다 걸을 것 같은 작은 집. 이영경 작가님의 내면이 작은 집으로 표현된 걸까요? 주인을 꼭 닮은 작은 집에서 즐거운 이야기꽃이 피어났습니다.
포괄적 의미에서 사랑에 관한 일인 것 같아요
작업실이 굉장히 작고 예쁩니다. 작업실에서 어떻게 보내세요?
고마워요. 작업실이지만 이 공간에서 일도 하고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생각도 하고, 장난도 치고 여러 가지 합니다.
다락방이 보이는데요, 포근한 이불도 보이고요. 다락방이 좀 달라 보여요.
네, 다락방은 아주 중요한 공간이죠.
다락방에 있다면 스르르 잠들겠어요.
맞아요. 종일 작업만 하기는 어렵고 중간 중간 휴식을 취하고 그러죠.
『봉지공주와 봉투왕자』 는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무엇을 하다가?
작업실에 있을 때 약간 짬이 나면 주변을 정돈해요. 각종 서류나 봉지, 봉투 이런 것을 정리하는 게 일이죠. 하루는 모아두었던 온갖 봉투들을 정리했어요. 편지봉투, 서류봉투, 카드 봉두 등등을요. 봉투들을 탁자에 늘어놓았는데 봉투와 연결되어서 왕자라는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순간, 이걸로 뭔가 얘기가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게 실마리가 되어서 오랜 시간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한참 머릿속에 묵혔죠. 2013년 프린지페스티벌의 여러 행사 가운데 ‘가방 속 인형극 워크숍’이 있었어요. 제가 아는 분이 거기 워크숍 선생님으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예전부터 인형극에 관심도 많아서, 그 워크숍에 참가했지요. 대중 앞에서 1인극 공연을 발표해 보는 기회를 만난 거였어요. 지인 중에 아동?청소년극 전문아티스트가 있는데 그분의 조언이 힘이 되었죠. 스토리를 잡아가는데 도움을 많이 주셨죠. 소품이라고는 달랑 비닐봉지하고 종이봉투를 갖고, 1인극 <봉지공주와 봉투왕자>를 공연하게 되었어요. 그게 시작이에요.
무대는 어땠어요?
공연물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본업으로 삼지는 못하고 오래전부터 여러 차례 워크숍을 기웃거렸죠.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북측 주차장 옆에 마련된 프린지페스티벌 행사가 저의 첫 대중 공연이었죠. 야외 무대였어요. 아이들의 웃음과 박수소리가 들리니 저도 재미있더군요. 그 힘으로 여러 자리에서 공연을 했어요.
연극이 책으로 옮겨오게 되었는데요, 극과 책의 차이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1인극을 준비할 때, 연출가와 소통을 하려고 캐릭터를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고 대본도 써 봤어요. 그런 와중에 남겨 뒀던 스케치가 그림책의 밑바탕이 되었어요. 공연을 막 시작할 즈음에는 그림책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어요. 공연을 하다 보니, 책으로 만들 기회가 왔어요. 연극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면서 두 장르의 차이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지요. 대표적인 차이를 꼽자면요, 공연에서는 현장성이 중요해요. 공연자와 관객이 설정된 상황을 놓고 서로 약속된 상황 속에서 함께 노는 거예요. 책은 연극과 달리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시간과 공간의 거리가 있는 만큼, 메시지 전달력이 강화되어야 하겠더군요. 무엇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를 꼼꼼히 따지는 과정을 거쳐야 했지요. 정제된 표현이 필요했어요. 처음에 거기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죠. 토론해 볼 것들이 참 많았어요.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둔해 빠진 저 때문에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헤헤).
연극과 그림책이 참 다르다고 하셨잖아요. 그럼에도 극에서 가져오고 싶었던 부분들,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요?
많이 다르기는 하지요. 그럼에도 정제되는 과정에서 배제하지 않고 많이 살리려고 했어요. 이야기를 이끄는 변사의 톤도 여전히 남아 있어요. 그리고 반응이 좋았던 대사들은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다가 막판에는 다시 살리기도 했어요. 논리적으로 탄탄해지는 것도 좋지만, 재미는 포기할 수 없었죠. 극과 책이 장르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메시지는 동일해요. 메시지만큼은 꼭 전달하고 싶었어요. 으음, 빵꾸 나고 구겨져도 우리는 존재로서 아름답다, 서로 사랑하면서 살자고 말하고 싶었어요.
봉투와 봉지를 가지고 다른 이야기를 꾸밀 수 있는데, 특별히 사랑 이야기로 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자연스럽게 생각이 흘러간 것 같아요. 서류 더미를 정리하면서 봉투왕자라고 이름 붙이니까 어렵지 않게 봉지공주가 떠올랐어요. 러브스토리의 정석 상 한 번의 고비가 있어야 하겠죠. 이 둘에게는 어떤 고난을 설정해야 할까? 비닐봉지와 종이봉투라는 물성에 걸맞는 어려움이 무얼까? 질문을 해 보았죠. 현실에서 그렇듯이 드라마도 위기와 해소를 통해 사랑 이야기는 무르익어가죠. 사랑 이야기라고 하면 남녀 간의 사랑, 부모자식 간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처럼 특정한 관계와의 감정이라고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넓게 보면 타자와의 모든 관계가 다 결국은 포괄적 의미에서 사랑에 관한 일인 것 같아요. 삶에서 가장 가깝게 다루어지는 주제이기도 하고 쉬운 듯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평상시 사람에 대한 철학이 있으실 것 같아요.
사랑과 사람에 대한 생각이 『봉지공주와 봉투왕자』 를 만드는 기반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남녀 간의 관계도 그렇고 일반적으로 타자와의 관계가 서로 아주 좋게 풀려나가려면, 일단 개개인이 혼자서도 행복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각자가 자존감이 살아 있어야 되고요. 그런 이야기를 『봉지공주와 봉투왕자』 에서 살짝 한 것 같아요. 그림책 이야기로 부연하자면, 봉지공주가 물에 빠진 봉투왕자를 구해내잖아요. 봉투왕자는 부채도사의 바람도 맞고 다리미선녀의 다림질도 받아서 반반하게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지요. 둘이 다시 만난 것을 기뻐하는 것도 잠시! 봉지공주는 반듯한 봉투왕자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빵꾸 난 치맛자락을 붙들고 봉투왕자를 떠나려고 하지요. 봉지공주의 자존감이 뚝 떨어진 거죠. 그걸 봉투왕자가 다시 붙잡아 주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번에는 자신의 모습을 구기면서 “구김새도 있어 줘야 멋진 이의 완성!” 이렇게 말을 해요. 이 말로 봉지공주의 자존감을 다시 일으켜 주고요. 사람 사이에서 때로는 자신을 낮추는 것도 필요하겠죠. 너와 내가 하나로 더불어 가고 싶다면 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봉투왕자는 솔선해서 보여 줍니다. 상대를 선택한 연후엔, 최선을 다해 나의 행동방향을 그 목표에 조준하는 명석함이랄까…. 이것은 작가의 오버한 해몽일지도 모르겠네요. 한편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항상 반듯하고 모범 답안으로 살기보다 힘 좀 빼고 그리 완벽하지 않아도 좋아, 좀 모자라도 괜찮아, 이런 마음으로 살면 어떨까 제안하는 거죠.
나와 네가 서로 사랑하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해요
연극도 하고 노래도 하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시는 것 같아요. 다양한 시도들을 하는 이유는요?
다양한 시도에 특별한 의도는 없어요. 무대에 오르는 것도 사실 엄청 긴장돼요.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안 그렇다고 하지만요. 스스로 침착해지려고 엄청 노력한 거예요. 기본적으로 저는 이야기꾼도 못 되고요. 이렇게 인터뷰도 버벅거리잖아요(헤헤). 어릴 때 좀 더 문학적인 환경에서 살았더라면 좀 달라졌을까요? 느지막하게 스스로 좌우명을 하나 세웠어요. “즐겁게 살자.” 책을 만들면서 파생되는 재미있는 과정들을 저 스스로 즐기는 거죠. 물론 즐거움 안에 이왕이면 울림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어요. 열린 마음을 갖고, 나 자신과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해요. 즐거움과 진실함이 녹여진 좋은 작품으로 독자들과 만나게 되길 바라니까요.
장소를 다락방으로 바꿔요. 소품 얘기를 좀 할게요. 아기자기한 것들로 작품을 만드는 느낌이 있어요. 뭔가 손으로 하는 취미가 있으실 것 같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종이를 사랑해요. 특히 갈색 빵 봉지 같은 거. 상자도 좋아하죠. 이것저것 다 모으다 보면 감당할 수 없으니 나름 엄선해서 모으려고 해요. 이렇게 모은 상자, 종이, 천 등을 더해서 재미난 작품을 만들고 싶은 꿈이 있어요. 그림책에 얽매이지 않고 재미난 작업들을 항상 하고 싶어요. 뭣보다도 제가 재미있게 하는 게 중요해요. 시간만 나면 어떻게든 놀아보려고 해요. 예전에 이런 공작품 작업들로 개인전도 열었어요. 올해 가을에 또 그런 전시를 계획하고 있어요.
어떤 전시예요?
인형 전시예요. 종이를 베이스로 한.
여기서 그런 것들을 많이 하세요? 이 공간을 다락방이라고 하는 게 맞아요?
저는 스카이라운지라고 불러요. 작지만 하늘이 보이니까. 주로 쉬는 공간이지만 엉덩이를 지져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올라와서 작업하기도 하고, 좀 편안히 작업을 해도 될 때는 여기서 하죠.
체조도 여기서 하세요? 『이부자리 맨발 체조』 라는 책도 내셨잖아요. 평소에 운동하세요?
운동은 매일 하면 좋은데, 그게 쉽지는 않아요. 시간을 내야 하는데 일에 쫓기다 보니까요. 며칠 동안 운동을 안 하면, 몸이 운동 좀 하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담이 결리거나 목덜미가 뻣뻣해지기 시작하죠. 맘먹고 운동할 때는 근력운동을 4,50분간 열심히 하죠. 아이들과 청소년은 물론이고 전 계층적으로 건강문제가 큰 화두이기도 한데요, 학업에 밀려서 운동을 도외시하는 교육현실부터 하루 빨리 되돌려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보여 주실 수 있는 동작은?
어깨 운동? 제게는 어깨 운동이 아주~ 중요해요. 책상머리에서 머리 가슴이 단박에 맑아지지요.
앞으로 나올 작품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어요? 마음속에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있나요?
앞으로 새로운 작품들을 통해서 그들이 또 나왔으면 하는 기대는 있어요. 한편 이미 나온 캐릭터들을 좀 활용했으면 하고 바라는데 맘 같지 않아요. 그렇게 하려면 제가 더 부지런해져야하는 점도 있겠고요. 내 손으로 탄생시킨 캐릭터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좋겠어요. 각자 자신을 사랑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그래서 나와 네가 서로 사랑하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해요.
가능할까요?
하하하. 깜냥껏 해보는 거죠.
『봉지공주와 봉투왕자』 를 읽을 독자 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요. 새해이기도 하니까요.
『봉지공주와 봉투왕자』 는 예쁜 러브스토리에 숨겨진 자존감에 관한 이야기예요. 만인이 다 칭송하는 사람을 머릿속에 그리지만 말고, 자기 자신과 주변 이웃들과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지요. 그건 예술작품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다 좋다는 것보다, “나는 이게 좋아.” 하고 말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죠. 어쩌면 배짱 두둑한 자기 긍정일 수도 있어요. 다른 사람이 뭐라 그래도 왠지 당겨가는 마음, 그런 자신의 감각에 주의를 기울여보았으면 해요. 무엇보다도 자기 본연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며 돌보는 마음이 좋겠어요. “내 느낌은 일단 옳다.” 이런 마음에서 출발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영경 작가는 1966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공부했다. 해외 근무한 아버지 때문에 네 살부터 일곱 살까지 일본에서 지내며 그림책을 접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그림책 작가를 꿈꿨다고 한다. 1993년부터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신화따라 바다 여행』, 『옛날옛적 이야기쟁이』, 『꽃들이 들려주는 옛이야기』 등 지금까지 많은 책에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 여정을 살펴보면 작가가 특히 우리 옛이야기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영경은 실제로 우리 전통의 선을 잘 살려내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한지에 스며든 듯한 부드러운 색감이 원색적이고 화려한 외국 그림과 선명하게 비교되면서 우리의 맛을 살려 주고 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즉 한국적인 그림책을 만들어내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작가는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할 만큼 텍스트 이해력이 뛰어나다.
그의 대표작 『아씨방 일곱 동무』 는 2001년 SBS 어린이 미디어 대상 창작 그림책 부문에서 금상을 수상했으며, 프랑스어와 일본어로도 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아씨방 일곱 동무』 는 '규중칠우쟁론기'라는 고전문학을 아이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이다. 작가는 우리 고전을 되살려 그림책으로 만들어 정감 있는 그림과 함께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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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지공주와 봉투왕자이영경 저 | 사계절
봉지공주와 봉투왕자, 분리수거대마왕, 딱풀부대, 다리미선녀, 부채도사가 잔뜩 ‘출몰’하는 세계, 알지만 볼 수 없었던 세계에 초대받은 것처럼 설레고 흥미롭습니다.
이지연 (어린이책 편집자)
어린이책 편집자입니다. 작가와 연애한다는 마음으로 책을 만듭니다. 연애에는 소질 없는 게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