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를 처음 만난 건 5년 전이었다. 당시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라 부른 배를 안고 뒤뚱뒤뚱 홍대 앞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저자는 홍대 건축학과를 ‘오래’ 다니는 중이었고, 키 190센티미터에 깡마르고 텁수룩한 긴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를 알게 된 건 일러스트레이터 정보 수집 차원에서 인터넷을 타고 타고 다니던 중 멈춘 한 ‘조용한’ 블로그에서였다. 해외라곤 출장과 신혼여행 경험이 전부였던 난 왜인지 그의 글과 그림, 사진에 멈칫했고 만나자 연락했다. 그렇게 책을 만들자 약속했다.
근데 참 뜻대로 되지 않았고, 나와 그의 시간은 제멋대로 흘러갔다.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고 겁 없이 출판사를 창업했다. 책 만들자 약속했을 당시에는 나름 이름 있는 출판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졸지에 이제 막 이름이 생긴 출판사로 옮겨와야 했다. 생각해보면 그땐 우리 출판사에서 책 내는 모든 저자에게 미안했다.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달고 살았고 진심이었다.
저자의 시간도 책과 먼 곳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늦은 졸업을 앞두고 졸업전시 준비에 바빴고 곧장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다. 어느 날, 짧게 친 머리에 양복을 입고 대기업 사명이 찍힌 명함을 들고 나타났다. 저자와 나는 연락할 때마다 서로 “미안하다”고 했다. 각자 살기 바빴던 건데, 책이 늦어지는 게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아마 그런 사람의 글인지라 여행과는 거리가 먼 내가 멈칫한 것일 테다.
그의 여행 기록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멋진 곳을 갔는지가 아닌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가 중요했고, 그럴듯한 사진을 찍는 것보단 휴대용 인화기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챙겨 만나는 이들에게 사진을 선물하는 게 중요했다.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나면 가방을 풀어놓고 하루 종일 앉아 그림을 그렸고, 게스트하우스 빈 벽을 발견하면 벽화를 그렸다. 그렇게 그는 멈추고 쓰고 그리고 찍고… 그런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가 되었다. 인생의 거대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도, 중대한 결심과 포부를 다지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 그는 여행을 떠났다.
다부진 콘셉트로 무장한 채 쏟아지는 여행에세이 속에서 어떻게 이 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이 깊다. 또 이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아 미안했다. 같이 작업하던 디자이너는 “넌 뭐가 그렇게 미안한 게 많니?”라고 물었다. 어떻게든 잘 만들어 오래 기다린(물론 그는 자신이 나를 기다리게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저자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이제 막 선물을 할 수 있는 마감일이 다가올 무렵, 저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난다 했다. ‘오래 묵혀뒀던 꿈을 이루기 위해 새로운 공부를 하기 위해서란다. 늦깎이로 외국에서 공부하는 게 만만치 않을 텐데, 갑자기 엄마 마음이 되어 짠하기만 했다. 결국 선물은 직접 전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부쳐야만 했다.
“한국에 있었다면 책 전하고 싶었을 사람 명단 만들어주세요. 메시지도 쓰고 싶으면 메시지도 써서요. 그거라도 제가 전할게요.”
배본도 하기 전에 먼저 한 일은 그의 지인들에게 책을 보내는 일이었다. 저자를 처음 만났을 때 배 속에 있던 아이는 벌써 다섯 살이 되었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둘째 출산을 일주일 앞두고 있다. 타지에서 자신의 생때같은 책이 소홀히 다뤄질까 걱정할 저자 생각에, 저자에겐 아직 내 특수 상황을 말하지 못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자님. 책도 다 제 새끼인데, 한 권도 허투루 다루지 않을게요.”
황은희(수오서재 대표)
수오서재에서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iuiu22
2017.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