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이 토모유키 저/구수영 역 | 내친구의서재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지 말라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일단 업이 되고 나면 아무리 좋아하는 일도 고되게 느껴지기 마련이니까. 사실상 평소 좋아하던 일을 하나 잃는 꼴이니, 덕업일치로 얻는 기쁨보다 이따금 상실감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거나 ‘어떤 책이 좋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현재 편집하는 책이나 검토 중인 작품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 순수하게 독자로서 뭘 읽은 게 없음을 깨닫고 눈앞이 아득해진다. 꼭 일로 붙잡고 있는 책이 아니더라도, 당장 눈에 띄는 책들을 어쩌다 읽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곰곰 따지다 보면 결국 생업으로 귀결된다. 내 즐거움은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몇 차례의 독서 모임을 가지면서 ‘독서 모임 비관론자’가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이가 들수록 강제로 나를 붙들어 줄 뭔가가 있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그리하여 친구 몇 명을, 심지어 출판계 사람이나 열성적인 독자도 아닌 이들을 모아서, 정말 오직 ‘흥미’ 하나만을 자극하는 책을 가지고 대화를 나눠 보기로 결심했다. 먹고사는 일이 곧 인생이 되어 버린 이들에겐 취미조차 강요받아야 겨우 신경 쓸 수 있는 과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딱히 ‘J’가 없는 이 모임에서 서로 말이 없기에 내가 먼저 책 한 권을 골랐다. 출간 직후부터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던, 요컨대 찬사를 받든 악명을 떨치든 존재감 하나만큼은 확실한 시라이 도모유키의 『엘리펀트 헤드』다.
어렸을 때부터 음침한 성격이었는지 유독 추리 소설을 좋아했다. 사실 추리 소설의 주된 사건이라 하면 살인일 텐데, 왜 그리도 매료되었는지 여전히 수수께끼다. (지금도 추리물에 중독되어 있다.) 어느 정도는 <제시카의 추리 극장>이나 <X 파일>, <트윈 픽스> 등을 즐겨 보던 가정 환경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태어나고 자란 집이 마침 광화문 근처인 덕분에, 종종 시간이 날 때면 걸어서 교보문고에 소일하러 가곤 했다. 지난날의 모든 기억이 또렷하다면 분명 거짓말이겠지만, 그 당시 서가에 가득 꽂혀 있던 붉은색 책등의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해문출판사였던가?)에 마음이 이끌렸던 순간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그리 크지 않은 판형에, 온통 미스터리한 제목과 음산한 표지가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선사했던 것 같다. 특히나 미스 마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을 좋아해서(포와로에 비하면 그 종수가 훨씬 적었지만) 가끔 한두 권씩 구입해 읽다 보니 어느새 수십 권이 되었다. 그 뒤로 추리와 공포 장르는 내 인생의 반려가 되었고, 여태껏 콘텐츠 편식이 심각한 편이다.
추리 소설에 대한 향수에 젖어, 일찍이 장바구니에 담아 두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염불만 외우고 있던 『엘리펀트 헤드』를 펼쳐 들었다. 엘리펀트 헤드, 일단 제목부터 (최애) 데이비드 린치를 떠오르게 하지 않는가. 광고 문구였는지 누군가의 리뷰였는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무튼 이 책을 읽기에 앞서 “모든 것이 스포(일러)!”라는 소리를 전해 듣고, 서점 자료는 물론이고 뒤표지조차 들여다보지 않았다. 사실 제목과, 새로 나온 추리 소설에 늘 따라붙는 예의 찬사, 범상하지 않은 표지 그림만으로도 내 충동을 자극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스마트폰, CCTV, 인터넷, 과학 수사 등 현대 문명의 이기가 횡행하는 시대의 추리물은 어쩐지 고전적인 정취가 없어서 장르 특유의 흥이 깨지곤 했다. 온갖 증거가 범람하는 상황에서 미스터리를 만들어 내려면 필연적으로 기막힌 우연이나 데우스엑스마키나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뭔가 다르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완전히 적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몹시 놀라운 경험이었다. 더는 아무도 책에서 오락성을 기대하지 않는다지만 오직 책만이 전할 수 있는 고유한 재미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엘리펀트 헤드』는 단지 경이로운 트릭을 과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추리 문학의 경험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 성심껏 탐구한 실험작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이 책은 하나의 경험이고, 동시에 질문(‘과연 이게 맞나?’하는 의심)이기도 하다.
계속 변죽만 울리다 끝낼 순 없으니, 일단 책의 내용에 대해 한마디 보태고 가겠다. 주인공 기사야마 세이타는 정신과 의사이고, 아내와 두 딸을 둔 ‘평범해 보이는’ 가장이다. 놀랍게도 스포일러 없이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저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소설의 초입부터 그야말로 생뚱맞은 에피소드(나중에야 회수가 되지만)가 난데없이 전개되는데, 이 긴긴 이야기를 하나의 문장 단위로 생각해 보자면 소설 전체에 엄청난 도치법이 쓰인 셈이다. 아무리 정신과 의사인 주인공이 환자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라고 하지만 도저히 참작할 수 없을 만큼 정신없이, 문자 그대로 사람이 폭발하는 기묘한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야 드디어 본론에 들어선다.(다시 한 번, ‘이게 맞나?’ 하고 자문하게 된다.) 처음에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 같은, (인간적 결함을 지닌) 기사야마 선생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심리 추리물인 줄 알았건만, 이렇듯 기대를 엇나가는 순간부터가 진짜다. 자신의 삶을 완벽한 형태로 지키고자 하는 주인공의 광기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지난날의 순수한 악의(존속 살해)가 무신경하게 제시되며, 이야기는 돌연 시커먼 심연 속으로 섭입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얘기해 두자면, 이 책에는 ‘19금 딱지’가 붙어 있다. 이례적인 심의 등급을 받은 만큼 이 작품 속 내용이 얼마나 상궤에서 벗어나 있는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이윽고 『엘리펀트 헤드』는 기사야마의 이드(id)가 자리한 불사관이라는, 초월적인 까닭에 하나의 상징으로 읽히는 장소로 얽혀 들어가는데, 그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드와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 그리고 아르놀트 뵈클린의 장례 행렬이 한데에 뒤섞인 것 같은 만화경이랄까.
다시 책의 띠지를 살펴보니 “악마”가 글을 쓴다면 『엘리펀트 헤드』와 같을 것이라는데, 솔직히 악마였다면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밀고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의 서사를 끌고 나아가는 것은 결국 주인공의 끔찍한 욕망과 어리석음, 무의미하지만 강박적인 발버둥질일 텐데, 아마 악마였다면 그토록 미련하게 굴지는 않았으리라. 그런고로 기사야마의 악은 인간적이다. 한편 『엘리펀트 헤드』의 또 다른 동력은 서울 신촌의 어느 병원에서 개발된 ‘약물’이다. 이 또한 스포일러가 될 것이기에, 약의 효능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이 놀라운 ‘설정’ 하나가 추가되면서부터 전혀 이해하고 싶지 않은 한 인간의 광기는 차츰 차분한 방정식으로 변모해 가고, 그 탓에 모든 떡밥을 회수하기로 마음먹은 작가의 정직한 장광설이 오래도록 이어진다. 급기야 복잡한 시계열을 몸소 정리하기 위해 도표를 동원하는 대목에 이르면, 이미 꼬일 대로 꼬여 버린 사건은 마치 전생의 일처럼 생경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 작품은 정직하다. 일부 내용이나 단서를 지우거나 추리 소설의 규약을 파괴함으로써 ‘아뿔싸!’ 탄식을 선사하는, 그런 종류의 비겁한 작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제시되고, 솜씨 좋게 해소된다. 이 같은 작위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직접 결말을 읽어 보는 순간에 명확히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펀트 헤드』는 독자와 작가가 맞서 싸우는 게임이라기보다, 난제를 풀이하는 해설서 같은 추리 소설이다. 명성 높은 탐정이나 어떤 정의로운 작자가 불쑥 나타나서 ‘범인은 누구입니다!’라고 의연하게 선언하는 작품에 질렸다면, 요코미조 세이시와 정반대에 서 있는, 이 무감정하고 차가운 반(反)추리 소설을 읽어 보면 어떨까 한다. 정말 모든 예상이 무용하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또다시 직업병에 걸린 나는 이 책을 기획하고 번역하고 편집하고 만들어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느꼈다. 이토록 그로테스크하고 가혹한 작품은 사실상 대중을 포기하고, 추리 문학의 코어팬을 고려한 선택이었을 텐데, 그런 극단적인 부류의 독자인 나로서는 정녕 고마울 따름이다. 눈앞에 산적한 일들을 잠시 치우고, (사실 이 책을 처음 펴 들었을 시점엔, 마치 찰기 없는 콩가루처럼 부슬부슬 흩어져 버리는 소설 속 상황에 도통 집중을 못 해서 일주일 정도 시간을 두고 다시 읽었습니다만) 하룻밤 사이에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내리 달렸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좀처럼 떠올릴 수가 없다. 이처럼 늘 책을 읽어 온 사람에게조차 독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끝장이 나기 마련이다. 끝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두지 말고 일단 시작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펀트 헤드』는 결코 모두를 위한 소설이 아니다. 대단히 기괴하고, 그 기과함마저 잊게 할 만큼 몹시도 복잡하며, 파국이 너무 명료히 암시되는 까닭에 더러 의욕을 잃게 하는 위험한 책이다. 그런데 (거듭 강조하였듯) 이 작품은 하나의 경험이므로, 도전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 아무리 시작하기가 어렵더라도 완주할 만한 도전이다. 책이 도끼인 건 사실인가 보다, 『엘리펀트 헤드』가 내 정신을 쩍 내리찍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엘리펀트 헤드
출판사 | 내친구의서재

유상훈 (편집자)
책을 읽고, 책을 만들고, 좋은 책을 찾아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