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플로우의 「작두」를 들었던 이들이라면 그의 이름이 단박에 떠오를 것이다. 단 1분의 시간 동안 펼쳐진 살풀이에 가까운 래핑. VMC발 신성은 그렇게 <양화>(2015) 라는 명반 안에 자신의 존재감을 아로새겼으며, 동시에 데뷔작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렸다. 아니마토(Animato)와 함께했던 퓨쳐헤븐도 벌써 2009년의 일이니, '신인'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도 장장 6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셈. 이제 좋은 래퍼라는 훈장을 얻기 위해 남은 관문은, 하나의 앨범을 이끌어갈 만큼의 장악력이 있는지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이 작품을 접한 후라면, 실력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어느 정도의 확신으로 정착했으리라 생각한다. 주위의 사소한 것들에 대한 경험과 그 소회를 날것의 언어로 담아낸 첫 정규작은, 여러 소재 속에 서려 있는 공통의 테마를 꿰뚫으며 풀렝스로서의 깊이와 통일감을 획득하고 있다. VMC가 늘 그래 왔듯 트렌드적 요소를 배제하고, 묵직한 비트로 풀어낸 삶의 리얼리티가 다수를 납득하게 하는 신예로서의 필요조건을 넉넉하게 채워낸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불안정한 삶과 확실성이 없는 미래를 두고 맞닥뜨려야만 하는 무력함, 이에 대한 해답으로 막연한 희망 대신 느릿한 일보 전진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수록곡 속 주인공은 현실을 헤매는 젊음과 그리 동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숨을 쉬는 것만이 살아 있다 말할 수 있나'라며 자신이 쫓는 가치에 대한 각오를 되새기는 '팔지 않아', 래퍼로서의 자격증명이 무엇인가를 강조하는 「Skill skill skill」, 가상의 래퍼 이야기를 허구와 실제를 섞어 짜임새 있게 엮어낸 「One mic」, 좋든 싫든 지금의 위치에서 자신의 몫을 해내는 것에 또 다른 삶의 의미가 있다는 「밥값」 등. 버팀목이 되어준 것들에 대한 의미를 하나하나 짚어나가며 쌓아온 철학의 철옹성을 굳건히 내보이고 있다.
이처럼 러닝타임의 기본 뼈대를 이루는 것이 뛰어난 완급조절의 래핑이라면, 그것을 듣기 좋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역시 작품의 테마를 정확히 꿰뚫는 사운드 메이킹. 리얼세션의 적극적인 사용, 거친 가운데에서도 귀에 얹히지 않는 매끈함을 중시한 비트, 적재적소에 사용한 샘플링까지. 그의 랩이 단순한 읊조림에 지나지 않도록 만들어 준 프로듀서들의 역량도 가히 수준급이다. 또한 각각의 트랙에 다른 비트 메이커들이 참여했음에도 유지되는 일관성은, 결국 이야기의 밀도에 완성도의 해답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주류 래퍼들의 자양분이 닿을 수 없는 평행선에 대한 동경이라면, 그의 무기는 다른 세계에 있다고 생각했던 한 래퍼의 삶이 현실을 헤매는 나의 삶과 겹쳐지는 지점, 그곳에서 발견되는 예상 불가의 동질감에 있다. 물론 단체곡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악당출현」이나 위트가 과한 「얼굴 붉히지 말자고요」와 같은 곡들이 잠시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만, 경험에서 비롯된 생각들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그의 솜씨가 어느덧 자신의 세상으로 듣는 이들을 몰입시킨다. 그리고 감상이 거듭되며 어느덧 그 속에 담겨있는 동시대의 고민, 나아가 그곳에 있는 화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살기 위해 살아가는 모든 이들 작은 배역들이 살아가는 film 이곳'. 이 작품에 담긴 에피소드들은 결국 다른 이의 인생과 연결되며 그 세계를 확장시킨다. 그리고는 발견한다. 작은 것들의 신은, 이미 우리 주위에 수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2016/02 황선업(sunup.and.down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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