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_ JTBC 마녀사냥
꾸준히 이야기했지만, 나는 대학입학과 동시에 동아리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무성애자 라인’의 후계자로 간택되어 왕관을 수여받았다. 이 무성애자 라인이란 대대로 남성도 여성도 사귀지 않는, 연애에 철저하게 무관심한 이들이 형성한 계보로, 실제 무성애자의 정의와는 개념적 차이가 있다. 당시 미팅과 소개팅에 열중하며 어떻게든 ‘연애인구’에 들어가려던 나였지만, 동족을 알아본 선배들의 레이다는 실로 대단했던 셈이다. 왕관을 받았을 때 이미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는 우주 어딘가에서 나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운명의 데스티니? 아아. 문 파워 크리탈 파스타도 나의 억센 비연애 저주(?)를 풀지 못했으니!
어쨌든 그때는 개념조차 낯설었고, 우스갯소리로 썼던 ‘무성애’가 최근에는 서서히 가시화되는 추세이다. 무성애는 부정을 뜻하는 A를 붙여 에이섹슈얼리티(Asexuality)로 불리며, 타인에게 성적인 끌림을 느끼지 않는 이들을 뜻한다. 비연애와는 조금 다른 영역이지만 계간홀로에서 충분히 다루어볼 만한 이슈라고 생각하던 어느날 제보를 하나 받았다. 소위 ‘파워 트위터리안’이라고 불리는, 트위터에서 많은 팔로워를 거느린 유명한 사람이 “무성애자로 포지셔닝한 뒤 여성들에게 대쉬한다”라는 이유로 조리돌림을 당했다는 것이다. 뒤늦게 상황만 파악한 제 3자의 입장에서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비난 받은 이유는 다음 의혹에서 기인한다. 그가 (실제로는 무성애자가 아니면서) ‘성적으로 안전한’ 무성애자라는 기믹을 이용하여 여성들과 친목을 쌓았고, 여성주의적인 마인드를 내세우는 척 하면서 외모에 따라 자신의 팔로워들을 차별했다는 것이다. 이 트위터리안은 나 역시 ‘무성애자’라는 정체성을 공공연히 표방하고 있음에 큰 흥미를 느껴 팔로잉한 후 2012년 창간호를 준비하던 당시 혹시 무성애자 남성으로서 원고를 써줄 수 있겠냐고 메일을 보낸 적 있었다. (물론 성사되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그때는 무성애자라고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이들이 드물었다. 이후 그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사실만 알고 팔로우를 끊었는데, 그 사이 이런 일이 터져 온라인 상에서는 ‘무성애’라는 개념 자체가 희화화되고 있었다. 자기가 편할 때만, 연애를 하지 않을 때만 자기 방어로 사용하는 개념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무성애’를 이렇게 폄하하거나 쉽게 소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 글은 무성애에 대한 서평 두 개를 요약하여 ‘소개’하는 깊이로만 쓸 것이다. 무성애에 대한 공부가 얕고,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며, 아직 이 개념 자체가 충분한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무성애는 다른 LGBT 개념보다도 낯선 소수이다. 물론 LGBT와는 문제의 결과 접근의 방법, 담론의 성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연애’를 규정하는 편견과 억압에 시달리는 소수의 정체성이라는 점에서 얼마든지 숙고하고, 고민하며, 연대할 필요가 있다. 또한 무성애에 대한 이러한 가시화 작업은 종종 ‘연애=성관계’, 혹은 ‘연애의 목적 = 성관계’ 등 연애와 성적 접촉을 동일시하는 도식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바탕으로 대관절 무성애가 무엇이며, 이에 대해 어느 정도로 논의가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서평 : 무성애로 성찰하기-앤서니 보개트, 『무성애를 말하다』1)」와 「서유럽 : 독일 : 제 5의 성애, 무성애(無性愛)」2)을 요약하여 글을 전개한다. (앤서니 보개트의 책은 아직 직접 읽어보지 못했다. 원래 이 글은 계간홀로에서 무성애자들의 원고를 모집하다가 여의치 않아 직접 작성한 것으로, 오류도 미진한 점도 많이 발견되었다. 이에 수정과 보완을 거쳤으나 양질의 정보는 위에 링크를 방문하길.)
현대적 의미의 무성애 개념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알프레드 킨제이로 볼 수 있다. 그 유명한 킨제이 보고서에서 무성애가 발견된다. 이성과 동성 어느 쪽에서도 성적 행위를 하지 않아 킨제이 스케일(Kensey scale)에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은 ‘X’로 명명되었다. 킨제이는 성에 관한 논의에서 일찌감치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앤서니 보개트는 현대적 의미에서 ‘무성애’와 관련된 연구, 저술 활동을 처음 시작했다. 앤서니 보개트에 따르면 타인과의 성적 활동에 관심이 없으며 성욕을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는 전 인구의 1%로 추정된다. 미국 커뮤니티 Aven(Asexuality Visibility and Education Network)는 무성애자들이 중심이 되어, 무성애와 무성애자의 존재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이들의 활동으로 과학잡지 뉴사이언티스트지에 무성애에 관한 논문이 처음으로 게재되기도 했다. 아직 운동의 초기 단계지만 무성애자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현존하는 무성애 관련 사이트 중 가장 정확하고 공신력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니 참고하시라. 언어의 장벽을 넘어야 하지만(크흡)
무성애자들의 분류는 좀 더 섬세하게 나누어야 한다. Aven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무성애적 경항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성향을 얼마나 지속하느냐에 따라 무성애자와 비무성애자로 나뉜다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유동적으로 보이는 성적 정체성은 종종 오해와 논란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시적으로 성욕 감소를 겪는 사람들이 자신을 무성애자라고 정체화할 때, 가뜩이나 존재 자체의 진위 여부를 의심 받는 ‘무성애’ 개념이 일시적이고 변화 가능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경우 말이다. 앞서 말한 파워 트위터리안의 경우 무성애자이면서 연애를 하고, 여성들에게 대쉬했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무성애자의 특성 중 ‘타인에 대해 감정적 이끌림’을 느끼는 항목을 보면, 무성애자의 연애는 가능하다. 무성애 내에서도 이렇게 연애의 감정을 느끼는 무성애자를 ‘로맨틱 에이섹슈얼’ 혹은 ‘그레이 에이섹슈얼’이라고 구분하며, 자위 행위 등을 통해 성적 욕구를 충족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중심이 되는 것은 타인과의 성애적 관계 여부 혹은 성적 욕구이다. 무성애에 대한 연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지금까지 무성애가 당뇨, 우울증, 혈액순환장애, 우울증, 불면증, 스트레스성 질병 등과 같은 질환에 수반되는 부수현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무성욕’은 치료되어야 하는 질병으로 분류되며 (각종 질환을 체크하는 항목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최근 성욕이 감퇴되었습니까’이다) ‘고자’라는 표현은 보편적인 놀림이다. 어떠한 질병 없이도 타인에 대한 성욕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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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무성애자로 명명하거나 이후에 이를 변경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계속해서 찾아가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이름 붙이기를 유예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어떤 상태를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나중에 그것이 변경되더라도. 무성애라는 개념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다. 이성애 중심주의 사회에서 다른 가능성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완벽한 이성애자인 줄 알았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양성애 성향을 깨닫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이것은 정체성이 변경된다는 뜻이 아니라 재정체화, 혹은 다시 이름 붙이기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무성애는 그 진위 여부에 대한 의심 때문에 소수의 정체성 운동에서 ‘박쥐’같은 것, 필요에 따라 이용했다가 버리는 간편한 가면으로 비판 받거나, 성애를 타인과의 성관계로 연결하는 유성애적 관점 때문에 배척 당한다. 앤서니 보개트는 무성애 연구자로서 토크쇼, 라디오, 전화 상담 경험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무성애자를 아주 이상한 것으로 보거나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보다 더 부정적으로 본다는 사실을 밝힌다. 앤서니 보개트는 “열심히 싸워서 어렵게 차지한 공간에 웅크리고 있는데, 또 다른 성 소수자 그룹이 이 ‘원래의’ 성 소수자들의 지위를 위협”3) 한다는 표현으로 무성애자에 대한 거부감을 묘사했다. 2012년 출간된 『보스턴 결혼』4) 역시 미국의 일부 게이나 레즈비언 집단에서 무성애에 회의적이거나 부정적이라는 점을 짚는다. 무성애자의 질문과 인식론적 도전은 다른 성소수자와 달리 정치적 정체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또한 차별이나 억압을 덜 받는다고 여겨져 존재나 가시화 자체를 부정당하기도 한다.
한편 정체성의 정치에 비판적인 퀴어 이론에는 고정된 정체성을 저항의 기반으로 삼는 대신 행위를 통하여 퀴어함의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도록 성적 쾌락을 긍정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일군의 경향이 존재한다. 그러나 쾌락의 무조건적 찬양이나 긍정 또한 정체성의 울타리 밖으로 소외된 모든 이를 위한 사유는 아니다.5) 무성애자는 성적 쾌락과는 무관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무성애가 정치적 운동이자 정체성의 단어로 형성되는 과정은 현재진행 중이다. 섹스가 일정 부분 재생산과 분리된 쾌락으로 여겨지며 자본주의적 상품화가 소비 욕구의 자극에 성을 이용할 뿐 아니라 성 자체를 상품화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무성애자6)는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어야 한다. “고자”라는 놀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몰라서 그런다”거나, “답답하고 따분한 사람”이라거나, “병 있는 거 아니냐”는 말도 수시로 무성애자들을 괴롭힌다. 의학은 성애의 부재를 비정상으로 규정한다(진단명 “과소 성욕 장애”).
이는 결국 다수가 소수를 비정상으로 규정함으로써 발생한다. 캐나다 역사학자 엘리자베스 에보트는 『독신의 역사』라는 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직자와 마찬가지로 섹스를 하지 않고 살았다고 보았는데, 발간 이후 수많은 기혼 남성과 여성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성이 과도해진 사회에서 중압감을 느끼며, 자신의 성적 지향을 감추며 살아야 한다는 고충을 토로하는 내용이었다. 멀리 갈 것 어디 있나. 텔레비전만 틀어도 중장년층의 성생활에 대한 고충이 얼마나 쉽게 희화화되며 그것이 큰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지는데.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레전드 중 하나가 바로 ‘섹스리스 부부’편이다)
무성애는 낯설고, 기이하며, 도통 동의하기 어렵고 난감하다. 더군다나 무성애자 이외의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의 합의된 지향점을 가지는 분명한 집단도 아니다. 누군가는 무성애자라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데 누군가는 연애를 한다. 이러한 분류에 대한 논의는 무성애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현재진행형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온건하고, 불변하며, 단일한 정체성이 어디 있겠는가. 연애 상태도, 비연애 상태도 언제든 변화 가능하듯 우리 삶은 이렇게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것들로 꽉 차 있는데. 우리는 그저 이 낯선 존재를 맞이하는 각자의 윤리를 정비하는 수밖에 없다. 무성애자들이 합의하는 하나의 정체성은 “타인에게 성적 이끌림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무성애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기. 성적인 접촉이 중요하지 않은 연애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기. 나와 관계 맺는 누군가가 무성애자일 가능성을 열어두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성애를 위장 삼아 자기 자신과 타인을 기만하지 않기.
무성애는 모든 사람이 성적 쾌락을 누려야 하고, 연인 관계라면 으레 ~해야 한다는 도식을 파괴하며, 그로 인한 억압을 폭로한다. 무성애는 비연애와는 다른 영역에서, 그러나 연애지상주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성애적 관계와 관련한 반성적 사유를 요구한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만큼이나 중요한 연애하지 않을 자유. 섹스할 자유가 있다면, 섹스하지 않을 자유도 똑같이 존중 받아야 한다. 전체적인 확률로 따지만 너무나 적은 사람들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무성애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부족하다. 그러니 더 풍부한 가시화 작업과 말하기, 인지와 탐색,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지금 바로 여기서부터.
1) 이브리, 「서평 : 무성애로 성찰하기-앤서니 보개트, 『무성애를 말하다』」, 『여/성이론』 제 30호, 2014 참조
2) 윤용선, 「서유럽 : 독일 : 제 5의 성애, 무성애(無性愛)」, 『국제지역정보』, 제 36호, 2005
3) 앤서니 보개트, 임옥희 역, 『무성애를 말하다』, 레디셋고, 2013, 103쪽
4) 에스더 D, 로스블럼, 캐슬린 A. 브레호니 편, 『보스턴 결혼-여자들 사이의 섹스 없는 사랑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 알알 옮김, 이매진, 2012
5) 이브리, 앞의 글, 2013, 264쪽
6) 이브리, 앞의 글, 2013, 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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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송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