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잠시 주춤했던 청첩장의 행렬이 내 품으로 향하고 있다. 밀어내려고 해도 잘 안 된다. 내 결혼을 축하해줬던 사람들의 청첩장이니까. 보통 결혼식은 주말에 있다. 주말에는 눈에 넣으면 아프기는 하겠지만 귀여운 딸과 놀아야 하는지라, 대개는 몸이 아니라 봉투로 마음을 전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내 결혼식에 직접 와서 “신랑이 신부보다 키가 작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인지…” 혹은 “중학생 때 꿈이 승려라고 말하지 않았는지…”라고 축하의 메시지를 건넨 지인에게는 직접 가서, “너 역시 인생이 끝난 건 아닌지…” 하고 진심 가득한 메시지를 건네기도 한다.
가서 보면 요즘은 예전보다 결혼식 모습이 다양해졌다고는 해도, 결혼식 풍경은 대개 비슷하다. 신부는 신부대기실에 앉아 화사한 미소로 지인과 사진을 찍고, 신랑은 밖에서 손님에게 감사를 전한다. 식이 시작되면 양가 어머니가 입장해 화촉을 밝힌다. 곧이어 신랑이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온다. 그 다음에 신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등장한다. 요즘은 신부 신랑 동시 입장도 꽤 많은 듯하다. 신부와 신랑은 성혼선언문을 낭독한다. 30초가 3시간처럼 느껴지는 주례사가 이어진다. 다음에 양가 부모를 향한 인사, 그리고 신부 신랑의 행진으로 끝이 난다. 식 중간에 축가나 특별 공연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식 후에 폐백을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한다. 신부 신랑이 피로연에 나타나 인사를 할 때쯤이면, 손님 중 절반 이상은 먹고 간 뒤.
이런 결혼식 풍경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책이 있으니 바로 나임윤경 교수가 쓴 『여자의 탄생』이다. 그중에서도 6부 ‘여자, 결혼하다’에 이런 대목이 있다. 2005년에 나온 책인데, 지금 결혼 풍경과 그리 달라진 부분이 없다.
인습적인 결혼 형식이 가지고 있는 여성 역할에 대한 많은 상징들을 비판적으로 읽고, 그것들을 답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여성의 삶의 방향과 질을 바꿀 수 있는 올바른 시도가 아닐까요. 결혼식 단 몇 분을 위해 아침부터는 물론 몇 달 전부터 피부 마사지를 하는 것, 화려하지만 몸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드레스를 입는 것, 신부 대기실에서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것, 아버지나 집안의 남자 손을 잡고 신부가 식장에 입장하여 곧 신랑에게 '넘겨지는 것', 예식 후 신랑 가족에게만 폐백을 올리는 것 등 결혼 예식의 형식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만 할 수 있어도 우리 사회의 결혼과 가족에 대한 많은 비판을 하는 것이겠지요.
저자는 책에서 신부 화장과 신부 대기실 등 결혼식 장면 하나 하나를 비판적으로 독해한다. 부케를 넘기는 장면도 예외가 아니다.
서울 여성들의 초혼 평균 연령이 서른일 만큼 여성들에게 결혼은 하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되었습니다. 가족 붕괴, 이혼율 증가, 명절 증후군, 가정 폭력, 시집 식구와의 갈등은 여성들에게 결혼의 실상을 보여주는 키워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결혼의 모순을 알고 있는 여성들이 공중으로 던져진 부케를 열심히 뛰어가 잡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중략) 우리 사회는 결혼이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부 여자 친구들의 부케 받기'입니다. 나는 이러한 절차가 반드시 있을 필요도 없고, 또한 부케가 반드시 신부의 여자 친구에게 가야 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결혼식을 유심히 보니 과연 그랬다. 신부 대기실 안에 숨겨져 있는 신부와 밖에 드러나 있는 신랑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분을 상징하고, 신부가 입는 드레스의 색상이 흰색이라는 점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억압하는 순결 이데올로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주례를 담당해야 할 어른 역할은 예외 없이 남자가 맡는다. 이렇듯 다양한 장면에서 가부장제적 가치를 엿볼 수 있었다. 결혼 제도 자체가 가부장제를 떠받드는 주요한 기제이기에 결혼식 역시 가부장제적 가치를 반영하는 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받은 인상이 강해서, 우리 결혼식 때도 참고했고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에게도 이 책을 전파하고 다녔다.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다. 한 부류는 결혼이 양쪽 집안 잔치고, 어른들도 많이 참석하는 만큼 마음대로 할 수는 없더라도 바꿀 건 바꿔보자는 쪽. 다른 한 부류는 결혼하는 데 준비할 게 얼마나 많은데 결혼식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며, 남들이 그렇게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쪽. 후자는 결혼식을 구성하는 장치가 의미가 있는 주체는 애초에 결혼식을 고안한 사람들이지, 이미 관습으로 굳어져 내려오는 결혼식을 그대로 반복하는 부부는 아니라고 반박했다. 평범한 결혼식을 했다고 마초는 아니며, 신부와 신랑이 동시에 입장한 부부가, 신부가 아버지의 손에서 신랑 손으로 넘겨진 부부보다 더 평등한 관계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덧붙였다.
양쪽 다 일리가 있었다. 대한민국의 많은 부부가 천편일률적인 결혼식 풍경을 재현하지만 결혼 후 관계를 보면 각양각색이다. 전형적인 가부장제 질서를 지향하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부부도 있다. 오히려 여권이 신장되면서 요즘은 전자가 줄어드는 추세. 결혼식을 어떻게 꾸리냐보다는 결혼식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필요한 세상이니까. 즉, 결혼식이 화석화되었다는 뜻일 텐데, 그렇다면 더더욱 결혼식 풍경을 다양하게 만들어가면 좋지 않을까.
기존 결혼식이 마음에 든다면 그대로 하면 되고, 조금 다르게 하고 싶다면 신랑도 백색 수트를 입으면 될 일이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남자가 신랑이라면 신랑 대기실을 만들거나, 신랑은 엄마와 함께 입장해서 시엄마가 며느리에게 “이제 내 아들 아니라 네 남편이다. 참고로 쟤는 천둥 치는 밤에 혼자 자는 걸 끔찍이 무서워해. 잘 부탁한다.”라고 등을 토닥토닥 하는 장면도 어색하지 않겠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과 남자 모두 노동에 참여하는 시대지만 여전히 가정에서는 여성이 주로 감정 노동을 담당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신랑이 엄마와 입장하는 게 현실을 더 많이 반영한다고도 할 수 있으니까. 벨 훅스가 『사랑은 사치일까?』에서 “여자들의 일은 사적 영역에서 조화로운 가정을 만드는 것이 되었다. 공적 영역에서 남자들은 경쟁적이고 무정했다. 가정은 이런 열정이 길들여지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남자들은 기대고 앉아 휴식을 취했고, 평화로운 양육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었다.”라고 지적한 부분은 현재 대한민국에도 유효하다. 부케는 정말 결혼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남자라면 그가 받아도 상관 없을 테고, 주례 없는 결혼식에서는 양가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가 나와서 한 말씀을 하셔도 좋겠다.
이 글을 쓰면서 내 결혼식을 떠올려 봤는데,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결혼식은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피로연에서 친구들이 소주와 맥주를 1대 1 비율로 섞은 축하주를 3잔이나 강권하는 바람에 웨딩카에서 지릴 뻔한 게 최고의 고비였다. 결혼식 도중에 쓰러진 신부를 몇 번 본 적도 있으니, 거기에 비하면 풋 하고 넘길 만함 사소한 일이긴 했다. 여하튼 저마다의 결혼식은 모두 힘들다. 힘드니까 즐겁게라도 했으면 한다. 즐겁게 하려면, 결혼식을 당해내는 게 아니라 만들어내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직접 가서 축하 못 드린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말씀 드립니다.
고생하셨어요. 행복하고 평등한 부부 관계 만들어 나가시길.
여자의 탄생
나임윤경 저 | 웅진지식하우스
대한민국에서 한 아이로 태어나 어떻게 ‘여자다운 여자’로 만들어지는가를 설명하고, 현재 여성들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는지를 탐구하는 책이다. 저자는 ‘사회 구성주의’를 토대로, 아주 기본적인 남녀의 생물학적인 차이를 제외한 남녀의 차이가 ‘만들어진 내용’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사랑은 사치일까?
벨 훅스 저/양지하 역 |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세계적 지성으로 손꼽히는 문화비평가이자 여성학자인 벨 훅스의 사랑에 관한 인문학적 에세이로, 『올 어바웃 러브』 『구원』을 잇는 ‘사랑 3부작’의 완결판. 먹고살기 바쁜 이 시대에, 성공하는 삶을 꿈꾼다면 오히려 ‘사랑’을 더욱 잘 배우고 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사랑을 사소한 문제 혹은 사치스런 감정으로 제쳐두어야만 하는 ‘3포세대’, ‘5포세대’ 청년들을 위한 가장 합당하고 합리적인 생존 방법을 제시한다.
현대 사회의 성ㆍ사랑ㆍ에로티시즘
앤소니 기든스 저 / 배은경, 황정미 공역 | 새물결
세계적인 사회학자 기든스가 섹슈얼리티를 탐구한 책.
[추천 기사]
- 1990년대를 추억하는 책 2권
- 우리 부부는 귀가 얇습니다
- 범인은 바로 이 맨션에 있다
- 인생도, 독서도 타이밍
손민규(인문 PD)
티끌 모아 태산.
kenziner
2015.06.26
searacer
2015.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