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내란 이후 광장에서 혐오 없는 평등한 집회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인 ‘페미당당’의 심미섭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다양한 페미니즘 의제를 다루며 활약해 온 그의 첫 단독 저서가 출간되었습니다.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은 '탈조선'한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자 그가 선택한 선진국보다 더 멋진 세계로 만들어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대선 캠프에 들어간 한 여성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낮에는 여자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밤에는 데이팅 앱을 통해 레즈비언 데이트를 하며 써 내려간 사랑과 투쟁, 그리고 복수의 기록. 하지만 결국엔 연대로 향하는 이 뜨겁고 다정한 복수혈전의 작업기를 전합니다.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 작업 후기
한 달 전, 완성된 책을 택배로 받아보았습니다. 편집자 최고은 선생님이 보낸 편지가 들어 있었어요. “자기 이야기를 하게끔 하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는 구절이 쓰여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가?” 했습니다. 책을 만드는 경험이 처음이라서 어리둥절했던 것 같아요. 독자 입장에서는 재미있거나 재미없는 책만 있지, 무엇이 좋은 책인지는 잘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막상 책을 내고 나니, 독자 후기를 접하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네요! 학교 다닐 때 독후감 숙제를 받으면, 줄거리를 요약하지 말고 본인 생각을 쓰라고 하잖아요. 알면서도 딱히 할 말이 없어 줄거리만 쓰고 분량을 채운 적이 많았는데, 검사하는 선생님은 얼마나 지루했을까요. 이 책은 아무래도 일기 형식이라 그런가, 읽는 분들이 좀 더 쉽게 자신의 일상이나 평소 하던 생각을 이야기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이 책이 좋은 책이라는 말이냐. 제가 판단하기에는 쑥스럽지만, 열심히 독후감을 찾아 읽는 입장에서 무척 즐겁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즉 타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참 좋은 출판 경험입니다.
책을 덮으면서 ‘사랑, 투쟁, 복수 없는 심미섭’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애의 끝에서 여자 친구가 떠난 한국을 더 멋진 세계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다짐, 그렇게 들어간 여성 정치인의 대선 캠프에서 마주한 고루한 관습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들, 그럼에도 계속되는 데이트까지. 사랑, 투쟁, 복수, 이 세 단어는 작가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사랑 : 사랑한다는 말은 같이 활동하는 페미당당 친구들에게 배웠습니다. 만나거나 헤어질 때, 때로는 단체 채팅방에서도 서로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처음에는 당황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너무 가볍게 쓰는 게 아닌가, 혹은 큰 뜻 없이 그냥 던지는 말인가 싶어서 혼자 대답을 뭉개며 일 년 정도를 지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벼락같이 결심했습니다. 그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든, 혹은 아무것도 뜻하지 않든, 그냥 말해 버리자고요. 그렇게 용기 내서 친구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니, 한참 숨을 참다 드디어 터트린 것인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그 점이 좋았습니다. 그 후로는 “사랑해”라고 자주 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무에게나는 아니지만요.
투쟁 : 활동가로서 투쟁을 직업 삼아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큰 투쟁보다는 작은 투쟁이 힘듭니다. 광장에 깃발을 들고 나가는 투쟁보다, 책에 나오는 장면을 예로 들자면, 눈치도 없이 매일 6시에 정시 퇴근하는 투쟁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회사 생활하는 친구들이 “너는 진짜 페미인데, 나는 입페미다”라고 말하면 기겁하며 반박합니다. 남초 회사에서 어떻게든 버티는, 가끔은 회식 자리에서 “그런 말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용기 내 말하는 네가 활동가가 아닐 수 있냐고요. 페미니즘적 측면에서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부정의에 정면 돌파하는 생활인 모두가 투쟁을 부업으로 삼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복수 : 책에서 화자는, 그러니까 저는 복수심을 극복합니다. (어떻게 가능했지는 독자라면 아실 거예요!) 그러나 현실에서의 저는 여전히 복수심에 불타고 있더라고요. 거짓을 쓴 게 아닐까 싶은 위기감, 왜 나는 책 속의 초인이 되지 못할까 하는 자책감에 한동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글에 나타난 사유가 글쓴이의 인격을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최근에는 나 또한 독자의 입장으로 화자를 본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에세이 작가로서, 글 속의 나에게 느끼는 괴리감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지에 대한 글도 언젠가 쓰고 싶네요.
복수혈전의 결말이 키우고 키워진 ‘엄마들’로부터 독립하고, 연대로 마무리된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연대는 징글징글한 애착이 없어도 가능하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연대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연대는 정말 우리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향하게 할까요?
이 풍진 세상에, 연대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에 기댈 수 있을까요. 저에게 연대는 요술 방망이는 아니고, 어떻게든 주워서 집어 든 나뭇가지 하나 정도의 느낌입니다. 이거라도 없으면 어째야 하나 싶은... 오히려 그런 최소한의 수단이기 때문에 연대가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그와 연대할 수는 있거든요. 저 사람이 너무 좋아서가 아니라, 그가 옳은 일을 하고 있고, 거기에 공감할 수 있으니 하는 게 연대니까요.
책 내용 중에는 화자가 동일노동 동일임금 투쟁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임금 인상이 결정되지 않으면 집에 가겠다는 '나'의 선언에 동료 직원이 곧장 “그럼 저도 같이 그만둡니다”라고 연대의 뜻을 밝힙니다. 그리고 같이 즉석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데요. 그 순간을 떠올리면 어쩐지 “여고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교무실을 뒤집어엎으러 쳐들어갈 힘은 없어도, 같이 “몸빵”하며 떡볶이를 먹을 친구가 있으면 든든하잖아요. 그 친구가 굳이 내 절친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어쩌다 같은 반이 되었기에 함께 싸우고, 다음 학년이 되면 또 자연스레 멀어지기도 하고.
책에서는 결국 투쟁이 (다소 싱겁게) 승리하지만, 혹시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가 연대해 주었다는 점에서 저는 이미 만족스러웠던 것 같아요. 다들 그런 기억으로 계속 싸워나가고 있지 않을까요?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 출간을 반기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계획하고 계신 다음 일정이 있나요?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페미니즘 격언을 다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편입니다. 페미당당은 클럽에서 파티를 열거나 광장에서도 노래를 크게 트는 등 기회만 되면 춤을 추려고 노력했는데요.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 출간을 기념하는 북토크도 자유롭고 재미있는 파티 분위기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를 집에 초대해서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데... 우선은 북토크에서 “사랑”, “투쟁”, “복수”라고 이름 붙인 칵테일 세 종류를 제공하는 계획을 구상해 두었습니다!
작업실 책상 풍경(왼쪽), 책상 위 작업등에 붙여놓은 글귀(오른쪽). “이야기는 이데올로기보다 허용 폭이 넓다. 우리의 희망은 여기에 있다.” 철학 논문만 쓰던 사람으로서,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표현해도 되나” 싶을 때마다 용기를 준 문장입니다. 도나 해러웨이(『반려종 선언』)의 글입니다.
작업실을 소개해 주세요.
한쪽 벽이 통창인 원룸에 살고 있습니다. 작은 대나무 정원이 보이는 창문을 바로 보고 책상을 배치했습니다. 그곳이 제 작업실이에요. 하늘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대나무 잎이 자라고 지고 또 눈이 쌓이고 하는 모습을 앞에 두고 작업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바람 불면 소리도 솨 나고요.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은 애플 메모장 앱으로 썼는데요. 자동으로 클라우드에 업로드되니 맥북과 아이패드, 아이폰을 돌려가며 작업하기가 편하더라고요. 따로 어디 백업하지는 못하는 성격이라, 애플 아이디가 해킹이라도 되면 내 인생은 끝장이라는 불안 플레이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일기장과 책.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 실물을 처음 받아들고 깜짝 놀랐는데요. (이 책의 초고가 된) OO당에 다니며 쓴 일기장과 색깔이며 사이즈가 놀랄 정도로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일기장의 존재에 대해 출판사는 물론 어디에도 얘기한 적이 없는데, 디자이너 선생님과 이렇게나 운명적으로 통하다니 신기하죠.
루틴 만들기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마감이 급하면 (늘상 급합니다) 카페인과 알코올을 동시에 끊습니다. 제로 카페인 콜라와 무알코올 맥주를 쌓아 놓고 어떻게든 돌파합니다. 부족한 자극은 포스틱, 매운 새우깡, 초코파이(돈이 넉넉할 때는 몽쉘)로 채웁니다.
작업을 하는 동안 가장 의지한 반려 [ _______ ]
반려 욕조. 주 3회 수영을 다니는데요. 운동을 즐겨서가 아니라, 거대한 욕조에 떠다니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만큼 물 속에 몸을 담근 감각을 좋아합니다. 작업하는 동안에도 틈만 나면 접이식 욕조를 펼치고 들어가 있었습니다. 물이 다 식은 욕조에서 아이폰을 붙잡고 엄지손가락 두 개로 타닥이며 완성한 꼭지도 여럿입니다.
욕조
마감 후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마감 직전과 직후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는데, 여자 친구가 정확하게 알고 있더라고요. 마감한 날 밤에 그가 똑같은 질문을 했대요. 이제 뭘 하고 싶냐고. 앓아 누운 제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1. 병원 방문
2. 공과금 처리
다음날 곧장 정신과, 치과, 정형외과에 방문해서 몸을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선생님이 내 등을 칼로 찌르나 싶은 도수치료를 한 달 동안 받았더니 다시 목이 돌아가더라고요. 몇 달 밀린 수도 요금을 내면서는 세금을 제때 납부하지 않았다고 대통령 청문회(그런 것은 없지만)에서 낙마하는 상상을 했습니다.
할 일이 있을 땐 그것 빼고 모두 재밌게 느껴집니다. 책을 만드는 동안 특히 재밌게 본 남의 콘텐츠는 무엇인가요?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 초고를 가지고 출판사 반비와 첫 미팅을 하고 돌아온 날 밤, 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곧장 페미당당 깃발을 챙겨 국회로 향했고... 그 후 반 년 동안은 원고를 완성하거나 광장에 나가거나 둘 중 하나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번 탄핵 집회가 차별 없고 소수자 친화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저에게는 콘텐츠였다고도 이제는 말할 수 있겠네요.
그러나... 집회가 정말 재밌었냐... 그렇다면 거짓말이고요... 진짜로 열심히 보았던 것은 이태원 트랜스젠더 클럽에서 일하는 선배 퀴어들이 만들거나 출연한 콘텐츠였습니다. 마감이 아주 바쁜 시기에도 그들이 무대에 오른다고 하면 꼭 찾아갔어요. 연극 <이태원 트랜스젠더-클럽 2F>와 <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 전시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 렉처 퍼포먼스 <트랜스-젠더-시간-지도> 등입니다. 로즈마리, 미란, 미래, 색자 선생님의 삶을 담아낸 작품을 보면서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유튜브 ‘여보클럽 미란마마’에서도 이들을 만날 수 있는데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몇 시간 동안 라이브를 하는 성실함에 자극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연대는 그렇게 작동하는 게 아니다. 연대는 번갈아 가며 빚을 지는 품앗이도, 애정에 기반한 편들기도 아니다. 그저, 옳은 일을 함께하는 행위일 뿐이다.” (292쪽)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
출판사 | 반비

이참슬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