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불행한 결혼은 필연인 것, 『크로이체르 소나타』
모든 가정은 똑같이 불행하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노골적인 논쟁을 담은 톨스토이의 중편 소설.
글 : 심하은 (출판 편집자)
202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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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체르 소나타』

레프 톨스토이 저 | 펭귄클래식코리아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 연진희 옮김, 민음사, 2009) 

 

저희는 하나의 쇠사슬에 묶인 채 서로를 증오하고 서로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며 사는 두 죄수였던 겁니다. 당시 저는 99퍼센트의 부부가 우리처럼 산다는 사실을, 하지만 별도리가 없음을 몰랐습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이기주 옮김, 펭귄클래식, 2008) 

 

레프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세계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첫 문장의 하나로 꼽히는데요. 오늘 소개할 중편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가정불화(!) 세계와 묘하게 맞닿아 있는 듯합니다. 다만 『안나 카레니나』 출간 12년 후 집필된 이 작품은 ‘모든 가정은 똑같이 불행하다’라는 주장을 펼친다는 점에서 작가 세계관의 변화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첫 문장은 평범하다 못해 사뭇 평온합니다만(“이른 봄날이었다”) 노골적인 내용 때문에 금서로 지정되기까지 했습니다. 다행히 톨스토이의 아내가 차르에게 청원해 전집에는 실릴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지요.

 

소설은 러시아 횡단열차의 한 객차 안에서 승객들 사이에 벌어진 사랑과 결혼에 관한 논쟁으로 시작합니다.

 

평생을 한 여자 또는 한 남자만 사랑한다는 것은 양초 하나가 평생 탄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결혼이란 것은 그저 속임수에 다름 아닙니다! 

 

남녀 간의 “진실한 사랑이 결혼을 가능하게” 한다는 한 부인의 선언으로 시작된 이 논쟁은 한 신경질적인 신사 포즈드니셰프의 냉소, 즉 “결혼이란 것은 그저 속임수에 다름” 아니며, 자신이 바로 “아내를 살해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라는 응답으로 일단락됩니다. 열띤 토론 분위기가 확 가라앉으면서 모두들 포즈드니셰프를 슬금슬금 피하지요. 

 

이후 그는 자신의 삶과 가치관, 결혼 생활 그리고 파국에 이르기까지 “사랑이 어떤 사건을 일으켰는지”를 화자인 ‘나’에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라 이후 작품의 말미까지 포즈드니셰프의 기이하고 왜곡된 세계관이 반영된 궤변만이 일방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해요. 

 

대학을 졸업한 귀족이자 지주인 포즈드니셰프는 결혼 전까지, 젊은 남성의 방탕과 방종이 심지어 장려되기까지 하는, 상류 사교계의 일상적인 문화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순수한 처녀를 결혼 상대로 찾아다니지요. 결국 예전엔 부유했으나 지금은 파산한 지주 집안 딸의 성적 매력에 이끌려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한데 그는 상류사회의 결혼이란 일종의 매매 거래로서 유곽의 매매춘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상류층의 뻔뻔스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다면 그건 다름 아닌 유곽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짧은 기간의 창녀는 경멸을 당하고, 긴 기간의 창녀는 존경을 받는 거지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시작한 결혼이 원만할 리가 없겠지요. 신혼여행에서부터 둘의 관계는 삐걱거리고, 아이들을 낳고 세월이 흐를수록 적대적인 감정만이 더욱더 쌓여갔습니다.

 

사랑은 성욕의 충족으로 대체되었고, 우리는 정신적인 유대라고는 없는 그저 가능한 많은 쾌락을 서로를 통해 얻어내려고만 하는 완벽한 이기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당시 저는 이러한 우리의 차갑고 적대적인 관계가 본질적인 우리의 관계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불화가 반복되자 포즈드니셰프 본인도 (아내를 살해하기 전까지)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했고(이것은 그의 주장일 뿐 어떤 에피소드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내 역시 음독 자살 시도를 합니다(부부 싸움 끝에 아내가 가출했다 돌아와 자살 소동을 벌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더는 출산에 얽매이지 않게 되면서 아름답게 피어나 사랑을 갈구하는 아내와 젊고 잘생긴 바이올린 연주자 트루하쳅스키의 관계를 의심하게 됩니다. 

 

처음 그의 눈과 아내의 눈이 마주쳤을 때 그들 내부에 똬리 틀고 있는 짐승이 세상의 모든 상황과 조건을 무시하고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괜찮고말고요라고 묻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만 옆에 지긋지긋하게 버티고 서 있는 남편의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문제였습니다. 

 

질투심에 가득 차 의처증에 시달리는 한 남자의 정신세계를 작가는 가혹하리만치 사실적으로 서술합니다. 아내를 살해하는 장면 또한 충격적일 만큼 상세하게 묘사하고요. 한데 포즈드니셰프는 아내를 칼로 찔렀을 때가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죽였다고 설명합니다. 아내를 그저 욕구와 쾌락의 도구로만 여기며 결혼했을 때 이미 아내를 살해한 것과 진배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아내를 죽인 게 아니라 훨씬 더 이전에 죽인 겁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를 죽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도 그렇게 그녀를 죽인 겁니다. 

 

사실 아내의 불륜에 대한 의심과 질투는 그럴싸한 핑계에 불과했고, 모든 결혼은 자살 혹은 살해로 끝날 수밖에 없는 필연이었다는 건데요. 이거 너무 무서운 이야기일까요!

 

남편과 아내는 평생을 함께 살겠다는 외적인 의무를 받아들이고 나서 두 달째면 벌써 서로서로를 미워하게 되어, 헤어지고 싶지만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바로 여기서 알코올중독이나 권총 자살 또는 서로를 죽이거나 독살하는 끔찍한 지옥이 생겨나는 겁니다.

 

함께 읽을 거리로는 J. G. 밸러드의 단편 「12번 트랙」(『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조호근 옮김, 현대문학, 2017)과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중편 「열쇠」(『열쇠』, 이한정 옮김, 창비, 2013)를 권하고 싶어요. 스포일러가 될까 봐 내용을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 두 작품 다 결혼 생활을 다루고 있답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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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2025.03.16

재밌네요. 그러니 제가 혼자 사나 봅니다.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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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체르 소나타

<레프 톨스토이> 저/<이기주> 역

출판사 | 펭귄클래식코리아

안나 카레니나 1

<톨스토이> 저/<연진희> 역

출판사 | 민음사

안나 카레니나 2

<톨스토이> 저/<연진희> 역

출판사 | 민음사

안나 카레니나 3

<톨스토이> 저/<연진희> 역

출판사 | 민음사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저/<조호근> 역

출판사 | 현대문학

열쇠

<타니자끼 준이찌로오> 저/<이한정> 역

출판사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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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은 (출판 편집자)

은행나무 해외 문학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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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사상가.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손꼽힌다. 1828년 9월 9일, 러시아 남부 야스나야 폴랴나의 톨스토이 백작 집안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두 살과 아홉 살 때 각각 모친과 부친을 여의고, 이후 고모의 후원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교육받았고, 16세가 되던 1844년에 카잔대학교 동양어대학 아랍·터키어과에 입학하였으나 사교계를 출입하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자퇴해 1847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업 경영과 농노 계몽을 위해 일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이후 3년간 방탕하게 생활했다. 1851년 맏형이 있는 캅카스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1852년 문학지 『동시대인』에 처녀작인 중편 자전소설 「유년 시절」을 발표해 투르게네프로부터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1853년에는 『소년시절』을, 1856년에는 『청년시절』을 썼다. 1853년 크림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전쟁 경험은 훗날 그의 비폭력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크림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56)를 써서 작가로서 명성을 확고히 했다. 이듬해 잡지 『소브레멘니크』에 익명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작품 집필과 함께 농업 경영에 힘을 쏟는 한편, 농민의 열악한 교육 상태에 관심을 두어 학교를 세우고 1861년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했다. 1862년 결혼한 후 문학에 전념해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을 집필, 작가로서 명성을 누렸다. 1859년에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에 농민학교를 세우는 등 농촌 계몽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34세가 되던 1862년에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해 슬하에 자녀를 열세 명 두었다. 볼가 스텝 지역에 있는 영지를 경영하며 농민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1869년 5년에 걸쳐 집필한 대표작 『전쟁과 평화』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1873년에는 『안나 카레니나』 집필을 시작해 1877년에 완성했다. 1880년대는 톨스토이가 창작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한 시기로 알려져 있는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크로이체르 소나타』 『이반 일리치의 죽음』 등이 이때 쓰였다. 그러나 이 무렵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그리하여 1880년 이후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며 사유재산 제도와 러시아 정교를 비판하고 『교의신학 비판』 『고백』 등을 써서 ‘톨스토이즘’이라는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사십 대 후반 정신적 위기를 겪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 문제에 천착하면서 작품세계의 분수령이 되는 『참회록』(1879)을 내놓았고 정치, 사회, 종교, 사상적 문제들에 관해 계속 저술하고 활동했다. 술과 담배를 끊고 직접 밭일을 하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했으며, 빈민 구제 활동도 했다. 1899년 종교적으로 전향한 이후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으며, 말년까지도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 『부활』(1899) 등을 발표하며 세계적 작가로서 면모를 과시했다.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에 있는 귀족이었으나 『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세 가지 질문』 등을 집필해 러시아 귀족들이 재산을 너무 많이 소유했기 때문에 대다수 민중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다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해 외국에서는 이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극단적인 도덕가가 되어 1880년 이후에 낸 일련의 저술에서 국가와 교회를 부정하고, 육체의 나약함과 사유재산을 비난하는 의견을 발표했다. 개인이 저작물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생각에 저작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고(1891), 1899년 종교를 바꾼 이후에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출간되자마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번역되었으며, 출판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1901년 『부활』에 러시아 정교를 모독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종무원(宗務院)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집필 활동을 왕성하게 펼쳐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 『크로이처 소나타』(1889), 『예술이란 무엇인가』(1897), 『부활』(1899) 등을 계속 발표했다. 사유재산과 저작권 포기 문제로 아내와 불화하던 중 1910년 집을 떠났으며 82세 때 현재 톨스토이역으로 바뀐 아스타포보역 역장의 관사에서 폐렴으로 영면했다. 임종 때 아내를 보지 않겠다고 한 톨스토이의 마지막 말은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 왜 사람들은……”이었다. 톨스토이는 귀족이었으나 왜곡된 사상과 이질적 현실에 회의를 느껴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추구했다. 고귀한 인생 성찰로 러시아 문학과 정치, 종교관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고, 인간 내면과 삶의 참 진리를 담은 걸작을 많이 남겨 지금도 러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대문호로 존경받고 있다. 인간과 진리를 사랑했던 대문호 톨스토이는 세계 문학의 역사를 바꾼 걸작들을 남긴 소설가이자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까지 영향을 준 ‘무소유, 무저항’을 몸소 실천한 사상가였다. 톨스토이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문체와 서사적 힘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소설 속 아름다운 풍경 묘사와 이야기의 서사성, 섬세한 인물 심리 묘사 등이 돋보였던 그는 오늘날까지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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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우리는 거대한 소설 속에 살고 있다.’ 20세기 후반 세계문학사에서 전대미문의 독창적이고 예언적인 목소리로 여겨지는 J. G. 밸러드는 1960년대 공상과학소설 SF의 뉴웨이브 운동을 주도해 20세기 후반 영국 소설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작가로 불린다. 소설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함으로써 현대문학을 재정의했다고 평가받는 작가이다. 고도의 상징성과 시각 이미지를 다용한, 디스토피아적인 예지로 가득 찬 전인미답의 전위적인 작품들은 ‘현대’에 대한 세계인의 관점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30년 부친이 사업차 머물던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일본이 진주만에 이어 홍콩을 공격하자 가족과 함께 민간인 포로수용소에 머물다가 1946년에 영국으로 송환됐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2년간 의학을 공부하다 학교를 그만둔 뒤 영국 공군에 입대했다. 치외법권에서 보낸 유복한 유년기, 전란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투했던 수용소에서의 사춘기, 전후戰後 영국에서의 청년기―인생의 전반前半을 비/초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극한상황에서 살았던 밸러드는 개인과 사회의 무수한 파국을 마주하며, 소설은 이미 거기에 존재하므로 작가의 임무란 리얼리티를 창조해 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모순으로 가득한 20세기 후반의 인간 존재 방식을 표현하려 했다. 현대 문명의 어두운 이면과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인간 본성을 파헤쳐오며 수많은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공상과학소설의 우주 개념을 외부 환경과 인간의 내면에 펼쳐지는 의식/무의식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어 '내우주'로 전환시킴으로써 문학성을 꾀했다. 현대 문명의 병리학적인 잔혹상―다국적 기업이 주도하는 소비사회, 미디어 과잉으로 인한 생활의 통제, 음모론이 판치는 정부 간 이데올로기 담론, 과학기술의 비인간화 등을 동일한 폭력의 다른 형태로 간주하고, 이러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이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같은 강렬한 이미지에 매료되어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을 냉정하며 분석적인 시선으로 묘사했다. 2009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탈정치, 소비사회, 미디어 과잉, 탈이데올로기 등의 시대적 경향을 깊숙이 파고들며 그 속에서 인간의 불안하고 어두운 심리를 묘사하여 초현실주의 문학에 가까운 SF 세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문학적 특성을 압축해 ‘밸러드적인ballardian’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고, 사전에 등재되었다. ‘나는 나의 작품을 경고로 본다. 나는 길옆에 서서 “속도를 줄여!”라고 외치는 바로 그 남자다.’ 포로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 『태양의 제국』으로 [가디언상]을 수상했으며, 이 작품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대표작으로는 ‘지구 종말 시리즈’인 『물에 잠긴 세계』, 『불타버린 세계』, 『크리스털 세계』, ‘도시 재앙 시리즈’인 『하이-라이즈』, 『크래시』, 『콘크리트 아일랜드』, 그 외에도 『무한한 꿈의 회사』, 『태양의 제국』의 후속작인 『여인들의 친절』, 『코카인의 밤』, 『슈퍼-칸』, 『밀레니엄 피플』, 『나라가 임하옵시며』 등이 있다. 많은 작품을 남긴 발라드는 2006년에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으며, 투병 생활 끝에 2009년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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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

일본의 근·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1886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말기부터 쇼와 중기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며 다방면에 걸쳐 문학적 역량을 과시한 작가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수차례 지명되는 등 일본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탐미주의적 색채를 드러내며 여성에 대한 에로티시즘, 마조히즘 등을 극도의 아름다운 문체로 탐구하였다. 한평생 작풍이나 제재, 문장, 표현 등을 실험하며 다채로운 변화를 추구하였고, 오늘날 미스터리, 서스펜스의 선구가 되는 작품이나 활극적 역사 소설, 구전, 설화 문학에 바탕을 둔 환상 소설, 그로테스크한 블랙 유머, 고전 문학 연구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제일 고등학교를 거쳐 도쿄 제국 대학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퇴학을 당했다. 1910년 [신사조(新思潮)]를 재창간하여 「문신」, 「기린」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고, 소설가 나가이 가후로부터 격찬을 받으며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915년 열 살 어린 이시카와 치요코와 결혼을 했는데, 시인인 친구 사토 하루오가 그의 부인과 사랑에 빠지자 아내를 양도하겠다는 합의문을 써 [아사히신문]에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문화 예술 운동에도 관심을 가진 그는 시나리오를 써 영화화하고 희곡 『오쿠니와 고헤이』를 발표한 뒤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또한 1924년 『치인의 사랑』을 신문에 연재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검열로 중단되었다. 1942년에 그는 세 번째 부인이자 희구하던 여성인 마쓰코와 그 자매들을 모델로 『세설』을 쓰기 시작했다. 1943년 [중앙공론] 신년호와 4월호와 7월호에 연재되었던 『세설』은 7월호에도 실릴 예정이었으나 「시국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발표가 금지되었다가 전후에야 비로소 작품 전체가 발표되었고, 훗날 마이니치 출판문화상과 아사히 문화상을 받았다. 1949년에는 제8회 문화 훈장을 받았고 1941년 일본 예술원 회원, 1964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문학예술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에 뽑히기도 했다. 1958년 펄 벅에 의해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된 이래 매년 후보에 올랐으며 1965년에 80세의 나이로 신부전과 심부전으로 사망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문신』, 『후미코의 발(富美子の足)』, 『치인의 사랑(痴人の愛)』, 『춘금초(春琴抄)』, 『미친 노인의 일기(?癲老人日記)』 등이 있으며,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를 현대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사후 50년을 맞이한 2016년 저작권이 소멸되어 다수의 소설작품이 번역되었으나, 국내에는 다니자키의 극작가(희곡가)로서의 역량이 알려지지 않아 30여 편의 희곡 대부분이 미(未)번역 상태이다. 『문장의 희곡: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레제드라마』는 소설가로 데뷔하기 이전에 이미 희곡을 발표한 다니자키의 극작가로서의 숨겨진 일면을 소개하고, 1910~40년대 일본의 신극운동을 계기로 근대 초기 한일 양국의 소설가들의 희곡 창작과 레제드라마의 유행을 고찰한 연구의 성과물로 기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