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이체르 소나타』
레프 톨스토이 저 | 펭귄클래식코리아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 연진희 옮김, 민음사, 2009)
“저희는 하나의 쇠사슬에 묶인 채 서로를 증오하고 서로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며 사는 두 죄수였던 겁니다. 당시 저는 99퍼센트의 부부가 우리처럼 산다는 사실을, 하지만 별도리가 없음을 몰랐습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이기주 옮김, 펭귄클래식, 2008)
레프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세계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첫 문장의 하나로 꼽히는데요. 오늘 소개할 중편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가정불화(!) 세계와 묘하게 맞닿아 있는 듯합니다. 다만 『안나 카레니나』 출간 12년 후 집필된 이 작품은 ‘모든 가정은 똑같이 불행하다’라는 주장을 펼친다는 점에서 작가 세계관의 변화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첫 문장은 평범하다 못해 사뭇 평온합니다만(“이른 봄날이었다”) 노골적인 내용 때문에 금서로 지정되기까지 했습니다. 다행히 톨스토이의 아내가 차르에게 청원해 전집에는 실릴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지요.
소설은 러시아 횡단열차의 한 객차 안에서 승객들 사이에 벌어진 사랑과 결혼에 관한 논쟁으로 시작합니다.
“평생을 한 여자 또는 한 남자만 사랑한다는 것은 양초 하나가 평생 탄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 결혼이란 것은 그저 속임수에 다름 아닙니다!”
남녀 간의 “진실한 사랑이 결혼을 가능하게” 한다는 한 부인의 선언으로 시작된 이 논쟁은 한 신경질적인 신사 포즈드니셰프의 냉소, 즉 “결혼이란 것은 그저 속임수에 다름” 아니며, 자신이 바로 “아내를 살해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라는 응답으로 일단락됩니다. 열띤 토론 분위기가 확 가라앉으면서 모두들 포즈드니셰프를 슬금슬금 피하지요.
이후 그는 자신의 삶과 가치관, 결혼 생활 그리고 파국에 이르기까지 “사랑이 어떤 사건을 일으켰는지”를 화자인 ‘나’에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라 이후 작품의 말미까지 포즈드니셰프의 기이하고 왜곡된 세계관이 반영된 궤변만이 일방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해요.
대학을 졸업한 귀족이자 지주인 포즈드니셰프는 결혼 전까지, 젊은 남성의 방탕과 방종이 심지어 장려되기까지 하는, 상류 사교계의 일상적인 문화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순수한 처녀를 결혼 상대로 찾아다니지요. 결국 예전엔 부유했으나 지금은 파산한 지주 집안 딸의 성적 매력에 이끌려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한데 그는 상류사회의 결혼이란 일종의 매매 거래로서 유곽의 매매춘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상류층의 뻔뻔스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다면 그건 다름 아닌 유곽입니다. (…) 엄밀히 말해서 짧은 기간의 창녀는 경멸을 당하고, 긴 기간의 창녀는 존경을 받는 거지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시작한 결혼이 원만할 리가 없겠지요. 신혼여행에서부터 둘의 관계는 삐걱거리고, 아이들을 낳고 세월이 흐를수록 적대적인 감정만이 더욱더 쌓여갔습니다.
“사랑은 성욕의 충족으로 대체되었고, 우리는 정신적인 유대라고는 없는 그저 가능한 많은 쾌락을 서로를 통해 얻어내려고만 하는 완벽한 이기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당시 저는 이러한 우리의 차갑고 적대적인 관계가 본질적인 우리의 관계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불화가 반복되자 포즈드니셰프 본인도 (아내를 살해하기 전까지)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했고(이것은 그의 주장일 뿐 어떤 에피소드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내 역시 음독 자살 시도를 합니다(부부 싸움 끝에 아내가 가출했다 돌아와 자살 소동을 벌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더는 출산에 얽매이지 않게 되면서 아름답게 피어나 사랑을 갈구하는 아내와 젊고 잘생긴 바이올린 연주자 트루하쳅스키의 관계를 의심하게 됩니다.
“처음 그의 눈과 아내의 눈이 마주쳤을 때 그들 내부에 똬리 틀고 있는 짐승이 세상의 모든 상황과 조건을 무시하고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괜찮고말고요’라고 묻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다만 옆에 지긋지긋하게 버티고 서 있는 남편의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문제였습니다.”
질투심에 가득 차 의처증에 시달리는 한 남자의 정신세계를 작가는 가혹하리만치 사실적으로 서술합니다. 아내를 살해하는 장면 또한 충격적일 만큼 상세하게 묘사하고요. 한데 포즈드니셰프는 아내를 칼로 찔렀을 때가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죽였다고 설명합니다. 아내를 그저 욕구와 쾌락의 도구로만 여기며 결혼했을 때 이미 아내를 살해한 것과 진배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아내를 죽인 게 아니라 훨씬 더 이전에 죽인 겁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를 죽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도 그렇게 그녀를 죽인 겁니다.”
사실 아내의 불륜에 대한 의심과 질투는 그럴싸한 핑계에 불과했고, 모든 결혼은 자살 혹은 살해로 끝날 수밖에 없는 필연이었다는 건데요. 이거 너무 무서운 이야기일까요!
“남편과 아내는 평생을 함께 살겠다는 외적인 의무를 받아들이고 나서 두 달째면 벌써 서로서로를 미워하게 되어, 헤어지고 싶지만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바로 여기서 알코올중독이나 권총 자살 또는 서로를 죽이거나 독살하는 끔찍한 지옥이 생겨나는 겁니다.”
함께 읽을 거리로는 J. G. 밸러드의 단편 「12번 트랙」(『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조호근 옮김, 현대문학, 2017)과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중편 「열쇠」(『열쇠』, 이한정 옮김, 창비, 2013)를 권하고 싶어요. 스포일러가 될까 봐 내용을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 두 작품 다 결혼 생활을 다루고 있답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심하은 (출판 편집자)
은행나무 해외 문학 편집자.
오호
2025.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