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실 양호 선생님이 내게 씌워준 ‘최초’라는 왕관이 있었다. 그것은 차가운 것을 함부로 만져 얼음 화상을 입은 최초의 학생. 드라이아이스를 맨손으로 옮기면서 느꼈던 그 뜨거움을 뭐라 설명할 수 없어서, 내가 내 고통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어서 보건실 흰 커튼 아래서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너무 차가운 것에도 델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된 것은 여기, 이 겨울 시집들을 읽으면서였다.
올해는 유독 여름 속에서 영원이라는 광물을 캐는 시집들을 분주하게 만나왔다. 겨울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겨울은 무엇을 다 뱉어내고 창백해질까. 차가운 것에 손을 집어넣고 견디면 잡아챌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차가워서 델 수도 있다는 이 통증에는 소리가 없다. 말하고 있는데, 들리지 않는다. 나를 완벽한 청자로 만든다. 털어내야 흩날릴 수 있다. 유산지에 담긴 흰 가루약처럼, 고요히 머금어 보는 이야기들.
조혜은 저 | 민음사
글러브를 끼면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소망은, 약해짐으로써 강해지는 것.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한 것들을 가두어 두고 보길 좋아한다고.
나는 한없이 약해져야 했고 그래서 강해져야 했다.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은 더는 기록할 수 없는 소망이었다.
(「눈 내리는 체육관─독감」의 부분, 『눈 내리는 체육관』 42쪽)
나는 이 시집을 읽은 순간부터 계속 사랑하고 있다. 나온 지 오래 되지 않았지만, 내 겨울 한복판에 체육관으로 세워져 있다. 누가 드나드는지 알 수 없는, 그 안에서 샌드백 치는 소리가 심장박동처럼 들리는 시집. 나는 체육관을 바라보면서 소리 없는 싸움을, 투쟁을, 견딤을 지켜본다. 사랑하는 것이 나를 옥죄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것을 좀먹는 것을 볼 수 없어서, 결국 나 자신과 싸우게 되는 시. “나는 한없이 약해져야 했고 그래서 강해져야 했다”는 이 오묘한 문장에 겹쳐지는 여러 가지 얼굴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글러브를 끼”고 쓴 시들을 읽는다. ‘눈 내리는 체육관’이라는 제목의 연작 시들은 적어도 글러브를 맨손으로 꽉 쥐고 차가운 것들을 깨부수는 빙판의 시들이다. 그리고 글러브를 뺐을 때 손에서 나는 열기, 자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 열망과 희망을 느끼는 비참하고도 정당한 방식에 나는 이 시들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판정승을 내리는 겨울의 심판이 되어서 얻어맞아 퉁퉁 부은 새로운 소망의 얼굴을 본다.
임주아 저 | 걷는사람
내가 나를 던지지 않고 아무도 나를 밀지 않아서 눈이 떨어진다. 어깨에 떨어진 사람들이 꿈을 꾼다. 꿈에서 성벽보다 높은 난간을 바라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
(「죽은 사람과 사랑하는 겨울」의 부분, 『죽은 사람과 사랑하는 겨울』 45쪽)
임주아 시인의 첫 시집은 사랑을 종언하는, 벼랑 끝에 선 이의 목소리 같지만 판가름할 수 없었던 사랑 속에서 빠져나오는 절체절명의 시들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겨울 거리에서 시인은 눈사람을 빚을까, 떠나간 애인들이 불러준 ‘좋은 사람’으로 떠돌까, 등으로 골목 벽을 치며 흐느끼고 있을까.
사랑이 끝난 뒤에 갖게 되는 언어가 있다. 그 언어는 겨울의 속성과 매우 닮아 있다. 얼음장처럼 차갑다가도, “살아남아 사랑을 돌”봐야 할 때 하게 되는 말. 사랑은 결국 “두 사람의 나 자신에 대해”(「걷는 연습」) 말해야만 하는 일. 시인은 죽은 사람과 사랑하는 겨울을 보내며 이 눈보라를 지나고 있다. 사랑 앞에선 나도 누군가에게 죽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손 시린 진실을 마주보게 하는 시들이다.
황유원 저 | 창비
눈사람은 아무 미련 없다는 거
눈사람은 녹아가면서도
자신을 만들어준 사람의 기억을 품고 있고
이번 생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어쩌면 그런 생각만이 영영 무구하다는 거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눈과 사람의 합산
오직 사람이 만들어낸 눈사람만이
천국에 간다는 거
(「천국행 눈사람」의 부분, 『하얀 사슴 연못』 21쪽)
눈 내리는 성당 풍경의 시들이 흐르다가, 거울과 겨울 그 오묘한 사이를 사뿐사뿐 걸으며 세상에 창백한 한 장의 거울을 빚는 시들. 읽다 보면 어느새 눈송이의 발걸음처럼 고요함과 동기화된 내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나는 이 시집의 백색 소음. 이 시집이 겨울 시집이라고 느껴진 것은 향, 뼈, 잔, 썰매, 종이, 뿔과 같은 겨울의 간단한 단어들이 동원되어서가 아니다. 그 희고 소리 없는 것들의 실황을 적극적으로 받아 적으며 그 간단해 보이던 존재를 입체적으로 구성해 이야기의 입을 것이 된다는 아름다움을 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는 삶을 살아가는 순간부터 때묻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더럽혀지며 존재감이라는 발각될 수밖에 없는 신체를 갖는다. 태초에 한 단어처럼 간단하고 추상적이었을 삶. 삶에 드리워진 겨울 풍경의 실황을 그리며 존재하는 방식의 입체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삶을 선명히 말하는 방식으로 느껴진다.
녹아 사라지거나 허물면 망가지는 신체를 지닌 눈사람을 천국에 간다고 믿는 것은, “눈과 사람의 합산”이라는 무구한 오해 때문이다. 때론 그렇게 믿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겨울이 도무지 끝나질 않을 것이고, 미련 때문에 존재는 얼음 화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박성현 저 | 문학수첩
눈이 내렸다 매일 높고 따뜻한 새가 날아와 당신을 지웠다 흰 눈이 내리면 내 몸에서 쏟아지는 울음을 꾹꾹 눌러 심장 속에 감췄다 심장을 찢어야 울음을 꺼낼 수 있는 한여름, 흰 눈은 그치지 않고 자꾸 당신을 지웠다
(「흰 눈」의 부분,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33쪽)
지난 달, 박성현 시인의 부고 소식을 접했다. 올여름에는 그의 새 시집이 집에 도착해 있었다. 그에게 인사를 꼭 전하려고 우편 봉투에 적혀 있던 그의 연락처와 이메일이 적힌 부분을 찢어 책에 꽂아두고는 잊고 지내다 듣게 된 소식. 같은 해에 등단해 우연히 마주치면 어쩐지 오랫동안 알아온 사이처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곤 했었다. 애석하게도 그가 떠난 뒤에야 그의 시집을 펼쳐 읽었다. 그리고 그가 빙하와 눈과 겨울에 천착해 있던 지난 시집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신을 지우면 슬픔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슬픈 당신까지 지워지는 슬픔은 너무 참혹해서 먼저 빙하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 언덕의 여름과 바깥의 저녁과 눈동자 속 빙하를 새처럼 떠돌다가 먼 여행을 떠난 사람, 故박성현 시인에게 이 겨울의 뜨거움을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서윤후
2009년 『현대시』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나쁘게 눈부시기』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고양이와 시』가 있다. 시에게 마음을 들키는 일을 좋아하며 책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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