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삭 칼럼] 문자와 문자를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희곡 번역
중화권 대중문화와 문학 ② - 김이삭 작가가 말하는 소설 번역과 희곡 번역의 차이점.
글 : 김이삭
2025.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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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드라마투르그이자 희곡 번역가인 타이완 지인이 내게 소설 번역 작업과 비교했을 때 희곡 번역 작업의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특히 화어권 희곡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 겪게 되는 어려움으로는 뭐가 있냐고. 당시 나는 ‘출간되는’ 희곡 번역본의 윤문 작업만 해봤을 뿐 상연을 목적으로 한 희곡을 번역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 궁금증을 풀어줄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소설을 번역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이야기해 주었다. 당시 나는 한중 SF 여성 작가 앤솔러지인 『다시, 몸으로』의 번역고를 퇴고하고 있었고, 전에는 겪어본 적이 없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소설 번역과 희곡 번역은 전혀 다른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아예 상관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시, 몸으로』의 경우 출간과 동시에 오디오북 런칭이 확정되어 있었으니까. 이 글이 문자가 아닌 성우의 목소리로만 전달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번역해야 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 더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뭐가 그렇게 다르냐고. 골머리를 앓을 정도는 아니지 않냐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게는 너무나 큰 문제였다.

 

오디오북에는 주석을 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다음은 올해 번역 출간되었던 『다시, 몸으로』와 『여신 뷔페』 속 본문과 관련 주석 중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맛있는 사과’는 ‘뱀 과일(蛇果)’이라는 어휘로 음역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특정한 품종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

[주석] 레드 딜리셔스 애플이 미국에서 중국 광둥성으로 처음 수출되었을 때, 포장지에 적힌 “Delicious Apple”을 보고 사람들이 ‘디리셔 과일(地喱蛇果)’이라고 불렀는데 후에는 뱀과일[蛇果]이라고 줄여서 부르게 되었다. 이에 ‘맛있는 사과’라는 뜻을 음역한 ‘뱀과일’은 ‘레드 딜리셔스 애플’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시, 몸으로』 중 「내일의 환영, 어제의 휘광」에서)

 

내용으로 짐작건데 10시 방향이 본부인이었고 8시 방향이 불륜녀였다. 그런데 나는 본부인과 불륜녀 사이에 존재할 또 다른 당사자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남자의 목소리든 여자의 목소리든. * 

[주석] 2019년 5월 17일 타이완 입법원(국회)이 행정원에서 제출한 동성혼 특별법을 통과시키면서 타이완은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을 법제화한 나라가 되었다. (『여신 뷔페』 중 「항아는 응당 후회하리라」에서)

 

강가 모래섬에서  

[주석] 이 작품의 원제 ‘재하지주(在河之洲)’는 『시경』 「주남(周南)」편에 수록된 시 「관저(關雎)」의 “끼룩끼룩 우는 물수리, 강가 모래섬에 지어있네. 아름답고 현숙한 여성은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關關雎鳩, 在河之洲, 窈窕淑女, 君子好逑)”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여신 뷔페』 중 「강가 모래섬에서」에서)

 


 

주석 없이 위의 맥락들을 독자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그것도 고전 인용이나 역사 혹은 신화의 재해석이 잦은 화어권 문학을? 그러나 오디오북 제작은 확정된 일(이라고 쓰고 엎질러진 물이라고 읽는다)이었기에 의구심에 빠지기보다는 어떻게든 해내야 했고, 어찌어찌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번역 작업을 마쳤다. 

 

그리고 몇 달 뒤, 본격적으로 상연을 목적으로 한 희곡 번역 작업을 하게 되면서 나는 진짜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날은 곧 낭독 공연으로 올려질 희곡 번역고를 다 함께 낭독으로 들어보는 날이었다. 눈으로 읽을 때는 별다른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던 대사들이 막상 귀로 들으니까 무언가 이상했다. 또 이날은 특별 게스트로 이번 낭독 공연의 연출을 맡은 연출가가 함께했는데, 낭독이 끝난 뒤 이런저런 질문을 했었다. 특히 인물의 대사나 행동에 대한 의문이 많았는데, 이러한 의문점은 사실 중국 사회 및 문화에 대한 이해와 맞닿아 있었다. 

 

이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이게 만약 소설이었다면 주석을 달아서 배경 설명을 해줬을 텐데, 종이 위에 문자로 인쇄되는 형식이었다면…….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객석에 앉은 관객은 주석을 볼 수 없으니까. 

 

아, 그 전에 이 낭독 공연을 잠시 소개하고 싶다. 전공 선생님들의 부름으로 작년부터 한중연극교류협회에서 일을 돕고 있는데, 한중연극교류협회에서 가장 중점적인 행사가 ‘중국 희곡 낭독 공연’이다. 당대 중국 희곡 중 좋은 작품을 선별해 번역하고,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낭독 공연으로 올리고 있는데, 2025년을 기준으로 벌써 제8회가 되었다. (올해는 9월 3일부터 9월 7일까지 『광인일기』『현실동화』 그리고 『날개 달린 두약』을 상연했다.)

 

몇 주 뒤, 전체 연습이 있는 날에 맞춰서 연습 장소를 찾았다. 같은 협회에 속한 번역가 선생님이 연습할 때 가면 배우들의 질문 폭탄을 받게 된 거라고 언질을 주셨는데, 다행히 별다른 질문을 받지 않았다. 내가 먼저 선수를 쳐서(?!) 1시간 넘게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이 소설이었다면 내가 달았을 법한 주석들을, 혹은 메모로 달아서 편집자에게 설명해 줬을 내용들을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하나하나 다 이야기했다.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 투머치토커다.) 

 

그리고 나의 일방적이었던 대화가 끝나고 배우들의 진짜 연습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소설 번역과 희곡 번역의 가장 큰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 배우들의 목소리로 살아난 그 문장은, 내가 옮긴 문장이 맞지만 더는 내가 옮긴 문장이 아니었다. 그건 그냥 말이었다. 사람이 하는 말이자 극중 인물의 말이었고 가끔은 (연출적인 이유로 인해) 배우의 말이기도 했다. 또 무대 언어이기도 했다. 아무튼 내가 옮겼던 글에서 무언가가 더해졌거나 조금 변했거나 혹은 아예 무관해진 무언가였다.

 

내가 우리말로 옮긴(혹은 내가 쓴) 글을 종이에 담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전해주면 이렇게 되는 거구나. 그날, 나의 깨달음이었다.

 

소설 번역이 저 문자를 이 문자(우리말)로 이어서 독자에게 전해주는 거라면, 희곡 번역은 저 문자를 이 문자로 이어서 저 사람과 이 사람이 이어지게 만드는 거였다. 여기서 저 사람과 이 사람은 배우일 수도 있고, 극 중 캐릭터일 수도 있지만, 절대 관객은 아니었다. 나는 관객에게 바로 닿을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묘하게 부담감이 줄어들었다. 나의 별것 아님에 안도하게 되었달까. 

 

생각해 보면 연극에는 주석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게 많지 않은가. 배우가 있고, 무대가 있고, 의상이 있고, 사운드가 있고, 조명이 있다. 희곡을 문자 너머의 무언가로 만들어주는 수많은 이들이. 다음번에 지인이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희곡 번역의 어려움 대신 희곡 번역의 좋은 점을 말해줘야지. 여기는 오역이나 오탈자가 있어도 많은 이들이 함께 고쳐주는 곳이라고 말이다. 

 

 

함께 읽기



 

『다시, 몸으로』

김초엽, 김청귤, 천선란, 저우원, 청징보, 왕칸위 저/김이삭 역 | 래빗홀

한중 SF 여성 작가 6인이 그려낸 몸이라는 소우주와 세계라는 대우주.


 

『여신 뷔페』

류즈위 저/김이삭 역 | 민음사

타이완 페미니스트 작가의 역사, 신화, 고전 문학 속 여혐 비틀기.

 


『날개 달린 두약』

구레이 저/김우석 역 | 연극과인간

그 시절 우리 어머니들의 리즈 시절은 이랬다.

 


『현실동화』 

양샤오쉐 저/김이삭, 김우석 역 | 연극과인

죽음이라는 결말로 다시 쓴 현실 동화.



『광인일기』 

루쉰 원저/좡자윈 편/장희재 역 | 연극과인

봉건 예교를 식인의 예교로 비판한 루쉰의 소설을 각색.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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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몸으로

<김초엽>,<김청귤>,<천선란>,<저우원>,<청징보>,<왕칸위> 저/<김이삭> 역

출판사 | 래빗홀

여신 뷔페

<류즈위> 저/<김이삭> 역

출판사 | 민음사

날개 달린 두약

<구레이> 저/<김우석> 역

출판사 | 연극과인간

현실동화

<양샤오쉐> 저/<김이삭>,<김우석> 역

출판사 | 연극과인간

광인일기

<루쉰> 원저/<좡자윈> 편/<장희재> 역

출판사 | 연극과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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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삭

평범한 시민이자 소설가 그리고 번역가. 중화권 장르 소설과 웹소설, 희곡을 번역했으며 한중 작가 대담, 중국희곡 낭독 공연, 한국-타이완 연극 교류 등 국제 문화 교류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한성부, 달 밝은 밤에』, 『감찰무녀전』,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 등이, 역서로는 『여신 뷔페』, 『다시, 몸으로』 등이 있다. 홍콩 영화와 중국 드라마, 타이완 가수를 덕질하다 덕업일치를 위해 대학에 진학했으며 서강대에서 중국문화와 신문방송을, 동 대학원에서는 중국희곡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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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중국의 문학가, 사상가, 혁명가이자 교육가. 본명은 저우수런이고 자는 위차이이다. 중국 현대 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루쉰은 당대의 중국 예술과 화에서 다른 어떤 작가와도 비견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적 영웅으로 찬양한 루쉰은 중국혁명의 지적 원천으로서 추앙받아 왔으며, 마오쩌둥을 위해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저장성 사오싱(紹興)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조부의 하옥, 아버지의 병사 등으로 어려서부터 고생스럽게 살았다. 청년시대에 진화론과 니체의 초인철학, 톨스토이의 박애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898년 난징의 강남수사학당에 입학, 당시의 계몽적 신학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02년 졸업 후 일본에 유학, 고분학원을 거쳐 1904년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문학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의학을 단념, 국민정신의 개조를 위하여 문예 활동에 힘썼다. 1905~1907년 혁명당원의 활동에 참가하고, ‘마라시력설’, ‘문화편지론’ 등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무렵 유럽의 피압박민족 및 슬라브계 작품에 공감하여 1909년 동생 저우쭤런(周作人)과 ‘역외소설집’을 공역하는 한편, 망명중인 장빙린(章炳麟)에게 사사하였다. 1909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남경임시정부와 북경정부의 교육부원이 되어 일하면서 틈틈이 금석 탁본의 수집, 고서 연구 등에 심취하였다. 1918년 문학혁명을 계기로, 처음으로 ‘루쉰(魯迅)’이라는 필명을 사용, 중국현대문학사상 첫번째의 백화소설인 ‘광인일기’를 발표하여 신문학운동의 기초를 다졌다. 5·4운동 전후 ‘신청년’ 잡지의 일에 참가하여 ‘5·4’ 신문화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1918년에서 1926년에 이르는 동안 창작을 계속하여 소설집 ‘눌함’, ‘방황’, 논문집 ‘분(墳)’, 산문시집 ‘야초’, 산문집 ‘조화석습’, 잡문집 ‘열풍’, ‘화개집(華蓋集)’, ‘화개집 속편’ 등을 출판하였다. 이 중에 ‘공을기(孔乙己)’, ‘고향’, ‘축복’ 등을 발표하여 중국 근대문학을 확립하였는데, 1921년 12월에 발표된 중편소설 ‘아Q정전(阿Q正傳)’은 중국현대문학사상 불후의 대표작으로 세계적 수준의 작품이다. 많은 외국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였고, 1920년 이후에는 베이징대학, 베이징여자사범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4년 저우쭤런과 어사사를 조직하고, 1925년 청년문학사와 미명사(未名社)를 조직하였으나, 1926년 8월 베이양 군벌의 문화 탄압과 격돌한 베이징 학생애국운동 지지로 말미암아 베이징을 탈출, 아모이대학 중문과 주임으로 부임하고, 1927년 1월 당시의 혁명 중심 광저우(廣州)에 이르러 중산대학의 교무주임이 되었다. 1927년 가을 상하이의 조계에 숨어 쉬광핑(許廣平)과 동거하며 문필생활에 몰두하는 한편, 창조사, 태양사 등 혁명문학을 주창하는 급진적 그룹 및 신월사(新月社) 등 우익적 그룹에 대한 논전을 통하여 매우 전투적인 사회 단평(短評)의 문체를 확립하였다. 한편 소비에트 러시아 문학작품을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1930년 전후하여 중국자유운동대동맹, 중국좌익작가연맹과 중국민권보장동맹에 참가하여 국민당 정부의 독재 통치와 정치 박해에 항거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뒤에 대두된 민족주의 문학, 예술지상주의 및 소품문파(小品文派)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1927년부터 1936년까지 역사소설집 ‘고사신편’을 출판하였고, 대부분의 작품과 잡문은 ‘이이집’, ‘삼한집’, ‘이심집’, ‘남강북조집’, ‘위자유서’, ‘준풍월담’, ‘화변문학’, ‘차개정잡문’, ‘차개정잡문 이편’, ‘차개정잡문 말편’, ‘집외집’과 ‘집외집습유’ 등에 수록되었다. 또 1931년부터 판화 운동도 지도하여 중국 신판화의 기틀을 다졌다. 루쉰의 일생은 중국 문화사업에 지대한 공헌을 이룩하였다. ‘미명사(未名社)’, ‘조화사(朝花社)’ 등 문학 단체를 영도하고 지지하였으며, ‘국민신보부간’, ‘망원(莽原)’, ‘어사(語絲)’, ‘분류(奔流)’, ‘맹아(萌芽)’, ‘역문(譯文)’ 등 문예잡지를 주편하였고, 청년 작가를 열성적으로 적극 배양하였다. 외국의 진보된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데 힘쓰고, 국내외의 저명한 회화, 목각을 소개하였으며, 대량의 고전문학을 수집, 연구, 정리하고, ‘중국소설사략’, ‘한문학사강요’를 저술하였으며, ‘혜강집’을 정리하고 ‘회계군고서잡록’,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沈)’, ‘당송전기록’, ‘소설구문초’ 등등을 집록하였다. 죽기 직전에는 항일투쟁 전선을 둘러싸고 저우양(周揚) 등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에는 대체로 그의 주장에 따른 형태로 문학계의 통일전선이 형성되었다. 그의 문학과 사상에는 모든 허위를 거부하는 정신과 언어의 공전이 없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뿌리박은 강인한 사고가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 1936년 10월 19일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나고 민중 만여 명이 자발적으로 공제(公祭)를 거행하여 훙자오만국공묘에 묻혔다. 1956년 루쉰의 유해는 훙커우공원에 이장되었다. 1938년 ‘루쉰전집’ 20권이 출판되었다. 그를 혁명의 모범이자 사상의 근원으로 여긴 마오쩌둥에 의해 20세기 내내 중국을 지배한 개혁과 혁명적 변화의 선동가로서 거의 신적인 존재로까지 추앙받았다. 인민정부 성립 후, 루쉰의 저서는 분야별로 나뉘어 ‘루쉰전집’ 10권, ‘루쉰역문집’ 10권, ‘루쉰일기’ 2권, ‘루쉰서신집’이 간행되었고, 루쉰이 편교(編校)한 고적(古籍) 여러 종류도 다시 간행되었다. 1981에는 ‘루쉰전집’ 16권이 출판되었다. 베이징, 상하이, 사오싱, 아모이 등지에는 전후하여 루쉰 박물관, 기념관 등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