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희곡을 읽는 일
희곡은 소설을 능가하는 고유한 독서 경험을 제공해 준다. 군더더기 없는 대사와 지문, 제한된 시공간과 인물 사이에서 빚어지는 강렬한 화학 작용! 기나긴 산문에서는 느끼기 힘든, 칼같이 예리한 충격을 선사한다.
글 : 유상훈 (편집자)
2025.09.03
작게
크게


『가스등』

패트릭 해밀턴 저/민지현 역 | 민음사

 

시와 소설은 읽지만, 묘하게도 희곡만큼은 어쩐지 읽는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바꿔 말하자면, 시와 소설은 읽기를 목표로 하고 거기서 완결되지만 희곡은 보다 복잡한 뭔가를, 가령 무대를 연출하기 위한 스케치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곰곰 생각해 보니, 그동안 온갖 책을 사들이고 읽어 왔음에도 희곡을, 문자 그대로 ‘독서하기 위해 독서’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내가 가장 숭배하는 작가, 셰익스피어의 경우만 하더라도, 나는 그의 무대(BBC에서 극화한 작품)를 시청각적으로 체험했을 뿐, 책 속의 문장을 내리 읽은 적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마치 경전을 다루듯, (민음사에서 출간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비롯해, 심지어 영문판이나 일본어판으로도 그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그나마 들여다본 것이라고는 「맥베스」나 「리처드 2세」가 전부랄까? 유독 좋아하는 대사가 나오는 이 작품들만을, 정말 순수히 글로 읽어 본 것이다.

 

따라서 희곡을 편집해 본 적도 없었다. 분량이 적을수록 담당자의 수고가 산뜻해지는 편집 일의 특성상, 희곡은 시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보인다. 일단 글자 하나하나를 읽어 내야 하는, 그 절대적인 작업 시간이 줄어들기만 해도, 뭐랄까 한시름이 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희곡을 편집해 보니, 단순히 홀가분한 기분을 넘어서,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경험이었다. 분량의 경중은 작업에 대한 만족도나 재미와는 별개의 문제이니 말이다.

 

인터넷 따위 없던 어린 시절에, 내가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는 참으로 제한적이었다. 책과 텔레비전. 아직은 글을 읽는 데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던 지난날, 내 문화적 갈증을 해소해 주는 건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볼 수 있는 영화나 애니메이션, 그리고 주말 밤이면 장엄한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던 ‘세계 명작 영화’ 정도였다. 아마도 그때 조지 큐커가 연출하고, 잉그리드 버그만이 열연한 영화, <가스등>을 처음 보았던 것 같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시간표를 보고 이때를 기다리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는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세기의 미인이 등장하는 영화라면 어머니와 할머니도 꼭 챙겨 봤다. 명절 단골손님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벤허> 등은 얼마나 많이 봤던가. 그리고 내 혼을 쏙 빼놓았던,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클레오파트라>도 잊을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클레오파트라>도 셰익스피어의 작품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원작으로 하는데, 사실상 이 같은 예는 무수히 많으며, 요컨대 희곡이란 우리 도처에 있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영화 <가스등>이 이따금 조명받곤 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패트릭 해밀턴의 동명 희곡은 좀처럼 소개된 적이 없는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 덕분에, 패트릭 해밀턴의 작품을, 무려 두 편(앨프리드 히치콕이 연출한 <로프>의 원작이 되는, 같은 제목의 작품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이나 몸소 편집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말이다. 이들 작품을 기획하면서, 먼저 스스로 확인해 봐야 할 질문은 오직 한 가지였다. 과연 희곡은 ‘읽기’에 재미있는가? 나는 당연하게도 (역시나 가장 자극적인)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들을 읽어 보았고, 바로 깨달음을 얻었다. ‘패트릭 해밀턴의 작품을 우리말로 소개하는 건 내 운명이다.’ 희곡은 분명 상연을 위한 밑그림일 테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읽기’ 또한 우리 머릿속에 글줄을 연출하는 과정이 아니던가. 심지어 희곡은 소설을 능가하는 고유한 독서 경험을 제공해 준다. 군더더기 없는 대사와 지문, 제한된 시공간과 인물 사이에서 빚어지는 강렬한 화학 작용! 그야말로 기나긴 산문에서는 느끼기 힘든, 칼같이 예리한 충격을 선사한다. 또 희곡의 경우, 인물의 심리가 대개 대사나 행동으로 주어지는 까닭에, 독자가 직접 그 여백을 유추하고 재구성해 봐야 하는데, 이 또한 매우 신선한 기쁨이다. 이를테면, 독자라기보다 배우-연출가처럼, 저마다의 캐릭터를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 속에 참여하는 것이다. 

 

「가스등」은 ‘가스라이팅’의 교과서답게, 순수악 잭 매닝엄이 아내 벨라 매닝엄을 심리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갖가지 술수를 총동원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 두 인물의 길항을 체험하기만 해도 제법 계몽적이다. 아마 소설이었다면, 온갖 사연과 사정과 내력 등으로 인해 어렴풋하게 다가왔을 위기가, 마치 사건 현장의 요점만을 정리한 조서처럼 훅 파고드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망신 줘서 자존감 짓밟기, 기억 왜곡하기, 소통할 수 있는 모든 관계를 끊어 놓기, 그리하여 단 한 사람에게만 의지하게 하기. 이런 사악한 마수(魔手)가 뻗치는 과정을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에서, 육성으로 들으니, 누구든 자기 삶을 저절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편, 「로프」는 훨씬 철학적인 문제를 사변적인 음성으로 들려주는데, 이 또한 실제의 사건을 모티프로 삼은 만큼, 인간 본성과 사회 정의를 반추하게 한다. 특히 이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칫 웅변적으로 들릴 법한 (어색하고) 복잡한 논박조차 희곡으로 읽으면 매우 자연스럽다. 요컨대 희곡은 등장인물 각자가 자기 목소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작가가 더욱 물러나 있는 듯 느껴지는데, 바로 이 점이 희곡을 ‘읽는’ 독특한 재미이자 강렬히 몰입하게 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곡을 읽는 데에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어쩌면 읽기가 보기나 듣기보다 훨씬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기에, (상연을 거부하는 희곡이 아니고서야 거의 확정적으로) 무대나 영상으로 접할 수 있는 이 장르를 굳이 글로 마주하기 싫을 수도 있다. 또한 희곡이란 본디 무대에 올랐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머릿속, 그 상상의 공간은 그 어느 무대보다도 넓고 무한히 자유롭다. 가끔 독자가 아닌 연출가 혹은 배우로서 책을 펼쳐 봐도 좋을 것이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0의 댓글

가스등

<패트릭 해밀턴> 저/<민지현> 역

출판사 | 민음사

Writer Avatar

유상훈 (편집자)

책을 읽고, 책을 만들고, 좋은 책을 찾아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