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선명한] 희망을 그리는 가망서사의 책
작은 출판사의 책을 소개하는 큐레이션 시리즈 ‘작지만 선명한’. 절망과 희망 사이 가망 있는 삶의 이야기를 전하는 1인 출판사 ‘가망서사’의 책을 소개합니다.
글 : 박우진
2025.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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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망’의 사전적 뜻은 ‘가능한 희망’입니다. 가능한 희망을 그려본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저 멀리 웅장하고 이글이글한 풍경이 아니라 손안의 단단하고 은근한 것이 떠오르시지 않나요. 그런 것을 쥐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소중한 것, 만져지는 것. 그렇기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을 것. 세계의 미래가 막막한 와중에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또 제 몫의 하루를 살게 하는 이야기는 바로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긴긴 길을 끝내 동행하는 십리사탕 같은 이야기. 가망서사는 그런 이야기를, 절망과 희망 사이 가망 있는 삶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시작한 1인 출판사입니다. 

 

2022년 9월 생추어리의 나이 든 동물 초상 사진집 『사로잡는 얼굴들』을 선보인 후 3년간 9종을 출간했습니다. 편집자에게 가장 애틋한 책은 『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이고, 독자께 가장 사랑받은 책은 『조응』입니다. 주로 생태, 장애, 여성 역사를 다룬 인문·예술 책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특정 주제나 분야보다 동시대 삶의 형편과 맞닿는 쓸모를 생각하기에, 한 해 한 해의 지점은 조금씩 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그중 세 권을 이어 그간의 ‘가망’을 그려보려고 합니다. 또한 가망서사를 준비할 때부터 동지로 삼아온 다른 출판사의 책 한 권도 함께 꺼내봅니다.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앨리스 웡 엮음/앨리스 셰퍼드 외 저/박우진 역 | 가망서사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때, 엮은이 앨리스 웡이 한 신문에 기고한 글을 보았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코에 호흡기 호스를 꽂은 중증장애인(앨리스 웡 자신)의 사진 옆에 “우리는 죽어도 되는 사람입니까?”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재난 상황에서 약자들에 대한 정부의 대책 미비를 꼬집는 글이었는데 놀랄 만한 외양과, 놀랄 만한 배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해 화면을 뚫고 나올 듯했습니다. 그 기세에 이끌려 이 장애인 당사자 에세이집을 찾아 읽게 되었는데, 과연 신세계였습니다. 장애인, 퀴어, 비인간… 가장 취약한 자리, 가장자리로부터 솟구친 장애 정의의 이상은 과거에 본 울적한 장애 서사의 기억을 폭포처럼 씻어버렸습니다. 그 광경이 진정 멋지지 않았다면 이 책을 한국에 소개하지 않았을 겁니다.  



 

『조응』

팀 잉골드 저/김현우 역 | 가망서사


탐조를 시작하면서, 심상했던 뒷산은 생생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정작 새를 마주치는 것은 찰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그 출현을 기다리는 과정이었는데, 기다림이란 수동의 상태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잔뜩 돋아난 촉각에 나무, 바람, 돌, 온갖 숨탄것들의 자취가 들락거렸습니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나와 뒷산, 안과 밖의 경계가 (새를 보러 왔다는 목적과 함께) 흐릿해졌고요. 인류학자 팀 잉골드의 표현에 따르면 아마도 이것은 “뒷산의 짓을 하는 뒷산”에서 “인간의 짓을 하는 인간”이 “생명의 차원에서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친 사건일 텐데요, 『조응』을 읽는다면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 이 책은 만물이 세계 속에 뒤얽혀 존재하는 방식, 인류가 오랫동안 잃어온 삶의 감각을 깊숙이 일깨웁니다.  


 

『보이저』

노나 페르난데스 저/조영실 역 | 가망서사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습니다. 희생자 중에는 아타카마 사막에서 처형당한 스물여섯 명도 있었지만 그 죽음은 오래도록 은폐되었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남편과 아들, 아버지를 찾아 여성들은 단서 하나 없이, 망망한 모래를 맨손으로 뒤져야 했습니다. 역사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듯 악몽 같은 세월. 그러다가 문득 깨보니 다 살아버렸더라고 말하는 할머니 비올레타에게 작가 노나 페르난데스는 귀를 기울입니다. 그 빈 시간을 소중한 이야기의 모양으로 빚어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려고요. 개개인에게 지워졌던 상실이 공통 감각이 될 때 비로소 역사가 민중의 몫이 된다고 작가는 믿습니다. 민주주의는 기억의 힘에 뿌리내린다는 것을 한국 독자들만큼 잘 아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요. 이 책은 지구 반대편 칠레에서 왔지만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가까운, 사랑과 용기의 메시지입니다. 

 

함께 읽는 다른 출판사의 책

 


『망명과 자긍심』

일라이 클레어 저/전혜은, 제이 역 | 현실문화

 

책을 만드는 사람과 출판사의 영혼은 늘 경험한 책들의 궤적을 떠돌고 있기에, 가망서사의 초심을 회고하면 준비할 당시 마음에 둔 몇 권의 책이 떠오릅니다. 퀴어, 장애인, 성폭력 생존자이자 산촌 노동자 집안 출신인 저자가 지나온 삶의 맥락들을 가로지르며 마침내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 내는’ 이 이야기는 가망서사의 꿈과 닮았습니다. 일라이 클레어의 “몸이라는 집”에는 여러 시공간, 온갖 관계와 문제들이 깃들여 복작거립니다. 그가 그들과 다투고 화해하고, 돌보고 수선하고… 마침내 동행하는 이 여정에서 인간이 자신 안에 온전히 있는 일과 세계에서 충실히 자리 잡는 일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읽는 이들에게도 무언가 단단하고 은근한 것을 쥐여주죠. 책을 매개로 일어나는 이 고요하고 찬연한 사건에 저는 가망이라는 이름을 붙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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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으로 존재하기

<앨리스 셰퍼드> 등저/<박우진> 역

출판사 | 가망서사

조응

<팀 잉골드> 저/<김현우> 역

출판사 | 가망서사

보이저

<노나 페르난데스> 저/<조영실> 역

출판사 | 가망서사

망명과 자긍심

<일라이 클레어> 저/<전혜은>,<제이> 역

출판사 | 현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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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진

출판사 가망서사에서 책을 만든다. 세상의 속도에 지지 않는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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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 페르난데스

1971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태어났다. 연극을 공부한 후 배우 겸 작가로 활동했다. 피노체트 군사 정권하에서 성장한 자신의 경험과 칠레 역사, 민중의 삶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아 민주주의와 기억의 문제를 제기한 ‘독재의 딸아들’ 세대 작가 중 한 명이다. 2000년에 첫 단편 소설집 《하늘El Cielo》을 출간했으며 2002년 산티아고를 가로지르며 “쓰레기와 시체를 흘려보낸” 강의 이름을 딴 소설 《마포초Mapocho》로 칠레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상 중 하나인 프레미오 무니시팔 데 리터라투라Premio Municipal de Literatura를 수상했다. 피노체트 정권에 가담한 비밀 경찰의 양심 고백을 다룬 2016년작 《미지의 차원La Dimension Desconocida》은 “칠레의 집단적 트라우마에 정면으로 맞서는 질문”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작가에게 스페인어권 여성 작가를 대상으로 한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상Sor Juana Ines de la Cruz Prize을 안겨주었으며, 중남미는 물론 유럽 전역에 번역되었다. 영어로 출간된 2021년에는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총 6권의 소설 외에도 《보이저》를 비롯한 에세이, 다수의 희곡과 텔레비전·영화 대본을 집필했다. 연극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남편과 함께 극단을 운영하며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서사적 실험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