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민 대
망망대해를 상상하면 여러분은 어떤 감정이 떠오르는가? 태평양 한가운데에 표류한다는 것은 어떤 감정일 것 같은가? 외로울까? 무서울까? 뻥 뚫리는 자유를 만끽할까?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마치 거울처럼 그 질문을 마주하는 사람의 현 상태를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비춘다. 내가 당시 느꼈던 감정은 갑갑함이었다. 온전한 자유와 홀가분한 비움의 상태를 찾고자 태평양 위를 표류하기로 자처한 것이었으나 내가 망각했던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항해를 하는 동안에는 배에 갇혀 있다는 사실과 그 배는 나 혼자 승선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이다. 그 비좁은 배에 지금까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항해해 온 사람들이 모여 태평양을 건넌다는 것은 정말이지 배가 산으로 가다 못해 우주로 곤두박질쳐 날아갈 것만 같은 일이었다. 비워 내기는커녕 평생 살면서 안 만나도 될 사람들로부터 그 좁은 배에 갇힌 채로 이런 저런 말들을 들으며 나는 전보다 더 큰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외로움을 품고 왔다. 가도 가도 똑같은 수평선과 어디 시선 하나 걸칠 곳 없는 밋밋한 태평양을 바라볼 때면 나는 도망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돌아오니 내게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물건도, 사람도, 그렇다고 추억하고 싶을 만한 모험도 남지 않았다. 더이상 깊어질 수 없는 외로움일 거라 생각했더니만 더 깊은 굴로 들어가 버린 그때의 나를 보면 ‘비움’이라는 것은 버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그것은 진정한 비움이 아니었다.
내 인생의 항로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로 덮여 버린 것 같았다. 아무리 채워도 아무리 비워도 마음이 헛헛하다면 이제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어디로 향해야 하는 걸까. 나는 분명 채우는 것도 비우는 것도 항상 최선을 다했는데 왜 정답을 찾지 못하는가. 왜 마음 속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는가. 내 인생의 방향은 어디일까? 내가 가야 할 길을 안내해 줄 등대는 무엇을 지표로 삼아야 하는 걸까.
겉으로는 새처럼 자유로운 선택 같아 보이고 멋있는 것 같을지라도,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확 떠나는 도피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주변에서 누군가가 ‘아 다 때려치우고 유럽으로 한 달 살기나 하러 떠날까 봐’라는 말을 하면 나는 갑자기 진지해지며 그 사람의 닻이 되어 떠날 수 없도록 한다. 왜냐하면 해결책은 새로운 그곳에 있지 않다. 사실 지금의 문제는 내가 속해 있는 장소나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의 탓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달 살기를 하러 떠난다니. 태평양을 항해를 한다니… 문제 덩어리를 들고 떠나는 것은 여행을 갈 때 냉장고를 들고 가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다면 나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하고 여러분이 궁금해할 것이다. 내가 유럽 한 달 살기를 가지 말라고 하는 지인들이 내게 묻듯이 말이다. 내가 태평양을 다녀온 뒤 했던 것이 모두에게 해결책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나는 내가 평생 외면해 오던 것을 직면하기로 결심했었다. 그것은 바로 ‘직장인 되기’였다.
그동안 나는 일반적으로 어른들이 스스로의 삶에 채우고자 하는 것들, 예를 들면, 좋은 직장, 높은 연봉, 멋진 집이 아닌 내가 생각하는 내가 원하는 것들로 나의 마음을 채우려고 했었다. 길거리를 쏘다니며 흑백 필름으로 사진을 찍고, 이태원 보광동에 살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다음 날이면 기억도 안 나는 수많은 주제들에 대해서 밤새 토론하고, 태평양을 떠나 지도에도 안 나오는 섬에 가고 말이다. 그런데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어떤 장소를 가도 그 어떤 귀한 보물을 손 안에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 내 마음, 돌연 모든 것을 두고 떠나도 비워지지 않는 내 마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그것은 내가 평생 죽어도 하기 싫다고 생각 했던 9-to-6 직업 갖기였다. 안 해본 것은 이것뿐이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마치 들판과 해변을 뛰놀던 야생마 같던 내가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하루종일 같은 곳에 앉아서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어떤 옷을 입고 가야 하는지도, 목소리는 얼마나 크게 내며 대화를 해야 하는지도, 다나까로 대답을 해야 하는지도 전혀 감이 오지 않을 정도로 나는 직장인이 되는 것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해온 것들을 봤을 때 나는 기획력에 강하고, 사람을 설득하는 것에 능했으며 영어가 모국어인 한국어보다 편하니 글로벌 브랜딩이라는 업무를 맡게 되었고, 생각보다 나는 일 자체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회피하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직장인으로써의 일상을 생각보다 오래 지켰다. 1년 반 정도 첫 회사를 다니고, 사람에 질려 두 번째 회사로 이직했다가 또 사람에 질려 몇 개월 만에 나와 버렸다. 세 번째 직장은 들어가자마자 아니다 싶어 며칠 만에 바로 나왔다. 처음부터 조짐이 이상하면 그것은 갈수록 증폭될 뿐, 나아질 리가 없으니까 나는 참고 버티는 것은 하지 않을 셈이었다. 세 번의 이직을 통해 나는 일을 매우 좋아하지만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매일 봐야 하는 곤욕을 치를 수 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매우 큰 발견이었으며, 앞으로 내 인생의 확실한 방향성을 제시하게 될 가치였다. 그렇게 나는 프리랜서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일하는 표류자, 그것은 완벽한 채움과 비움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었다. 나만의 방식으로 누구의 간섭도 없이 일할 수 있고, 간혹 새로운 돈벌이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은 나에겐 오히려 좋은 자극으로 새로운 일을 벌릴 수 있는 촉진제 역할을 할 정도였다. 이것은 채움과 비움이 적절하게 공존하는 나만의 완벽한 균형이었다.
진정한 비움은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도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올바른 방식으로 채워 가는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고, 너무 많은 물건에 파묻혀 살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게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버려 버린다고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게 맞는, 내가 필요한 존재들을 더 열심히 찾고 채웠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조급한 마음에 잘못 된 나의 선택들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동안 도망을 선택했던 것이다.
만약 여러분 혹은 누군가가 모든 것을 버리고 휙 떠나 버리고 싶어 한다면 그 충동을 이겨 내고 내가 가장 외면하고 싶은 바로 그 지점을 향해 집요하게 돌진하기를 바란다. 해결책은 반드시 그 곳에 있다.
[비움을 시작합니다]는 9월 3일 출간하는
앤솔로지 『음쓰, 웁쓰』의 에피소드 일부를 소개한 에세이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음쓰, 웁쓰』를 통해 확인해 주세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음쓰, 웁쓰
출판사 | 에피케

임수민
스트리트 포토그래퍼로 활동하며 태평양을 건너는 요트를 타고 6개월간 항해를 하며 『무심한 바다가 좋아서』를 출간하는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으며 세일러인 남편과 함께 연고도 없는 통영으로 내려오는 대범한 선택을 했는데, 낭만 가득한 신혼집을 직접 만드는 과정을 SNS로 공유하며 많은 응원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인생을 끝없는 도전으로 채우며 살아가는 맥시멀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