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여름 기억 레시피
여름의 장면을 차곡차곡 모은 시집 네 권.
글 : 임유영 (시인)
2025.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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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새벽, 선물 받은 책을 거의 다 끝내가던 참이었습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여름비』였습니다. 

 

폭풍우 치는 하늘을, 에르네스토는 말한다, 그는 애석해했노라.

여름의 비를. 

유년 시절을. (『여름비』 194쪽)

 

이 구절을 읽는데 바깥에서 세찬 비가 억수로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새벽 1시였습니다. 저는 이 작은 사건을 메모해두었습니다. 나중에 책을 사준 선배에게 찾아가 이 이야길 했더니 그는 “쯧쯧, 새벽 한 시에 책을 읽는 인생이여.” 하고 웃었습니다. 그 장면도 기억해둡니다. 

 

7월 10일 오후 2시, 올여름 첫 매미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그해의 첫 매미 소리를 들으면 그제야 안심이 됩니다. 이젠 피할 수 없는 여름의 복판이라는 실감과 체념, 안도, 어떤 작정이 섞인 마음입니다. 

 

여름의 선명한 장면을 차곡차곡 모아둡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도 챙겨둡니다. 이 여름은 무더위가 그리워질 정도로 추운 계절이 되면 비로소 완성될 예정입니다. 오늘은 여름을 완성해줄 작가들의 책을 함께 열어볼까 합니다. 

 

 

『여름어 사전』

아침달 편집부와 친구들 저 | 아침달

 

창문은 모두 닫혔다. 바닷가 모래사장은 젖었을 것이다. 개미집에는 홍수가 났을 것이다. 바다는 잿빛일 것이다. 무한한 물 위에 무한한 빗방울들이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35년쯤 후에 우리는 전화 통화를 하게 될 것이다. 네가 쓴 이상한 편지들 때문에 네가 시인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너에게 매일 편지를 썼지만, 우체통에 넣은 편지들과는 무척 다르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구나.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정한아, 「폭우」, 『여름어 사전』)

 

도서전에서 공개되자마자 연이은 품절로 화제가 된 책, 아침달의 『여름어 사전』입니다. 손바닥만한 책 사이즈, 소다색에 얼음이 그려진 표지가 가볍고 시원스럽습니다. 157개의 단어는 일반적인 정의에서 벗어나 낭만적으로 사유화되었습니다. 각 단어 아래에는 짧은 단상, 메모, 시적 산문이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157개의 구체적인 기억을 손에 쥐고 있군요. 시인, 독자, 편집자가 쓰고 읽고 만들며 모은 기억의 사전입니다. 

 

여름은 살아 있는 많은 존재를 흔들어 깨운다. 폭염처럼 잔혹하고 견디기 어려운 방식을 채택하기도 하고, 태풍처럼 때론 거침없이 휘몰아치며 그 위엄을 드러낸다. 긴 저녁과 긴 밤을 만들어 우리에게 이야기할 겨를이 되기도 한다. 그 많던 이야기는 모두 어디로 흘러갔을까. 여름에 발생하여 한 시절의 소실점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여름의 낱말들을 모아 사전 형식으로 담았다. (…) 이 책에 담긴 단어의 사전적 정의로부터 걸어 나와 단어 하나가 품고 있던 한 사람의 이야기로 도착하는 그 단편적인 순간을 여름으로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기획의 말」, 『여름어 사전』) 

 

어떤 사전이 집에 한 권쯤 있으면 분명 도움이 됩니다. 자신만의 사전을 직접 만들어보는 것도 참으로 권할 만한 일입니다. 차가운 음료 한 잔 마시면서 뭐라도 한 줄 써보는 일 또한 참으로 해가 되지 않을 일입니다. 

 

『투명도 혼합 공간』

김리윤 저 | 문학과지성사

 

여기엔 집도 없고

작은 창문도 커튼도 없고

긴장도 없이

투명하게 터지고 흩뿌려지는 세계

 

사랑하는 얼굴이 생기자 빛을 등지는 편이 좋았습니다

이 밝음이 눈에 익기를 기다리기엔 저는 너무 늙어버렸습니다

 

천지에 널린 빛이 모든 것을

맹목적으로

분별없이 투명으로

무너뜨리네 (「관광」 부분, 『투명도 혼합 공간』 165-166쪽)

 

책장에서 이 시집의 책등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그렇지, 김리윤은 빛의 시인이지’ 생각하곤 ‘앗, 어디 가서 이런 소린 하지 말아야지’ 다짐하길 반복합니다. ‘빛의 시인’이라니…… ‘빛의 마법사’도 아니고…… 멋대로 그렇게 불러서 죄송하지만 오늘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김리윤 시인, 잘 지내고 계십니까? 한국은 찌는 여름입니다. 어젯밤은 폭우였고요, 오늘은 점심 무렵부터 해가 좀 나서 오후 내내 창밖 구름을 구경했습니다. 요즘처럼 시시로 명도가, 빛의 질감이, 세계의 밀도가, 균등성이 무너지고 달라지는 듯한 날이면 시인과 시인의 시가 생각나곤 합니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실제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이 반사하는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자주 잊혀집니다. 그래서 세계가 너무 견고하게 느껴져 괴로울 때, 무력하게 느껴질 때면 이 한 겹 빛을 부술 용기도 금세 잊습니다. 세상이 전부 내 것인 듯 행복할 때면 그 한 겹 빛을 결코 부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빛과 어둠 속에서 다른 방향으로 걷고 달릴 수 있습니다. 눈꺼풀로 어둠을 만들고 손으로 더듬을 수 있습니다. 시인의 시를 읽으며, 눈을 깜빡깜빡, 더위에 늘어지는 몸을 구부리고 당겨도 볼까요.

 

여름 나무의 빼곡한 잎이 부드러운 천장을 만든다

여름 바람이 만드는 틈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

구멍 난 천장이 두 개의 새끼손가락에 동그랗게 걸리는 것을 본다

 

초록 불이 켜지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얼굴들

먼지 속에 숨을 수도 없이 환한 여름에

드러난 사랑의 부스러기들

 

사람들은 이렇게나 다른 것을 모두 얼굴이라고 불러왔네

또 이렇게나 모두 다른 사랑을 어떻게 불러왔는지

똑바로 익어가는 과일처럼 부드러운 세계를

흘러가는 시간을 본다

 

우리는 기호가 아니다

사랑의 형식들을 오른발로 밟으면

 

와장창 터지는 모두 다른 웃음소리  (「이야기를 깨뜨리기」 부분, 『투명도 혼합 공간』 31-32쪽)

 


『고블린 도깨비 시장』

크리스티나 로세티 저/정은귀 옮김/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그림 | 민음사

 

아침저녁으로

아가씨들은 들었어요, 도깨비들이 외치는 소리를.

우리 과수원 과일 좀 사러 오세요,

어서 와 사요, 어서 와사요.

사과와 모과,

레몬과 오렌지,

흠집 하나 없는 통통한 자두,

멜론과 라즈베리,

붉은 뺨 복슬복슬 복숭아,

까만 머리를 한 오디,

제멋대로 자란 야생 크랜베리,

야생 능금, 나무딸기,

파인애플, 블랙베리,

살구, 딸기; ―

여름 날씨에 

다 함께 잘 익어, ―

지나는 아침에 

날아가는 상큼한 저녁에

어서 와서 사세요, 어서 와서 사세요,

덩굴에서 막 딴 싱싱한 포도,

큼직하게 잘 익은 석류,

대추야자, 톡 쏘는 야생 자두,

귀한 배와 녹색 자두,

작은 자두와 빌베리,

향내도 맡아 보고 맛도 보세요,

까치밥나무 열매와 구스베리,

환한 불꽃 같은 바베리,

입 안 가득 채울 무화과,

남국에서 온 유자,

혀에는 달콤하고 눈에는 좋은 것들

어서 와 사요, 어서 와 사요.” (「고블린 도깨비 시장」 부분, 『고블린 도깨비 시장』 11-13쪽)

 

19세기 영국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시에서 가져온 이 부분은, 사악한 고블린 과일 장수들이 정숙한 리지와 로라 자매를 꾀며 외치는 장면입니다. 이 시는 고블린의 속셈에 넘어간 동생 로라가 머리칼을 주고 그들의 과일을 먹은 뒤 고난을 겪고, 언니 리지가 자신을 희생하여 로라를 구한다는 내용인데요. 이 시는 자매애와 순결 등 빅토리아 시대의 교훈을 표방하면서도 위의 인용에서처럼 풍요롭고도 성적인 표현이 거침없습니다. 읽는 것만으로도 진득하고 거의 질퍽거릴 정도로 육감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요. 전통적이고 교훈적인 소재를 섹슈얼하게 다루는 방법은 로세티가 속했던 ‘라파엘전파’의 특징이기도 하네요. 민음사에서 나온 이 시집에는 라파엘전파 화가들의 그림들이 많이 실려 있어 함께 보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중 이 책을 다룬 부분에서 재밌는 일화를 발견했습니다. 18세기 말에 리처드 폴웰이란 이가 “최근 식물학은 숙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오락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식물의 성적 시스템을 연구하는 것이 어떻게 여성의 겸손함과 일치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했다나요. “그는 여성의 식물 채집이 글자 그대로 여성의 타락의 표시인 성적 정치적 자기주장을 수반한다고 생각했다.”(제15장의 주석 66번) 불과 몇십 년 뒤에 나타난 로세티의 시가 얼마나 에로틱하고 도발적으로 여겨졌을지 알 수 있습니다. 과일을 종류별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겁줄 수 있는 시대라니 우습고도 씁쓸합니다. 

 

언젠가 시에 쓴 적도 있습니다만 여름 과일들은 대체로 껍질을 깎지 않아도 되는 점이 좋습니다. 저 향기롭고 맛있는 과일들을 통째로 베어먹는 즐거움은 빠트릴 수 없는 여름의 장면입니다. 


 

『사랑을 위한 되풀이』

황인찬 저 | 창비

 

똠은 끓인다는 뜻, 얌은 새콤하다는 뜻

꿍은 새우

 

레몬그라스는 똠얌꿍의 재료

 

혼자서 먹었어요,

망원동의 골목에서요

 

여름이었고, 밤이었고, 너였고, 무한하게 펼쳐진, 나랑은 무관한 별들이었고, 새콤한 게 더운 날에는 딱이니까

 

향긋한 파 같은 레몬그라스

쑥갓을 닮은 고수

 

이 시는 겨울에 생각하는 여름밤에 대한 시,

출출한 밤이 오면 생각나는 시

 

똠은 끓이고, 얌은 새콤하고, 입맛 없을 때 아주 좋은 시,

 

놀 거 다 놀고, 먹을 거 다 먹고,

그다음에 사랑하는 시

 

상상만 해봤어요

 

밖에 눈이 와서요

따뜻한 우동 국물이 생각나는 밤이라서요

 

똠은 끓인다는 뜻, 얌은 새콤하다는 뜻

꿍은 새우

 

레몬그라스는 똠얌꿍의 재료

 

뜻이 있다고, 없다고, 누가 자꾸 말하고 (「레몬그라스, 똠얌꿍의 재료」, 『사랑을 위한 되풀이』 38-39쪽)

 

여름이 오면 황인찬 시인 특집을 한번 하자고, 지난 겨울에 마음을 먹었습니다. 막상 시인의 최근 시집을 두어 권 뒤적여보니 생각보다 여름을 배경하는 시가 많지 않아 놀랐습니다.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상투적인 여름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고 생각했던 건, 그 이미지가 너무 선명했기 때문에 일어난 착시였을지도요. 인용한 시를 처음 읽은 건 오래전 그가 낸 작은 낭독용 시집에서였습니다. ‘놀 거 다 놀고, 먹을 거 다 먹고, 그다음에 사랑하는 시’라니. 세상에 재밌고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도 시가 남아있다니, 그게 놀라웠습니다. 파 같지만 파는 아닌 레몬그라스와 쑥갓 같이 생겼지만 쑥갓은 아닌 고수, 따뜻하지만 우동 국물은 아닌 똠얌꿍. 이건가? 아니. 저건가? 아닌데? 좋아, 이건 그럼 이걸 ‘아닌데 놀이’라고 하자. 밤은 밤이지만 여름밤 아닌 겨울밤, 따뜻하고 출출한 긴긴 섣달밤에 혼자 도망가고 혼자서 쫓아가는 마음의 놀이를 하겠습니다. 여름내 마련해둔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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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어 사전

<아침달 편집부>

출판사 | 아침달

투명도 혼합 공간

<김리윤> 저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고블린 도깨비 시장

<크리스티나 로세티> 저/<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그림/<정은귀> 역

출판사 | 민음사

여름비

<마르그리트 뒤라스> 저/<백수린> 역

출판사 | 창비

다락방의 미친여자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저/<박오복> 역

출판사 | 북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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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영 (시인)

2020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믈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