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 작가의 작업실 - 『어쩌다 마트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일하는 나와 글 쓰는 나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있는, 하현 작가의 『어쩌다 마트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작업 이야기.
글 : 이참슬
2025.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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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비를 벌기 위해 마트에서 일을 시작한 하현 작가는 정규직 회사원으로 일하면서도, 회사에서는 '진짜 나'로 살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마트로 돌아갔습니다. 일곱 시간 반 근무, 한 시간 식사, 삼십 분 휴식, 이토록 정직한 노동을 하면서도 '번듯한 직장'은 되지 못했던 곳. 하현 작가가 14년 동안 여덟 개의 마트에서 일하면서 마주한 사람들과 일과 꿈에 관한 고민을 담은 에세이, 『어쩌다 마트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의 작업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어쩌다 마트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작업 후기 

메일함을 뒤져보니 2019년 가을에 첫 원고를 썼더라고요. 올해 7월에 책이 나왔으니 거의 6년 동안 이 작업을 붙잡고 있었던 셈이에요. 중간에 두 번쯤 아예 손에서 놓아 버리기도 했고, 마트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할 때는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을까 의심하기도 했어요. 자주 흔들리고 넘어졌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마무리해서 기뻐요. 이제야 하나의 시절을 통과한 기분이 들어요.

 

“무슨 일을 해서 얼마를 벌든 모든 노동에는 단순히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노동의 의미는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일이 곧 나는 아니지만, 근로소득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일하는 데 쓰잖아요. 일터에서 만나는 동료나 고객들을 가족보다 더 오래, 자주 보기도 하고요. 그러니 일과 나를 칼로 무 자르듯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좋든 싫든 일은 조금쯤 내가 돼요. 단지 생계를 위해 시작한 일이더라도 거기서 늘 돈과 함께 다른 무언가를 얻거나 잃게 되더라고요. 노동이란 건 결국 내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결정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요.

 

작가님 SNS에서 손글씨, 그림이 담긴 수첩 일기를 자주 보았습니다. 책에서도 마트 일을 하시면서 일지를 썼다고 하셨는데, 수기로 작성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대부분의 서비스직이 그렇듯 마트 일 역시 근무 중 핸드폰 사용이 자유롭지 않아요. 일하다 보면 ‘아, 이건 나중에 꼭 글로 써야지!’ 하는 순간을 만나곤 하는데, 간단하게라도 적어두지 않으면 잊어버리게 되더라고요. 그게 아쉬워서 수첩에 일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일지용 수첩은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은 사이즈로 사요. 스프링이 왼쪽에 달린 것보다는 위쪽에 달린 게 편하고, 수성펜은 물에 닿아 번질 위험이 있어서 유성펜으로 써요. 바쁠 때는 그 상황을 떠올릴 수 있는 단어 몇 개만 적어두기도 해요. 글을 쓴다고 생각하지 말고 메모를 남긴다고 생각해야 부담 없이 매일 쓸 수 있어요.

 

에필로그의 “마트가 내게 준 것과 끝끝내 주지 않았던 것들”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마트를 통해 얻은 가장 크고 좋은 것은 고정 수입이에요. 마트에서 받는 월급 덕분에 월세와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일을 하면 돈을 번다는 노동의 기본 전제가 글쓰기에서는 잘 성립되지 않는데 마트에서는 당연했어요. 그 안정감을 기반 삼아 계속 글을 썼어요. 엄마뻘 되는 중년 여성들을 ‘언니’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도 좋았어요. ‘여사님’ 혹은 ‘어머님’과는 쌓을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우정을 경험했거든요. 마트라는 세계에 그토록 오래 머물렀음에도 끝끝내 얻지 못했던 건 직업이에요. 아무리 경력이 쌓여도 이 일을 직업으로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저 스스로도 마트 일을 직업으로 여기지 못했던 것 같아요.

 

 

작업을 하는 동안 가장 의지한 반려 [ ________ ]

마음이 힘들거나 지칠 때면 동물이 나오는 동영상을 보는데, 이번 작업을 하면서는 식물들을 돌보며 힘을 얻었어요. 부드러운 천으로 고무나무 잎을 닦아주고, 매일 조금씩 익어가는 라임오렌지나무 열매를 관찰하다 보면 삶을 성의껏 살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느리지만 분명히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좋았나 봐요. 고무나무는 삽목에 성공해 화분 두 개로 늘었고, 라임오렌지나무는 슬프게도 벌레의 습격을 받아 떠났어요. 다음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면 레몬나무를 데려오고 싶어요.


 

작업실을 소개해 주세요. 

살면서 한 번도 작업실을 가져 본 적이 없어요. 6평 원룸 한구석에 놓인 동그란 테이블에서 밥도 먹고, 글도 쓰고, 책도 읽어요. 수첩과 펜만큼 키보드도 좋아하는데, 이번 작업을 하면서 큰맘 먹고 16만 원짜리 키보드를 샀어요. 무접점 키보드 특유의 보글보글한 느낌이 너무 좋아서 작업 시간이 훨씬 즐거워졌어요.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간식의 힘을 빌려요. 좋아하는 과자나 빵, 과일 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목표한 분량만큼 완성하고 나면 먹는 거예요. 한번은 유명한 제과점에서 복숭아 케이크를 사왔는데 그걸 빨리 먹고 싶어서 30분 만에 초고를 썼어요. 오랜 기다림 끝에 얻는 큰 성과도 좋지만 당장의 작은 보상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마감 후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죄책감이나 의무감 없이 끝내주게 게으른 일주일을 보내고 싶었어요. 물론 작업 기간 중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날이 있었지만, 그럴 때면 중요한 약속을 어긴 것처럼 무거운 마음이 들었거든요. 마지막 원고를 보내고 마트에 가서 먹을 걸 잔뜩 사 온 뒤,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며칠을 뒹굴거렸어요. 완벽하게 행복했습니다.

 

할 일이 있을 땐 그것 빼고 모두 재밌게 느껴집니다. 책을 만드는 동안 특히 재밌게 본 남의 콘텐츠는 무엇인가요?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귀여운 애니메이션에 빠져 있었어요. <꼬마 유령 캐스퍼>와 <꼬마 펭귄 핑구>를 마르고 닳도록 봤어요. 두 꼬마들 덕분에 이번 작업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어요. 고마웠어, 친구들!

 


“직업에 대한 자부심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그것은 내 안에서 시작되어 타인의 말과 눈빛과 시선을 통해 완성된다. 세상에는 혼자 빛나는 직업도, 혼자 초라해지는 직업도 없다.” (「어떤 비밀」 중)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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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마트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하현>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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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참슬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