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는 돈 한 푼, 변변한 옷 한 벌 없이 평생을 살았으니 참으로 가난했다. 그 사실은 고양이의 유품을 정리할 때 드러났다. 소유한 재산이 거의 없었으며 어지간한 것들은 식구들과 나누어 썼던 나의 청렴한 고양이에게는 죽고 나서야 좋은 물건들이 생겼다. 호두나무 유골함이라든지 수염과 털 일부를 간직하기 위해 굳이 새로 사 온 자개 보석함 같은 것들.
가난한 고양이의 유품 정리는 쉬웠다. 내가 해 본 어떤 다른 유품 정리보다도 더. 대부분은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 애가 앉아 있기도 하고 박박 긁기도 하던 점보 사이즈 스크래처는 어차피 주기적으로 버리고 새로 사던 소모품이었다. 올리버만 먹던 사료는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으면 되었다. 병원의 흔적인 각종 알약이나 주사약 같은 것도 의료 폐기물을 버리는 방법에 따라 버릴 수 있었다. 포장을 뜯지 않고 보관해 두었다가 망가졌을 때 하나씩만 꺼내 주던 장난감들은 써 보지도 못한 것들이 많이 남았지만, 그 또한 여기저기 나누어 줄 수 있었다. 올리버가 좋아하던 이불도 버렸다. 어차피 올리버 말고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이불이었다. 세탁하면 할수록 올리버의 냄새가 사라진다는 생각을 계속해야 하는 것보다는 얼른 버리는 것이 나았다.
연휴를 끼고 갑자기 빠르게 진행되는 큰 병에 걸린 고양이를 위해 힘들게, 발을 동동 구르며, 답답해서 눈물까지 흘리면서 힘들게 구한 물건들을 당근마켓에서 무료나눔하기. 올리버는 간병을 위해 대여한 산소방의 설치기사가 오기도 전에 죽어 버렸다. 너무 빨리 죽어 버렸기 때문에 올리버의 물건이되 딱히 올리버의 물건도 아니지만 버리기에는 절실한 감정들이 담긴 물건들이 많이 남았다. 병구완을 위해 마련했지만 쓰지 못한 물건들. 처음에는 그 물건들을 다른 아픈 고양이들에게 정성껏 분배하고 나누어 주는 일이 내 마음을 조금 달래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몇 번 해 보니 기분만 나빠지는 바람에 나중에는 동물병원에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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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이 우리 집에 남기고 간 물건들을 버리면서, 또 과거에 다른 유품들을 정리하면서—아무튼 죽은 친구도, 죽은 고양이도 처음은 아니니까—유품이라는 건 최대한 빠르게 집에서 없애 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시간을 들여 할 일은 아니었다. 죽은 사람이나 동물이 나와 아무 사이가 아닌 거나 다름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거나 값비싼 물건을 잔뜩 가지고 있다면 또 다를지 모르겠지만, 내 고양이나 내 친구들은 아무래도 가난한 편이어서 유품 무더기에서 대단한 물건을 발견하는 일은 없다.
죽은 사람의 집에 가서, 가급적 모든 걸 빠르게 처분한다는 생각으로 물건을 정리하다 보면 이것이 유품 정리보다는 증거 인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죽은 친구들의 집은 범죄 현장이다. 이 집에는 내 친구를 죽인 사람의 행적 대부분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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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에게 폴 이야기를 할 때, 처음에는 줄곧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을 썼다. 사실 그 표현은 하나하나 뜯어볼 것도 없이 아예 틀린 표현이고, 또 거짓말인데, 우선 선택지가 거의 안 주어진 상황에서 뭔가를 ‘선택’한 것을 친구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좀 부당한 면이 있고, 나아가 그 ‘극단’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반대쪽 극단에는 삶 또는 출생 따위가 놓여 있을 것인데, 그렇게 치면 우리 중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애초에 말이 안 된다.
나는 그 사실을 의식한 나머지 애초에 에두른 표현이었던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을 더 모호하고 완곡하게 돌려 말했다. 나의 친구가 ‘어쩔 도리 없이 살기를 그만두기로 했다’거나 ‘목숨을 없앤다는 결론을 내리고 스스로 행했다’ 식이었다. 상대는 상담사였으니 아마 이런 사람을 많이 만나 보았을 것이다. 자살이라는 말이 입 밖에 내선 안 될 금기처럼 느껴지지는 않지만, 아직은 그 말을 목구멍 밖으로 내뱉을 때마다 거꾸로 칼을 삼키는 기분이 드는 사람.
그런데 ‘극단적 선택’만큼 ‘자살’ 역시 내 친구들의 죽음을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스스로의 의지로 목숨을 끊다.’ 내 친구들이 이런 방식으로 죽기 직전과 직후를 떠올려 보면, 의지를 발휘했다는 말 또한 공정치 않게 들린다. 나는 내 친구들이 결단력 있게 무엇을 감행했다기보다는 그 일을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의지, 기운, 힘, 동기, 결단 등등을 남김없이 박탈당한 시점에 살해당했고, 살인범이 자기 자신이라는 점만이 보통의 범죄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친구가 의지와 용기에 힘입어 어떤 어려운 일을 감행하고 나아가 성공하였다, 만약 그런 일이라면 나는 기뻐해야 마땅할 텐데, 아무래도 목숨 끊기를 해낸 친구를 축하해 주기는 어렵다.
반면 그가 누군가에게 (비록 자기 자신일지라도)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면 이 죽음이 끌고 온 분노, 억울함, 누가 쇠숟가락을 내 입안에 넣고 마구 비틀고 휘젓는 기분을 조금은 설명할 수 있다.
살인범은 비겁하게도 내 친구가 많은 것을 박탈당하여 약하고 슬퍼진 시점에 그를 노렸다.
박탈이라는 말을 약탈이라고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나는 범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살인범은 한 명이고, 방 안이건, 그가 그 일을 결행하기로 한 어느 장소건, 그곳에 죽어 누워 있다.
그러나 살인범의 표적이 될 때까지 내 친구의 온갖 것을 앗아간 약탈범은 여럿이고 온갖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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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다시 돌아온다. 내 친구를 살해한 살인범은 이미 죽었으므로(그러나 나는 그의 죽은 몸을 실제로 보지는 못했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시 ‘부정’ 단계로 돌아간다: “진짜로 안 죽고 은둔 중인 거 아님?”) 돌아올 수 없지만, 죽은 친구들의 번호를 이어받은 모르는 사람들은 수시로 돌아와 생일을 알리고, 앱에 가입하고, 내게 친구를 맺을 것인지 물어온다.
내가 현장으로 돌아가 뭔가 되돌리고 싶을 때도 있다. 올리버와 함께 찍은 8분이 넘는 영상 속에서 나는 품속의 그 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그는 수시로 야옹, 하고 힘차게 대답한다. 그런 영상을 보는 일은 아직까지는 내가 잘할 수 없는 일이다.
살인 현장에 내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폴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 있다가, 폴의 번호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폴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들을 할 곳이 필요했던 것이지만, 알고 보니 나는 제대로 된 편지를 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부정하고, 분노하고, 타협하고, 우울해하고, 그다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수용 단계를 건너뛰고 다시 부정하기 시작했다. 수십 개, 수백 개의 메시지를 보내면서 언제까지 이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지 생각했다. 혹시 이 메시지를 유족이 읽고 있을까? 아니면 언젠가 이 번호를 넘겨받은 모르는 사람이 당혹스러운 답장을 보낼까? 폴에게서 문자가 도착한 순간에 나는 펄쩍 뛰며 경악할까?
얼마 뒤 핸드폰을 바꾸면서 나는 아무의 번호도, 아무의 메시지도 새 핸드폰으로 옮기지 않았다. 내 핸드폰을 본 사람들이 (그럴 일은 없지만 그즈음의 나는 폴의 죽음에 대해 너무나 많이 생각한 나머지 편집증 비슷한 것에 시달리고 있었다) 폴과 나의 현장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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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범들은 돌아오는 대신 도시의 큰길을 한낮에 돌아다닌다. 그들은 많고, 다양하고, 아무리 빼앗아도 지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나와 내 친구들에게서 무언가 좀더 빼앗아가려고 다가오는 모습을 본다. 얼마 전에 난 흔하디흔한 약탈범 중 하나와 스쳐 걸었다. 퀴어퍼레이드, 북을 두드리며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외치는 세력들은 더 이상 나한테 아무런 기쁨도 슬픔도 주지 않지만,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에 갔다가 축제 부스로 돌아오는 길, 건널목 앞에 혼자 서 있던 남자가 내가 옆을 지나갈 때 갑자기 외쳤다. 씨발새끼들아. 더러운 년놈들아.
나는 약탈당하지 않으려고 빨리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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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약탈범들에 대해서도 쓰려면 책 한 권이 필요하다.
두 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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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Emotional Support Animal(ESA)이라고 쓰여 있는 고양이용 하네스를 하나 가지고 있다. 안내견처럼 특별한 훈련을 거치지 않더라도, 다양한 심리적 장애가 있는 개인의 정서적 지원을 위해 비행기 여행 등에 동반할 수 있는 동물이 정서지원동물이다. 올리버는 대체로 느긋했고, 새로운 환경에 부정적인 스트레스를 크게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정서지원동물로서 알맞아 보였다.
내가 어떠한 이유로 혼자 비행기 여행을 하는 게 도저히 생각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기간에, 훗날 언젠가 우리가 모험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믿는 게 좋았다.
해외직구로 산 하네스는 조금 작았다. 고양이를 위해 제작된 웬만한 물건들은 올리버에게는 부족했다. 그 애한테는 사람 한 명만큼의 공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나는 그 애가 사람 몫의 좌석 한 칸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이코노미 클래스에 타는 모습을 상상했다. 높은 곳을 좋아하는 그 애가 창밖으로 멀어지는 세계를 구경하는 일이 벌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올리버의 유품은 실은 그 애가 제대로 사용해 본 적 없는 물건이다. 영혼이 깃들기는커녕, 딱히 지문도 남지 않았을 물건이다(참고로 고양이에게 지문 노릇을 하는 건 코 앞부분의 분홍색 부분인 비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내 고양이의 삶을 표현한다. 그 고양이가 선명하고, 뚜렷하고, 아주 크게 살았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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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섬별
읽고 쓰고 옮긴다. 매일 일기를 쓰고 자주 시를 쓴다. 용감하게 살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다. 물루와 올리버라는 치즈 고양이의 식구다. 옮긴 책으로 <페이지보이>, <자미> 등이 있다.
준건
2025.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