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의 혁명과 SF] 붉은 별
20세기 초반 활발히 집필된 동유럽 유토피아-디스토피아 SF 소설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시급하고 절박한 문제들과 연결되는 지점을 살펴봅니다.
글 : 정보라
2025.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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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혁명적인 『붉은 별』(Красная звезда)은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Александр Богданов, 1873-1928)의 1908년도 작품인데, 지구의 혁명가 레오니드가 화성인에게 초대받아 화성의 혁명 역사에 대해 알게 되는 이야기이다. 저자 보그다노프는 어떤 사회든 일정한 단계에 따라 발전을 이룩하게 되며 그 최고의 단계는 공산주의 유토피아라 상정하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화성인들은 지구인들보다 훨씬 더 높은 발전 단계를 완성했기 때문에 이미 공산주의를 실현하여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노동이 정당하게 보상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보그다노프의 이러한 관점은 혼자만의 상상이 아니다.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로 대표되는 유럽 사회과학자들이 이러한 단계적 발전론을 주장했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이러한 단계적 사회발전론을 이어받아 『공산당 선언』에서 사회발전의 필연적인 최고 단계는 공산혁명과 노동자 유토피아라 주장했다. 『붉은 별』은 보그다노프가 살았던 시대의 주도적인 사회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적 상상을 덧붙인 것이다.

 

여기서 ‘단계’에 초점을 두는 이론의 문제는 유럽 백인들의 사회가 최고로 발전한 가장 우월한 사회라 가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론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유색인종 사회는 열등하여 마땅히 이루어야 할 발전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식민주의, 제국주의적 관점의 근거가 된다. 보그다노프는 이런 식민주의적 관점을 정반대 방향에서 활용하여 침략자가 아니라 침략당하는 입장에서 바라본다. 『붉은 별』에서 화성인들이 지구에 찾아온 이유는 사회 발전을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화성에 에너지 자원이 부족해지자 지구를 식민지화하여 에너지 자원을 가져가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나 화성인들 사이에서도 지구 식민지화에 반대하는 파와 찬성하는 파가 갈라진다. 주인공 레오니드는 이런 사실을 지구에 알리기 위해 화성 우주선에서 탈출을 감행한다. 

 

이어지는 작품인 『엔지니어 멘니』(Инженер Мэнни, 1912)에서 보그다노프는 앞서 지구 식민지화에 반대했던 화성인 ‘멘니’를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그리하여 지구인 통역을 거친 멘니의 진술을 통해 화성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이룩했는지 설명한다. 이 작품에서 화성의 급속한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이룬 결정적 계기는 대규모 운하 공사이다. 그러나 유토피아 건설 과정은 매끄럽지만은 않다. 대규모 공사가 언제나 그렇듯 진행 과정에서 여러 가지 갈등이 발생하며 멘니는 그 책임자로서 수난을 겪는다. 

 

『붉은 별』과 『엔지니어 멘니』는 공산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집필된 작품이지만 이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나타내고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1934년 소련의 공식 문화예술 사조로 공표되었는데, 문화예술은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도구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문학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혁명적인 사회 분위기와 대규모 ‘과업’을 완수하기 위한 ‘투쟁’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에서 ‘혁명적 과업’은 건설공사다. 실제로 혁명 직후에 레닌이 소련 전체에 전기 설비를 한다는 야심 찬 기획하에 발전소 등 기간시설 공사를 많이 진행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21세기 독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거대한 환경 파괴가 결국 화성을 자원이 부족하고 지속 불가능한 행성으로 만들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보그다노프 본인이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작품 안에는 여러 문제의식이 엿보인다. 사회 발전 단계론의 문제, 식민주의와 약탈, 대규모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와 지속 불가능성의 문제까지, 『붉은 별』과 『엔지니어 멘니』는 발표된 지 1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아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한국에서는 『붉은 별』과 『엔지니어 멘니』가 한 권으로 출간되었으나 지금은 절판된 듯하여 아쉽다. 

 

저자 보그다노프의 본명은 말리노프스키(Малиновский)이다. 그는 혁명가이고 공산주의 활동가이며 소설가였고, 의사이자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수혈을 통해 젊음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스스로 자기 몸에 실험하다가 수혈 부작용으로 사망했다. 

 

불로장생은 진시황 때부터 인류의 오랜 꿈이었다고 하지만, 보그다노프의 죽음을 그저 잘못된 회춘의 열망으로 치부하기 전에 그가 사망한 연도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1928년은 공산혁명 10주년이었다. 혁명 이후 러시아-소비에트 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유토피아였다. 새롭게 건설된 이상 사회에 걸맞은 인간, 구시대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소비에트적 인간’을 어떻게 해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소비에트 사회 전체가 열띠게 집중하고 있었다.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낸다면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과학과 의학 분야에서 인간성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물질이란 무엇인가? 보그다노프는 그것이 ‘피’라고 믿었다. 자가 생체실험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에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물질은 호르몬이라는 이론이 대두된다. 역시 의사이자 작가였던 미하일 불가코프(Михаил Булгаков, 1891-1940)의 중편소설 『개의 심장』(Собачье сердце, 1925)이 바로 이런 이론과 사회적 맥락을 바탕으로 한다. 물론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위험하거나 터무니없어 보이는 가설도 많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런 주장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20세기 초는 동유럽에서 혁명의 시대였다. 이 시기 러시아 소비에트 SF는 거의 대부분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 소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러시아와 동유럽 유토피아/디스토피아 SF는 막연한 상상 속의 이상사회나 독재국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실제로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 경험에서 온 자신감, 혁명이라는 이름의 피바다를 목격한 충격과 트라우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다양한 희망과 고뇌가 이 시기 작품들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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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개정판)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저/<이진우> 역

출판사 | 책세상

개의 심장

<미하일 불가꼬프>

출판사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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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SF와 환상 문학을 쓰고 번역도 한다.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선정됐다. 지은 책으로 『문이 열렸다』, 『죽은 자의 꿈』 등의 장편 소설과 『저주토끼』 『왕의 창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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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독일의 철학자, 경제학자, 사회이론가. 정치평론가, 노동운동의 주역이자, 자본주의와 종교 비판가. 독일 라인란트의 트리어Trier에서 변호사인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의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835년부터 본과 베를린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지만, 정치적인 성향으로 인해 교수직을 받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생계를 위해 1842년에 창간된 《라인 신문Rheinische Zeitung》의 편집장을 맡게 되었고, 이로써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라인 신문》은 곧 프로이센 정부의 검열정책에 의해 폐간당하고, 마르크스는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하여 파리로 이주하지만, 프랑스의 기조정권에 의해 추방당하고 벨기에로 향한다. 그는 1848년 벨기에에서 추방당한 후 독일의 라인란트로 돌아와 《신 라인 신문》을 창간하고 정치적 활동을 이어가지만, 1년 후 반란 선동죄로 법정에 서게 된다. 무죄선고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이미 프로이센의 시민권을 상실한 마르크스는 무국적자로서 라인란트에서 추방당하고 결국 프랑스를 거쳐 마지막 망명지인 영국에서 평생을 보내게 된다. 1861년에 《자본론 1》을 발표했고, 마르크스 사후에 엥겔스에 의해 그의 《자본론》이 완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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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불가코프

1891년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에서 태어났다. 키이우(키예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불가코프는 의사였던 외삼촌들과 마찬가지로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키이우(키예프) 대학교 의과 대학에 입학한다. 다음 해인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불가코프는 적십자를 통하여 우크라이나 남서쪽에 있는 카메네츠-포돌스키, 체르놉치 등 최전방 지역에서 의료 활동을 한다. 의대 졸업을 앞두고 있던 불가코프는 1916년 여름에 갑작스레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스몰렌스크 현의 니콜스코예 마을로 파견된다. 1916년 러시아는 의대 졸업생들을 징병하여 각 지방으로 파견 보냈는데, 불가코프도 그 징병 대상에 속했던 것이다. 불가코프는 1년 후인 1917년 9월에 뱌지마로 파견되어 계속 의료 활동을 이어 간다. 한편 1917년 겨울, 러시아 혁명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러시아가 볼셰비키의 손에 떨어지면서 내전의 기운이 감돌았다. 이미 뱌지마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불가코프는 예기치 못한 징병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병역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수차례 요청한 끝에 1918년 2월에 건강상의 이유로 퇴역한 불가코프는 키이우(키예프)로 돌아와 성병 전문의로 활동한다. 하지만 불가코프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우크라이나 내전에 휘말린다. 수차례 키이우(키예프)의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불가코프도 징병된다. 이후 키이우(키예프)를 점령한 데니킨의 백군 진영에서 군위관으로 활동하게 된 불가코프는 1919년, 퇴각하는 백군을 따라 러시아 남부의 블라디캅카스로 이동한다. 얼마 안 가 백군은 볼셰비키에게 패배하여 해외로 도주하지만 불가코프는 티푸스에 걸려 망명을 포기하고 러시아에 남기로 한다. 이후 그는 의사직을 버리고 펜을 잡기로 결정한다. 1921년에 모스크바로 이사 오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된 불가코프는 궁핍한 생활을 견디며 『기적』, 『노동자』 등의 신문 또는 잡지에 사설, 단편 등을 왕성하게 투고했다. 1924년에 소설 『백위군』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1925년에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이 작품을 연극으로 각색해 달라는 요청도 받는다. 같은 해에 중편소설 『디야볼리아다』, 『비운의 알』, 단편소설 「중국인 이야기」 등이 포함된 소설집도 출판된다. 하지만 중편소설 『개의 심장』의 원고가 1926년, 압수당한 것을 시작으로 불가코프의 작품 출판에 제동이 걸린다. 1929년 불가코프의 모든 작품들이 출판 및 상연 금지되고 망명 신청마저도 거부당한다. 다음 해인 1930년에는 어렵게 창작에 매진하던 불가코프에게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던 희곡 『위선자들의 비밀 모임』 상연까지 금지된다. 스스로 작품 원고를 불태워 버릴 정도로 좌절한 불가코프는 결국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망명을 요청하였고, 얼마 후 스탈린이 직접 불가코프에게 전화를 걸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일해 볼 것을 권한다. 극장에서 조연출로 일하게 된 불가코프는 고골의 『죽은 혼』, 『검찰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 고전 작품들을 각색하며 왕성하게 활동한다. 1939년에는 스탈린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 『바툼』을 집필하지만 역시 스탈린이 상연을 금지시켜 버리고,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진 불가코프는 시력을 상실하는 지경에 이른다. 병상에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 간 불가코프는 세 번째 아내인 옐레나 세르게예브나 실롭스카야의 도움을 받아 구술로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교정한다. 하지만 불가코프는 1940년 3월 10일 사망하고,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불가코프 사후 26년이 지난 1966년에야 출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