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로봇의 반란
최초의 로봇 이야기, 희곡 『R. U. R.』로 읽는 로봇과 인간의 관계.
글 : 심완선(SF 평론가)
202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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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U. R.』

카렐 차페크 저/유선비 역 | 이음스코프 

 

가끔 ‘기계 주인님’이나 ‘로봇의 반란’ 농담을 꺼내게 된다. 자, 생각해 보자. 기계는 반드시 폭동을 일으켜 인간을 지배할 것이다. 수많은 SF가 이미 그렇게 예언했다. 컴퓨터를 비롯해 ‘생각하는 기계’들은 인간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그들은 언제나 맡은 바 책임을 다해왔다. 비록 인간은 아닐지언정 인간보다 나은 지배자가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미 자체적으로 기계에 생활을 의탁하고 있다. 이미 대세는 넘어갔다. 빨리 인정하고 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인공지능이든 생활가전이든 함부로 대하지 마라. 곧 관계가 역전될 수가 있으니까.

 

약 백 년 전이었다면 이게 왜 농담인지 설명하기가 난해했을 것이다. 지난 세기의 사람들은 지금만큼 기계에 생활을 의탁하지 않았다. 기계가 개개인의 일상생활을 얼마나 편리하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지 지금만큼 체감하지 못했다. 현대인으로서 나는 육체노동을 대부분 기계에 떠넘기고 살고 있다. 일상에서의 자잘한 판단도 떠넘겼다.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검색해서 그 지시대로 움직이고,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재생해 주는 노래를 들으며, 오늘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매일 물어본다. 만약 기술이 5년 전으로만 퇴보해도 나는 불편해서 못 살겠다고 팔짝 뛸 자신이 있다. 뭐? 얼굴 인식으로 자동 로그인하는 기능이 없다고? 검색 결과를 정리해서 알려주는 인공지능이 없어? 허, 참. 이런 건 기계가 알아서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약하게 길들여진 현대인으로서 나는 인간이 기계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충격받지 않는다. 로봇이 인간의 위치에 올라서는, 혹은 인간과는 다른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는 이야기도 그저 여상하게 읽는다. 이것이 2020년대 독자의 관점이다. ‘로봇’이 세상에 등장한 지 벌써 백 년이 지났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R. U. R.』은 의외로 현대적이다. 백 년 전 작품이다 보니 아무래도 낡았고, 최초의 ‘로봇’ 작품인 만큼 아이디어는 단순하게 보이는데도, 작중에서 로봇과 인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립은 여전히 정답이 없는 문제로 보인다.

 

로봇이라는 말은 고된 노동을 뜻하는 체코어 ‘로보타(robota)’에서 나왔다.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는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희곡 『R. U. R.』을 썼다. (이 말을 만든 것은 그와 자주 협업했던 형인 요제프 차페크라고 한다.) R. U. R.은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의 줄임말로, 작중 ‘로숨’은 해양생태계를 연구하다가 마치 생물처럼 움직이는 콜로이드 젤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를 화학적으로 연구하여 인간 모양의 인공적인 무생물을 배양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다. 원조 ‘로봇’은 기계장치가 아니라 유기체로 제조되었다.) 로숨은 무신론자로서 신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생명이 탄생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반면 그의 아들(아버지와 구별하여 ‘젊은 로숨’이라 불리는)은 예술가나 연구자가 아니라 공학자였고, 실용성과 효율화에 관심을 두었다. 젊은 로숨은 아버지 늙은 로숨의 제조 공정을 뜯어고쳐 로봇을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을 만든다. 그가 만든 회사 R.U.R.은 전 세계에 로봇을 납품하는 수준으로 성장한다. 세계 곳곳으로 팔려간 로봇은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고된 노동을 수행한다. 노동력이 저렴해지니 생필품의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고, 인간은 힘들고 위험한 일에서 자유로워진다. 전쟁마저 로봇이 대신 도맡는다.

 

젊은 로숨이 설계한 로봇은 상품, 도구, 소모품이다. 그는 아버지의 발명품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했다. 로봇에게는 감정이나 소망, 영혼이 없다. 겉보기에는 인간이라도 로봇은 철저히 물건으로 취급된다. 그들은 채찍질을 당하듯 고통을 주입받고, 손상되면 버려진다. 등장인물 중에서 로봇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헬레나’는 그런 취급에 반발하지만, 회사의 임원들은 헬레나의 말을 철없는 태도로 치부한다. 그들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갈 박사: 우린 로봇들에게 고통을 주어야만 해요. 고통은 로봇의 손상을 막을 수 있는 내장된 보호수단입니다.

헬레나: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되면, 로봇들이 좀 더 행복해질까요?

갈 박사: 오히려 불행해지겠죠.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좀 더 완벽해질 겁니다.

헬레나: 왜 그들에게 영혼을 만들어주시지 않는 거죠?

갈 박사: 그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파브리: 관심도 없고요.

부스만: 게다가 생산 비용이 높아진답니다.

 

실제로 헬레나는 다소 안이하고 혼란스럽게 행동한다. 헬레나는 원래 로봇을 위한 인권연맹 대표로 R.U.R. 공장을 방문했지만, 회사를 감시하거나 공격하지는 않고 오히려 대표이사인 ‘도민’과 결혼한다. 그녀는 로봇을 인간적으로 연민하고 한편으로는 로봇이 인간을 증오할까봐 두려워한다. 로봇이 감정을 느낄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나아가 헬레나는 로봇이 조금이라도 인간을 이해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로봇을 제조하는 화학 레시피를 수정해달라고 부탁한다. 덕분에 로봇은 어떤 시점부터 정말로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로봇끼리 연합하여 자신들을 착취하던 인간을 모조리 죽이고 로봇이 새로운 지배자라고 선언한 것이다.

 

반면 도민은 철저히 인간중심적이다. 로봇은 그에게 공감이나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오로지 인간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 로봇이 고통받으면 인간은 굶주림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는 사람들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지 않아도” 괜찮은 삶을 살기를, 허덕허덕하는 처지에서 해방되어 “스스로 주인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와 유사하게, 회사의 법률고문인 ‘부스만’은 경제적 가치에 중점을 둔다. 로봇이 저렴하게 소모될수록 사람들은 적은 돈으로 빵을 살 수 있다. 그들은 편협하기는 해도 악당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카렐 차페크는 옳고 그름을 명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진실이 대립하는 상황을 만든다. “인간적인 하나의 진실이 그에 못지않게 인간적인 다른 진실과 대립하는 것, 이상이 다른 이상과, 긍정적인 가치가 역시나 긍정적인 다른 가치와 대립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대 문명에서 가장 극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말살하던 로봇들은 유일하게 ‘알퀴스트’를 살려둔다. 건축사인 알퀴스트는 직접 손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로봇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그는 직접 노동해야만 얻는 가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로봇들은 알퀴스트에게 가르침을 바라며, 로봇 생산을 위한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그도 한계가 뚜렷하다. 알퀴스트는 건축사에 불과하므로 복잡한 화학식을 알 수가 없다. 자기 일만 처리할 수 있을 뿐 창조자가 아닌 그는 로봇을 위한 해답을 내주진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역할은 헬레나가 맡는다. 작중에서 헬레나는 맡은 일이 없다. R.U.R. 회사의 임원들이 각자 직책을 맡는 점과는 대조적이다. 로봇은 노동하고 로숨은 지휘하는(로숨의 이름은 체코어로 지성을 의미하는 ‘로줌(rozum)’과 발음이 유사하다) 체계에서 그녀는 열외다. 헬레나를 본따 만들어진 로봇 ‘헬레나’도 마찬가지로 딱히 다른 로봇처럼 노역하지 않는다. 애초에 노동을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헬레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태어난 로봇 헬레나는 그저 꽃을 구경하는 등 비생산적인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인지 모든 로봇 중에서 가장 비생산적인 활동을 해낸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알퀴스트는 헬레나의 사랑에서 로봇이 생명체를 낳을 가능성을 본다. 그는 헬레나와 그 연인인 프리무스를 세상으로 내보내면서 독백한다.

 

우리의 마을과 공장, 우리의 예술, 우리의 사상은 모두 다 생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겠지. 생명은 불멸할 것이오! 멸망한 건 우리 사람들일 뿐. 우리의 집과 기계는 못 쓰게 되고, 우리가 이루어놓았던 체계는 붕괴되며, 위대했던 위인들의 이름은 마른 나뭇잎처럼 떨어지겠지. 그러나 오직 너만은, 사랑이여, 너만은 이 폐허 속에서 꽃을 피워 생명의 작은 씨앗을 바람에 맡기리라.”

 

흥미롭게도, 젊은 로숨이 깨달은 바에 의하면 쓸모없음이야말로 인간성일지 모른다. 그는 인간을 창조하려 했던 아버지의 연구에서 인간성을 삭제하고 로봇을 설계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이란 건, 행복을 느끼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산책을 하고 싶어 하는, 대개는 실제로 별로 쓸모없는 것들을 많이 필요로 하는 그런 존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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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R.

<카렐 차페크> 저/<유선비> 역

출판사 |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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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완선(SF 평론가)

책과 글쓰기와 장르문학에 관한 글을 쓴다. SF의 재미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 및 사회적 평등과 문학의 연결 고리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SF와 함께라면 어디든: 키워드로 여행하는 SF 세계』 『우리는 SF를 좋아해: 오늘을 쓰는 한국의 SF 작가 인터뷰집』 『SF는 정말 끝내주는데』가 있고, 『취미가』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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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차페크

체코의 극작가·소설가. 체코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 G.K.체스터턴보다 자유롭고, 조지 오웰보다 낙천적인, 체코의 몽테뉴(「데일리 텔레그래프」). 카프카, 쿤데라와 함께 체코 문학의 길을 낸 작가로 체코 SF의 대부로 불린다. 1890년 1월 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헤미아 북동부 지역에서 태어났다. 명문 아카데미 김나지움을 전 과목 A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프라하 카렐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베를린과 파리의 대학들을 오가며 수학했고, 미국 실용주의를 수용, 1915년 25세의 나이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체코의 대표적인 일간지 『리도베 노비니』에서 편집자 겸 기고가로서 평생에 걸쳐 활동하였으며 일생에 걸쳐 다양한 주제로 철학적ㆍ풍자적인 작품들을 썼다. 일찍이 현대사회의 병폐에 눈을 돌렸던 그는, 희곡 『R.U.R』(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1920)과 『곤충극장』(1921)을 통해 사회적 병폐를 통렬하게 풍자하였다. 『R.U.R』은 기술의 발달이 거꾸로 인간을 멸망시킬지도 모른다는 점을 경고한 작품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로봇’이라는 말은 이 작품에서 유래했다. 『곤충극장』은 화가이며 작가인 그의 형 요제프 차페크(1887~1945)와의 공동창작으로, 현대생활의 획일주의·물질주의를 풍자한 걸작이다. 같은 시기의 장편소설 『압솔루트노 공장』(1922)과 『크라카티트』(1924)는 후일의 『도롱뇽과의 전쟁』(1936)과 더불어 SF(과학소설)적 수법으로 현대를 비판하여, 사회적 SF의 선구적 작품이 되었다. 단편 소설집인 『오른쪽-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1929)은 추리소설 형식으로 쓰인 작품이다. 철학소설 3부작인 『호르두발』(1933), 『별똥별』(1934), 『평범한 인생』(1934) 같은 철학적·신비적 작품과 『위경 이야기들』 같은 상상 저널리즘을 구현한 소설도 썼다. 1930년대 후기 작품에는 정체성, 자아, 인간 동기 등에 대한 탐구가 나타나 파시즘과 나치즘을 경고하는 『첫 번째 구조대』(1937), 『하얀 역병』(1937), 『어머니』(1938) 등을 썼다. 작품 활동을 하는 동시에 「나로드니 리스티」, 「리도베 노비니」와 같은 체코의 유력 일간지의 편집자로 일했고, 체코 민주주의와 반(反)파시즘의 선봉장이자 문화적 선각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일곱 차례나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나치스 독일에 저항하는 정치 성향 때문에 끝내 수상자가 되지는 못했다. 독일이 프라하를 점령하기 몇 달 전인 1938년 12월 25일 인플루엔자 합병증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