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파파』의 최재영 작가가 6년 만에 두 번째 소설 『맨투맨』으로 돌아왔다. 한 편의 시나리오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게 된 두 인물, 영호와 혜진을 통해 시대의 요구와 창작자의 욕망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그린다.
3년 전, 영호는 여자 고등학생 ‘초롱이’의 이야기를 담은 시나리오 ‘맨투맨’을 완성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개발 프로젝트에도 선정되며 ‘가치’를 인정받는 듯 했지만 제작은 요원했고, 영호는 손을 뗐다. 그를 찾아온 혜진은 ‘맨투맨’을 잘 각색해서, 팔아서, 돈을 “존나 존나게 벌 거”라고 말한다. 영호는 혜진을 돕기로 한다. 한때 그들에게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또렷하게 존재했다. 이야기는 선택 받아야 했다. 투자자에게, 관객에게, 그리고 영화제에서 선택 받기 위해서는 “시대의 파도”를 타야 했다. 영호와 혜진은 압박감 속에서 흔들리며 선택해야 했다. 그들은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결말에 이르렀을까. 다시 쓰는 ‘맨투맨’은 어떻게 될까.
『맨투맨』의 한 독자는 이 소설이 “창작자라면, 글을 쓴다면, 끊임없이 고민하게 될 포인트를 집요하게 파헤친다”고 했다. 작가는 물론이고, 그들을 곁에서 지켜보는 독자들 역시 끊임없이 고민하는 포인트일 것이다.
소설, 우물로 내려가는 일
『빅파파』 이후 6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한데요. 영화 연출을 공부하셨다고요.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에서 1년 과정으로 연출을 공부하고 단편을 만들었어요. 졸업한 후에는 시나리오도 쓰고 영화사랑 일하기도 했고, 지난 3년은 장편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시나리오 쓰고 연출도 하고요. 촬영은 재작년에 끝났고 작년에 후반 작업을 했어요. 올해는 뉴욕 아시안 영화제에 초청 받아서 다녀왔고, 내년 상반기에 개봉 예정입니다.
작가님에게 지난 6년은 어떤 시기로 기억되나요?
비유하면, 그런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행성이 탄생을 했는데 아직 대기권이 없는 거죠. 운석이 막 떨어져서 행성에 크레이터가 생기는 시기인 거예요. 첫 소설(『빅파파』)을 썼을 때가 대학교를 막 졸업했을 무렵이었는데, 그 소설은 ‘몰라, 그냥 쓰고 싶어. 쓸 거야’라는 생각으로 썼어요. 굉장히 자족적인 소설인 거죠. 이후에 한국영화아카데미라는 영화 학교에 가면서 갑자기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났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영화 일의 본질은 부딪힘인데요. 계속 다른 사람이랑 부딪히면서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조용히 앉아서 책보는 국문과 전공이었기 때문에, (웃음) 영화 일을 하면서 힘들어하기도 하고 부딪힘에 상처를 받기도 했어요. 그때는 다른 사람과 부딪히는 걸 부정하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했는데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하니까 받아들여지는 면들이 있더라고요. 『맨투맨』은 제 안의 그런 변화의 지점에서 시작된 것 같아요.
말씀처럼 영화는 ‘전혀 다른 세계’였을 것 같아요. 왜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되셨어요?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고 일단 걷는 느낌. 그리고 영화 일을 한 번 꼭 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미지의 영역이지만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고.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영화를 한다는 것이 되게 멋있어 보였어요. 실제로 멋있기도 하고요. 제가 등단을 하게 된 것도 ‘뭔가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뭐가 있을까?’ 하다가 소설을 쓰게 된 거거든요. 영화 학교도 그렇게 가게 된 거예요. 되게 불안정한 과정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등단한 뒤에도 ‘앞으로 뭘 해야지!’라는 생각보다 ‘난 뭐지?’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고 영화 학교에서도 그랬어요. ‘난 뭐지?’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에 대한 메모의 첫 문장을 적었던 어느 밤”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밤, 메모를 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그 전에 ‘소설을 쓰고 싶다,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 어떤 소설을 쓸까?’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처음으로 ‘그런데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지?’라는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 전에는 관습적으로 질문의 방향이 바깥을 향해 있었던 거죠. 타인들 혹은 세상, 사회로 향했었는데, 그러지 않고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 그 메모가 시작됐던 것 같습니다. 찾아보니까 작년 9월 20일에 처음으로 썼더라고요.
메모의 첫 문장은 무엇이었나요?
‘초롱이를 만들 자격은?’이었어요. 그 아래 상념들을 적었는데 ‘자격이 꼭 있어야 하나?’ 이런 것도 적고 ‘나는 뭐지?’ 하고 제 이야기도 쓰고.
영화를 배우고 만들면서 계속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셨어요. 왜 그랬을까요?
저에게 있어서는 소설과 영화가 다른데요. 영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야 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연출가라면,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고, 돌아오는 답변으로 영화가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잘 질문하는 게 중요하고, 더불어서 부딪힐 용기가 있어야겠죠. 비유하면 어두운 밤에 수풀을 헤집고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 같은 거예요. 소설은 그와 반대로 누군가를 마주하는 용기가 아니라 나를 보는 용기가 필요한 장르라고 생각을 해요.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으로 들어가는. 영화가 앞이 보이지 않는 숲 속을 헤쳐 나가는 느낌이라면, 소설은 깊은 우물에 돌을 하나 던져보다가 그 속으로 로프를 타고 한 발자국 내려가는 느낌이에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영화 작업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가끔 공허해질 때가 있더라고요. 내가 보지 못한 뭔가가 있는데 달려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제 안에 쌓인 것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영화가 직업은 될 수 있어도 제 삶의 태도는 소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방금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일까요?
비슷한 것 같아요. 그리고 소설은 진짜 무서운 것 같아요. 예전에는 소설은 기술적인 글쓰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점점 쓸수록 느껴지는 게, 소설만큼 작가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장르가 없는 것 같아요. 수필이나 에세이보다 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장르 같아요. 이야기를 만드는 ‘나’가 어떤 사람인지 소설에 들어가는 것 같고, 그게 소설의 DNA 같아요. 그래서 소설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 삶의 태도라고 말한 거고요. 영화랑 확실히 다른 느낌이에요.
창작자의 딜레마
『맨투맨』은 사회가 창작자에게 요구하는 것과 창작자의 욕망이 충돌하는 지점들을 보여줍니다. 그럴 때 창작자들이 느끼는 압박감과 부담감을 작가님도 느껴보셨나요? 등단 이후에, 혹은 영화 학교에서?
두 군데서 다 느꼈던 것 같아요. 제가 있는 사회적인 환경은 영화 하는 건데, 영화 환경이 이런 사람들 천지거든요. 욕망하고, 욕망에 좌절되고 삐뚤어지고, 나도 같이 삐뚤어지고. (웃음) 제 경우에는 그런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내적으로는 소설에 대해서 요구 받고 욕망하고, 그런 것들에 대한 괴리가 분명히 있었죠.
‘영호’는 다른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맨투맨’의 시나리오 초고를 수정합니다. 그런데 개운해하지 않고 만족하지도 않아요. 지금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 같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방향을 잃은 것 같기도 합니다. 작가님도 비슷한 경험을 해보셨나요?
그렇죠. 그런데 이게 ‘작품으로 보는지, 콘텐츠로 보는지’ 시선의 차이인 것 같아요. 뭐가 더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건 아니고요. 작품은 그 자체로 목적인 거고, 어쨌든 콘텐츠는 도구이자 수단으로 보는 거죠. 콘텐츠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 도구와 수단으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혹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여러 가지 있겠죠. 제가 생각할 때 요즘 시대에 창작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업무는 대부분이 콘텐츠 쪽에 가까운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작품의 입장으로 보면 여기에서 ‘고뇌’라고 써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데, 콘텐츠 입장에서 보면 ‘고뇌랑 고민이랑 결국 똑같은 말 아니야?’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불행은 그 차이에서 오는 것 같아요.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만족하시는 분들도 있고, 그럼 서로 좋은 거죠. 그게 불일치 하는 순간에 불행이 시작되는 것 아닐까 싶어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을 아주 많은 분들이 읽으셨으면 좋겠”다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이야기가 읽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읽히지 않는 작품은 의미가 없는 것인지’ 오래 생각하신 끝에 하신 말씀 같은데요. 어떤가요?
네, 생각도 많이 해봤고요. 요즘 개인적으로 하는 생각은, 읽히도록 만드는 것도 작가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거예요. 음식으로 따지면, 내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고 내 음식이 최고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의 입에 넣어주는 것까지 노력을 해야 되는 거죠. 그런 노력을 하는 게 너무 이전투구의 현장이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수 있어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든 아니든 나는 상관없어’라고 하는 작가님도 계실 텐데요. 저는 예전에는 그런 모습이 멋있어 보였는데 요즘은 안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작품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위한 것 같아요. 내 작품이 진짜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작품을 위해서 작가는 어떻게든 이게 읽히게끔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읽히지 않는다면 허무해지는 거죠. 작품이 비로소 누군가에게 읽히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의 입 안에 들어갔을 때, 그 의미와 가치와 새로운 맛이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따라서 사회가 창작자에게 요구하는 것들도 달라질 텐데요. 근래에는 어떤 요구들이 있었던 것 같으세요? 지난 6년을 돌아본다면요?
영화 쪽에서는 2010년대 후반에서 2020년대로 가면서 장르적인 것보다는 사회적인 소수자의 깊은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젊은 창작자들한테 요구했죠. 지금은 또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당시의 흐름은 그랬어요. 그걸 (사회적 소수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저도 부정하고 싶지 않고 나쁘게 보지도 않는데, 모든 창작자들이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흐름이라는 게 있는 거고, 그런 흐름과 맞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동료들을 많이 본 것 같아요. ‘저 사람은 다른 이야기를 하면 더 잘 할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예를 들면 한식을 잘하는 사람인데 요즘 트렌드는 양식인 거예요. 그래서 파스타를 잘하려고 막 노력하는데, 그 친구를 보면서 속으로 ‘얘는 아무리 해도 파스타를 잘 만들지 못할 텐데? 김치찌개를 끓이는 게 나은데?’ 하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김치찌개를 먹어주는 시대는 아닌 거고, 그럴 때 창작자들이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자신의 것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타협하고 바꿀 것인지, 선택하게 되는 거겠죠.
자기 것을 지키려다가 거꾸러진 사람들도 많이 봤어요. 그런데 그것보다는 자기한테 안 맞는 걸 하려다 거꾸러진 사람을 더 많이 본 것 같아요. 한 예로,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잘 이야기하는 여성 감독님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분이 ‘상업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장르적인 걸 해야 된다’는 요구를 받고 자신과 정말 맞지 않는 영화를 하는 거예요. 그런 경우도 많이 봤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아마 많은 창작자들이 같은 고민을 할 거예요. 내 것을 밀고 나가는 게 맞는지. 어떤 사례를 보면 내 것을 하다가 나중에 빛을 보는 경우도 있고, 사회가 변하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창작자들은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할 거예요. ‘이러다가 내가 도태되는 거 아니야? 지금은 이런 걸 해야 된다는데?’ 그런 딜레마가 저에게도 있어요. 소설이든 영화든 다들 있지 않을까요?
그 딜레마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겠죠? 결론을 내리고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 같아요.
네, 그런데 저는 선택을 해야 된다고 봐요. 괴로운 이유는 사실 선택을 안 해서라고 생각해요. 요즘 제가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는 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인데요. 내 것을 계속 고수하기로 했다면 시대가 나를 모를 수도 있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해야 되는 것 같아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죠. 새로운 장르를 해서 안 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하는 거예요. 창작자로서 요즘 드는 생각은, 결국 뭔가를 걸어야 된다는 거예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걸 감수해야 되는 거죠. 최악은, 실패하는 것보다, 무엇도 걸지 않고 계속 선택하지 않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작가님의 선택은 무엇인가요? 잘하는 한식을 계속 하시겠어요? 아니면 트렌드는 양식이니까 파스타를 만드시겠어요? (웃음)
한식을 좀 더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투맨』에 이런 문장들이 있습니다.
“당시 영화진흥위원회에서는 창작자가 여성이거나 혹은 창작물에 여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면 가산점을 주는 제도를 막 시행했다. 여기저기서 잡음이 많은 제도였지만, 어쨌든 「맨투맨」의 경우는 가산점 대상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두 여학생의 여름방학 이야기라고 하는데, 그 짧은 한두 문장의 줄거리만 보고도 왜 독립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을지 짐작하고 있는 스스로가 우습고, 서글펐다.”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 자전적 이야기가 주목받았다. 좋건 싫건 혹은 옳건 그르건, 그건 하나의 트렌드이자 시대의 파도였다. 선택되기 위해선 저 파도를 타야 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소설에 쓰기로 하셨을 때, 어떤 고민을 하셨어요?
이 소설을 쓸 때 ‘비겁하게 쓰지 말자’는 생각이 있었어요. 이 소설 자체가 어떤 것에 대해 눈치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내가 그러지는 말자, 라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이건 확실히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페미니즘이든 정치적 올바름이든, 여성 창작자들의 상황과 이런 사상들을 산업적으로 이용하려는 현상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제가 그런 경우를 봤던 것 같아요. 최근에 여성의 이야기로 독립영화계에서 크게 주목 받은 젊은 여자 감독님이 계신데, 그 분에게 ‘이왕 할 거면 세게 가야 된다’라는 압박이 들어오는 거예요. 저는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을 떠나서 결국은 어떤 시대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다루고 싶었던 건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이 있는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현상을 보는 우리들이죠. 예를 들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가산점을 주는 현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때로는 이용하고 때로는 욕하기도 하는 비겁한 모습을 다루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것들을 바라보는 영호 혹은 저라는 작가, 제가 봐왔던 사람들에 대한 고발에 더 가까운 것 같고요. ‘비겁하지 말자’고 했던 건 그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속 ‘혜진’의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혜진이 비슷한 요구를 받은 적이 있잖아요. 자기 내면에도 그런 목소리가 있었고요. 더 극적으로 강렬하게 각색해야 되지 않을까, 라는. 그 결과 영화는 흥행해도 혜진은 여전히 괴롭죠.
혜진 같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여성 감독님이나 소수자 이야기를 다루는 감독님들을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단 한 분도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라고 하시는 분이 없고 ‘내가 정말 자격이 있는가’ 물으시더라고요. ‘내가 거짓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계속 질문하시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 가장 힘들어하시고 고민하시더라고요.
작가님이 만드신 영화도 궁금합니다. 어떤 이야기인가요?
제목은 <프랑켄슈타인 아버지>예요. 간단한 줄거리가 이겁니다. 30대 후반의 독신으로 솔로 라이프를 잘 지키는 남자가 있는데, 사실 그 남자는 스무 살 때 돈이 필요해서 불법적으로 자기 정자를 판 적이 있어요. 그런데 17년이 지난 다음에 한 소년이 찾아와서 ‘나는 너의 정자로 태어난 아이다’라고 주장을 하는 거죠. 그리고 ‘나는 물건으로 따지면 굉장히 하자가 많은 물건이다, 이건 너 때문이니까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라고 협박을 하는 거예요. 남자는 그에 대한 반격으로 ‘너의 하자가 정말 나 때문인가? 네 말처럼 내가 하자 많은 불량품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면 되지 않나?’ 하면서 한번 체크 해보자고 해요. 그러면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가족 드라마는 아니고요. 장르로 보면 되게 심각한 부분도 있고, 그러면서도 약간 우스꽝스럽고 코믹한 영화예요. 주제적으로는 ‘해방’을 모티프로 만든 영화입니다.
『빅파파』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다루셨는데요. 오래 붙들고 계신 키워드인가요?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관심 있는 건 통상적인 부자관계는 아니에요. 통상적인 부자 관계는 약간 권력적인 것에 조금 더 가깝잖아요. 그것보다 저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부채감에 더 관심이 있어요. 저는 잘 모르지만, 엄마와 딸 사이에도 뭔가 미묘한 게 있지 않아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폭력적이거나 권력적이거나 강압적인 게 아닌, 약간 서로에게 빚을 진 느낌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아들이 ‘아버지를 이기겠어’라고 하는 느낌보다는. 그러니까 서로가 불편하기도 하고요. 저는 그런 부분에 관심이 있어서 계속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생각나는 게, 대학교 때 수업을 듣다가 시를 쓴 적이 있는데, 그게 ‘김현승 시 문학상’에서 가작으로 선정됐었어요. 「동거인」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였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불편한 동거인데 모르는 척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친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고, 싸우는 관계는 아니지만 좀 껄끄럽고 어색하기도 하고, 그런 동거인의 느낌. 저는 그 이상한 관계에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맨투맨』에도 권투, 격투기, 영화 <록키>가 등장합니다. 『빅파파』에서도 볼 수 있었죠. 무엇보다 ‘이기고 지는 것’ ‘한물 간 것과 힙한 것’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되는데요. 이유가 있나요?
격투기나 복싱은 스포츠로서 열광하기보다도 은유적으로 관심이 있어요. 좀 생뚱맞을 수 있는데, 복싱이나 격투기를 보다 보면 ‘참 인간이 보잘것없는 존재구나’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참 나약하고. 전성기에 있는 선수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해요. 저 선수도 몇 년 있으면 누군가에게 맞고 패자가 되겠지, 어쩔 수 없이. 그게 인생의 축소판이잖아요. 우리도 반짝이고 이기고 힙한 순간들은 잠깐이고, 슬프지만 조금 더 패자의 방향으로 ‘한물 간’ 방향으로 계속 끌려가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보면서 비관적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계속 생각해요. ‘그래, 우리는 나약해. 소설을 열심히 쓰고 있지만 100년이 지나면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수도 있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계속 해보려고 하고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비록 지더라도 그 뒤에도 계속 이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게 의미 있고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독자들과 만나고 싶어요.
『맨투맨』에 ‘추천의 글’을 쓴 정용준 소설가는 “자조를 섞지 않으면 예술을 말할 수 없는 시대”라고 했습니다. 작가님의 소설 속 인물들이 냉소적이고 자조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일까요?
제가 그런 사람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웃음) 그런데 제가 그런 사람이라서 아는 게 있는데, 자조하고 냉소하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누구보다 희망을 원한다는 거예요. 그것조차 없으면 자조도 안 하고 냉소도 안 하거든요. 냉소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잘 들여다보면, 속에는 어떤 희망을 품고 있는데 겉으로는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저는 그게 좀 재밌었던 것 같아요. 겉으로 드러난 건 차갑지만 안에는 뭔가 뜨거운 걸 숨기고 있는. 물론 거기에서 그치면 비겁하다고 생각해요. 자조와 냉소에서 그치면 안 되고 ‘그래, 우리 사는 시대가 팔리는 이야기만 하고 그런 거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 어떤 글을 쓸까? 뭘 할까?’로 나아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빅파파』는 ‘남성의 소설’ ‘마초의 소설’이라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맨투맨』도 그럴 것 같으세요? 작가님이 보시기엔 어떤가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그런 건 있겠죠. 저라는 사람이 쓴 소설이면 달라지지 않겠죠. 만약에 제가 마초적인 사람이면 누군가는 그렇게 읽을 수도 있을 거고요. 그리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30대 초반의 대한민국 남성이 쓴 소설인 건 맞아요. 저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마초가 아니야, 남성적이지 않아’라고 하는 게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치장을 하거나 더 그것을 감추는 게 아닌가. 어쨌든 모든 소설가는 자기가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계속해서 사회와 대화를 해야겠죠. 내 이야기만 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물론 동의하지 않는 분들의 의견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거고요. 소설을 쓰면서 마초적이거나 남성적이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만약에 이번 소설이 (전작과 달리) 바뀌었으면 제가 바뀐 거라고 생각을 해요. 저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을까요?
이전에 『빅파파』가 남성 소설, 마초 소설로 평가될 때는 수긍이 되셨나요?
마초와 남성적이라는 표현들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지금 아닌 것도 10년 후엔 그럴 수 있고, 반대로 지금 남성적인 게 20년 후엔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때의 맥락을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남성적이지 않은데?’라고 생각되기도 해요. 저는 강해 보이는 남자들의 약한 면이나 초라함에 더 관심이 있어서 드러내고 싶었어요. 그런데 다르게 읽힐 수도 있는 거죠. 그것조차 마초라고 하면 할 말 없긴 하죠. 그런데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아니야, 다른 면도 있어’라는 거였고, 그런 이야기를 다루기가 힘들다는 걸 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사실 (남성 소설이라는 평가에) 100% 동의는 안 됐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이 소설을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한 것에는 그런 의미도 있어요. ‘맨투맨’이라는 제목처럼, ‘VS’ 가 아니라, 이런 소설을 안 읽었던 독자들도 혹은 저와 나이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정체성도 다르고 모두 다른 독자들과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번 책은 그런 마음이 더 컸어요. 동의하고 말고가 아니고, 욕해도 괜찮으니까, 만남으로써 뭔가가 생긴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많은 분들’이라고 했을 때 양적으로 많다는 의미도 있지만 ‘다양한’의 의미가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소설은 쓰는 것도 멋있는 일이지만 읽는 것도 되게 멋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소설이라는 것을 읽는 삶은 멋있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권이라도 읽고 ‘이 소설 괜찮았지’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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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